폭염속 관곡지에서
해마다 7월말이 되면 찾는 곳이 있다. 시흥시에 있는 관곡지이다. 연꽃테마파크라고 하여 매년 7월말부터 한달가량 연꽃축제가 열린다. 올해는 어떠할까?
축제는 없었다. 폭염의 현지는 썰렁했다. 예년 같으면 각종문화행사와 먹거리축제가 열렸을 것이다. 행사장은 텅 비어 있다. 사람들도 많지 않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지금은 강력한 거리두기 4단계 시행기간이기 때문이다.
뜨거운 계절이다. 이럴 때 ‘작열(灼熱)’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듯하다. 염천(炎天)이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모자 하나 가지고서는 안된다. 우산을 꺼냈다. 흰우산이다. 양산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런 날 그늘만 들어가면 선선하다. 습도가 낮기 때문이다.
연꽃은 여름꽃이다. 연꽃은 여름에 보아야 맛이 난다. 그것도 작열하는 태양아래 보아야 한다. 매년 이맘때가 연꽃철이다. 그러나 현장은 코로나로 인하여 폭격을 맞은 듯하다. 곳곳마다 출입금지를 알리는 테이프가 붙여져 있다. 너무 더워서인지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연꽃은 피어 있다. 코로나가 있건 말건, 사람들이 오건 말건 연꽃은 나름대로 할 일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매년 보는 아름다운 연꽃이다. 이럴때 “저 연꽃을 내년에도 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내년에도 볼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해보는 것이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을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소중한 것이다.
카르페 디엠, 종종 접하는 말이다. 시인은 종종 “카르페 디엠”하며 문자를 쓴다. 무슨 뜻일까? 사전을 찾아보니 “현재를 잡아라.”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한마디로 “현재를 즐겨라!”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카르페 디엠”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말이 불교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딧타담마(diṭṭhadhamma)”라는 빠알리어가 그것이다.
딧타담마는 초기경전에 종종 나온다. 한자어로는 ‘현법(現法)’이라고 한다. 이 말은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현상’ 또는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법’을 뜻한다. 영어로는 ‘히어 앤 나우(here and now)’이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야 말로 실재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현존(現存)’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것 같다. 그래서 “카르페 디엠”하며 “현재를 즐겨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현재를 붙잡는 것은 현재를 본다는 의미와 같다. 현재를 본다는 것은 현재를 즐긴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종로3가 환승역에서 본 공익광고 포스터에서는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고 했다. 한번 지나가면 오지 않기 때문에 이 순간을 즐기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특히 청춘의 시절이 그렇다. 유행가 가사에서도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라고 했다. 또 기타부기 노래에서는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피였다가 시들으면 다시못필 내청춘 마시고 또마시어 취하고 또취해서 이밤이 새기전에 춤을춥시다.”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즐겨야 하는 것일까? 다시 못 올 이 순간을 즐겨야 하는 것이라면 카르페 디엠이나 딧타담마는 같은 뜻이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옛날에도 있었다.
“붓다가 출현하기 전에도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감각적 쾌락은 지고의 행복이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쾌락은 지금 이 생에서 향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내생의 지복을 기다리며 즐거움을 누릴 귀중한 현재의 순간을 지나쳐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마하시사야도)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법문집에 실려 있는 현법열반론에 대한 것이다. 감각적 쾌락을 완벽하게 누릴 시간은 바로 이 생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기경전을 보면 “수행승이여, 그대는 향락없이 걸식하네,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지 않네. 수행승이여,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걸식하십시오.”(S1.20)라고 했다. 악마가 갓 출가한 수행승을 유혹하는 장면이다.
지금 여기에서 감각을 즐기는 것을 현법열반론이라고 한다. 현법열반론은 62가지 사견중의 하나이다. 지금 여기에서 감각을 즐기는 자들을 딧타담마닙바나와다(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라고 한다. 현법열반론은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경험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눈, 귀, 코 등으로 오욕락을 즐기는 자가 현법열반론자가 된다.
현법은 직접경험에 의해 보여지는 것을 말한다. 주석에서는 “그때 그때 경험되는 자기존재와 동의어이다.”라고 했다. 이를 고상한 말로 ‘현존’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한다. 또한 주석에서는 “현법열반이란 이 자기존재안의 괴로움의 지멸을 뜻한다”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니 사견(邪見)이다. 가짜열반을 말한다.
