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일체가 불타고 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19. 05:49

일체가 불타고 있다


오늘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아침에 비가 왔다. 점심 무렵에는 활짝 갰다. 늘 그렇듯이 비 온 다음에는 하늘이 맑다. 하얀 뭉게 구름이 피어오르고 하늘은 높아 보인다. 이런 날 저녁노을을 기대해도 좋다.

저녁 7시 넘어 노을이 시작되었다. 서쪽 하늘이 물들어 갔다. 이번에는 주황색 노을이다. 노랑색에 가깝다. 짙은 구름 사이로 하늘이 터진 듯하다. 터진 하늘이 오렌지 색으로 물들었다.

 


하늘은 수채화처럼 보인다. 수묵화를 보듯 회색구름으로 가득하다. 하늘과 구름과 노을이 서쪽 하늘에 수채화를 그려 놓은 듯하다.

수채화는 가만 있지 않는다. 시시각각 모양을 달리한다. 5분후와 10분 후가 다르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30분이다. 노을은 지고 말 운명에 있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해서일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하게 만든다.

 


노을에서 영원을 본다. 터진 하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상상력을 총동원해 본다.

허공에 허블 망원경을 대면 초기 은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텅빈 공간에 망원경을 고정시켜 놓고 관찰하면 보인다는 것이다. 노을을 바라보면 우주를 보는 것 같다. 태고적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노을은 태고적 흔적이다.

노을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십년전에도 봤었고 이십년전에도 봤었다. 유년기 시절에도 봤었다. 그러나 매번 다르다. 한번도 똑같았던 때가 없다. 백년전에도 이백년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인류가 생겨 나기 전에도 노을이 있었을 것이다. 공룡시대에도 노을이 있었을 것이다. 태고적에도 노을이 있었을 것이다. 노을은 태고와 닿아 있는 것 같다. 노을을 통해서 태고를 본다. 노을을 통해서 무한을 본다. 노을에서 숭고(崇高)를 본다.

 


부처님도 노을을 말했다. 상윳따니까야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S35.28)을 말한다. 경에서 부처님은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말했다. 부처님이 가야산에서 설법할 때 서쪽하늘을 벌겋게 달군 노을을 보고서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노을을 보면 세상이 불 난 것처럼 보인다. 이를 일체가 불탄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일체란 무엇인가? 여섯 감각영역을 말한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보게 되는데 이를 세상의 발생으로 본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어서 세상이 있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창조자이다. 눈이 있어 대상을 보았을 때 세상이 발생된다. 그런데 내가 창조한 세상은 불타고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S35.28)라고 했다.

세상은 불타고 있다. 그렇다고 화재가 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여섯감역이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불타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S35.28)고 말했다.

 


사람들은 탐, 진, 치로 살아간다. 시각적으로는 끊임없이 매혹적인 대상을 찾는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끊임없이 즐길 거리를 찾는다. 그래서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고 했다. 이번 생만 그런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탐, 진, 치가 윤회하는 존재의 땔감임을 말한다. 

 

탐욕을 부리면 부릴수록 탐욕의 땔감은 늘어난다. 탐욕을 내면 낼수록 탐욕의 불은 거세게 타오른다. 결국 자신도 태워버릴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S35.28)고 있다고 했다.

저녁노을은 오래 가지 않는다. 해가 지고 난 다음 서쪽 하늘을 벌겋게 달구었다가 이내 스러지고 만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온다. 그러나 끝난 것은 아니다. 다음날 새벽이 되면 해는 떠오른다. 노을은 또다시 반복된다. 중생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 치로 사는 한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 , 치는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땔감이 된다. , , 치가 소멸되지 않는 한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한다. , , 치로 사는 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세상은 절망으로 불탄다고 했을 것이다.

태어남은 절망의 종착지를 향해 간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S35.28)고 했을 것이다.

 


저녁노을은 아름답다. 저녁노을에서 찬란한 슬픔을 본다. 스러져 가는 노을을 보면 절망으로 붙타는 것 같다. , , 치의 땔감이 있는 한 내일도 모래도 세상은 불탈 것이다. , , 치가 소멸하지 않는 한 탐, , 치의 땔감으로 인하여 세상은 절망으로 불탈 것이다.


2021-08-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