누구나 현재를 말한다. 누구나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현재를 살자고 말한다. 현존도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현재 또는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도 말한다는 것이다. 대개 즐기는 것으로 귀결된다. 지금 여기에서 감각을 즐기다는 것이다. 삼매도 해당된다.
행복이라는 말은 즐긴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이는 행복을 뜻하는 수카(sukha)라는 빠알리어는 행복(happy)의 뜻도 있지만 쾌락(pleasure)의 뜻도 있다. 라틴어 카르페 디엠은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이다. 또 빠알리어 딧타담마 역시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카르페 디엠이나 딧타담마는 사실상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눈이나 귀, 코, 혀, 몸으로 감각을 즐기자는 것이다.
현법열반은 가짜열반이다. 또 유사열반이라고 볼 수 있다. 감각을 즐김으로 인하여 행복을 맛보는 것은 감각적 욕망에 따른 것이다. 자아가 개입되어 있는 행복이다. 내가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법열반론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D1)
감각을 즐기는 자들은 감각을 즐길 때 근심과 걱정을 잊어버릴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 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할 것이다. TV 먹방 프로를 보면 알 수 있다. 술을 마시면 근심걱정을 잊을 수 있다. 그래서 술을 ‘열반주’라 하는지 모른다. 이성과 보드라운 잠자리를 갖는 것도 열반이라 생각할 것이다.
현법열반은 감각을 즐기는 것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선정삼매에 드는 것도 가짜열반으로 볼 수 있다. 자아가 개입된 삼매를 말한다. 자아가 개입되어 있다면 유사열반, 가짜열반일 뿐이다.
열반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결코 인식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그럼에도 감각이나 삼매를 열반으로 보아 “지금 경험하는 이 순간을 즐겨라!”라고 말한다면 자아가 개입된 유사열반, 가짜열반일 뿐이다.
카르페 디엠, 딧타담마, 현존, 이런 말들은 뿌리가 같다. 공통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한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지금 여기서 즐기자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현법열반에 대해서 사견이라고 했다. 왜 사견인가?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자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사견이고, 또 하나는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사견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1)
부처님도 현존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현존은 즐기는 것이 아니다. 현존은 관찰대상이다. 지금여기에서 찰나생찰나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현재는 있을 수 없다. 과거도 잡을 수 없고 미래도 잡을 수 없듯이 현재도 잡을 수 없다. 오로지 생멸만 있을 뿐이다. 오온의 생멸을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오온의 생멸을 관찰했을 때 오온이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세상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자아가 있는 한 그 느낌에서 오는 행복, 즐거움, 평정은 단지 느낌에 그칠 뿐이다. 느낌은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자아가 느끼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단지 ‘행복감’일 뿐이다.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이다.
지금 여기에서 즐겨서는 안된다. 지금 여기에서 찰나생찰나멸하는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가?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본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탐욕의 경향을 버린 ‘바른 관찰자’ 라고 한다. 그는 갈애를 부수고 결박을 자르고 아만에 대한 바른 이해로 괴로움의 종극에 도달한다.”(S36.5)
괴로운 느낌은 괴로운 느낌일 뿐이다. 그럼에도 즐거운 느낌을 왜 괴롭다고 보라고 했을까? 이는 “즐거운 느낌이 생겨나면, 그는 이와 같이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히 안다.”(M36.7)라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몸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조건이지 조건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이 몸을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원인으로 생겨난 즐거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것인가?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하면, 몸에 관한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관한 탐욕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M36.7)
이 법문은 부처님이 병상의 환자에게 말한 것이다. 몸으로 즐거운 느낌이 생겼을 때 이를 즐기지 말고 관찰하라고 했다.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조건발생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도 조건이 다하면 사라진다. 그래서 즐거운 것을 괴로운 것이라고 보라고 했다. 어떤 느낌이든지 괴로운 거승로 보면 탐욕의 뿌리가 뽑힐 것이라고 했다.
관곡지 연꽃은 십년 이상 보아 왔다. 매년 7월말 주말이 되면 가서 사진을 찍고 글을 남겼다. 올해도 예외 없다. 내년에도 올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올해 관곡지에서 연꽃축제는 없었다. 언제나 그런 모습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변화가 생긴 것이다. 더구나 연밭 한쪽은 논으로 변했다. 마치 이빨 빠진 것처럼 벼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변화의 조짐일까?
어떤 것이든지 영원하지 않다. 계속 변하고 있다. 어느 때 관곡지의 연꽃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연꽃은 피어 있다. 코로나가 창궐하건 말건, 사람들이 찾아오건 말건 올해도 예년처럼 피어 있다.
2021-07-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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