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그 사람은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14. 11:13

그 사람은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

 

 

토요일 아침이다. 요즘에는 새벽에 일어나지 않는다. 새벽에 깨었어도 다시 잠을 청한다. 잠을 잘 자고 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마치 혼탁한 물이 가라 앉는 것 같다. 이대로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

 

토요일이다. 주말임에도 가야 할 곳이 있다. 나의 아지트이다. 마음은 벌써 그곳에 가 있다. 아직 마음은 오염되지 않았다. TV도 보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았다.

 

뉴스를 듣는 순간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격랑에 휘말릴 것이다. 에스엔에스도 보지 않는다. 카톡방에서는 전쟁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보아서 좋을 것이 없다. 먹는 것도 최소화한다. 눈이나 귀 등으로 대상을 접촉하는 순간 휘말린다. 이 기분 이 느낌 그대로 가지고 가야 한다.

 

차의 시동을 건다. 불과 10분 거리이지만 요즘 차를 가지고 다닌다. 늘 그렇듯이 이미우이의 라따나경 음악을 듣는다. “야니다 부따니 사마가따니~”하며 빠알리 음악이 흘러나온다. “여기 모여든 모든 존재들은~”이라는 뜻이다.

 

음악이 키낭 뿌라낭 나왕 낫티 삼바왕~”하며 14번째 게송에 대한 가사가 나오면 아지트에 다 온 것이다.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라는 뜻이다. 음악은 13분짜리이다. 모두 17개의 게송으로 13분 걸린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식물이 반겨 주는 것 같다. 매일 보는 것이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일년 이년도 아니다. 십년 이상 보는 것도 있다. 특히 2007년 사무실 입주와 함께 한 행운목이 그렇다.

 

매일 그날이 그날 같지만 아침이 되면 매번 새롭다.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것이다. 어제 보았던 식물은 그대로이지만 오늘 아침 새롭게 보이는 것은 마음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마음이다. 이 마음이 하루 종일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이 마음도 결국 깨지고 말 것이다. 대상을 접하는 순간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다. 뉴스에서 기사 한줄보고 마음의 동요가 일어날 수 있다. 가능하면 안보는 것이 좋다. 카톡방의 난타전도 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현재의 마음을 계속 유지하려면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늘 그렇듯이 자리에 앉아서 아무 경전이나 펼쳐 본다. 오늘 손에 잡힌 것은 테리가타이다. 아무 곳이나 넘겼더니 마음이 벌써 청정해졌다. 초기경전은 어느 곳을 열어도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 같다.

 

테리가타 게송을 주석과 함께 보았다. 게송만 있는 것을 보아서는 심오한 뜻을 잘 모른다. 주석을 보아야 숨겨진 의미를 알 수 있다. 단어 하나에 대하여 또는 한 구절에 대하여 주석해 놓은 것을 보면 마음이 저절로 충만해지는 것 같다. 테리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뿐나여, 보름달의 만월처럼

가르침으로 가득 채워라.

가득 채운 지혜로

어둠의 다발을 부수어라.”(Thig.3)

 

 

테리가타 3번 게송이다. 이 게송은 부처님이 읊은 것이다. 게송 인연담을 보면, 뿐냐장로니는 이 게송을 듣고 통찰을 계발하여 거룩한 경지(阿羅漢)를 얻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보름달의 만월처럼 가르침으로 가득 채우라고 했다. 또한 부처님은 가득 채운 지혜로 어둠을 부수라고 했다. 여기서 가득 채운 지혜 (paripuṇṇaya paññaya)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다행스럽게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출간된 테리가타-장로니경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테리가타 교정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2017년의 일이다. 전재성 선생의 니까야강독모임이 인연이 되었다. 교정작업할 때 최소한 두 번 읽어 보았다. 그럼에도 오늘 보니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새롭다. 아직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득 채운 지혜에 대하여 각주해 놓은 것을 보면 거룩한 길에서의 앎의 열여섯 가지 작용”(ThigA.16)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네 가지 방식(완전히 알고 끊어버리고 깨닫고 닦는 것으로 꿰뚫는 네 가지 길의 진리에 네 가지 작용(Vism.689-691)으로 채우는 것”(ThigA.16)이라고 했다.

 

게송에서 키워드는가득 채운 지혜이다. 이에 대하여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이라고 했다. 각주에서는 청정도론을 참고하라고 했다. 이에 청정도론 689페이지와 691페이지(Vism.689-691)를 읽어 보았다.

 

청정도론에서는 가득채운 지혜에 대하여 사성제를 완전히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를 완전하게 알면 나머지도 완전하게 아는 것임을 말한다. 사성제에서 고성제를 꿰뚫어 알면 나머지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도 꿰뚫어 앎을 말한다.

 

학교 다닐 때 수학 잘하는 학생은 어떤 과목이든지 잘 했다. 영어를 잘 하는 학생은 수학도 잘하고 국어도 잘했다. 사성제도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S56.30)라고 했다.

 

고성제를 철견 하면 나머지 진리도 철견 할 수 있다. 집성제를 철견 하면 나머지 진리도 철견 할 수 있다. 멸성제도 도성제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네 가지 진리 중에 한가지를 철저히 알면 나머지 진리도 철저하게 알게 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등불의 비유를 들었다.

 

 

예를 들어, 등불이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찰나에 네 가지 작용을 한다. 즉 등심을 불태우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두루 밝히고, 기름을 소모한다. 이와 같이 길에 대한 앎도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한 찰나에 네 가지 진리를 꿰뚫는다.”(Vism.22.92)

 

 

진리는 한 찰나에 꿰뚫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깨달음의 기연(機緣)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 새벽별을 바라보다가, 몸을 눕히는 순간, 밭을 갈다가, 새벽닭 우는 소리에, 가을날 홍시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종소리를 듣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라고 설명한다. 순간적으로 진리의 본성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의 기연은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서도 볼 수 있다. 테라가타에서 쌉빠다싸 장로는그때 나는 삭도를 들고 침상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목의 정맥을 자르기 위해 삭도를 가져다 그 곳에 대었다.”(Thag.408)라고 했다. 테리가타에서 담마장로니는탁발을 다니다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없이 흔들리는 팔다리로 땅바닥에 넘어졌는데, 몸에 일어난 그 재난을 보자 나의 마음은 해탈되었다.”(Thig.17)라고 했다.

 

깨달음의 기연은 수행한 결과가 어느 한순간 계기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가 가르침을 배워서 실천했을 때 어느 순간 계기가 되었을 때 한순간 꿰뚤음이 있을 것이다. 괴로움에 대하여 철견했을 때 어느 순간 괴로움의 본질에 대하여 꿰뚫었다면 나머지 발생, 소멸, 닦음도 꽤뚫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를 등불의 비유로 설명했다. 그래서 등불과 사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등불이 심지를 불태우듯, 이와 같이 길에 대한 앎은 괴로움을 완전히 알고, 어둠을 쳐부수듯, 발생을 끊어버리고, 빛을 두루 비추듯, 병발조건 등의 조건으로서 올바른 사유 등의 원리라고 불리는 길을 닦고, 기름을 소모하듯, 오염을 소모하여 소멸을 깨닫는다.”(Vism.22.94)

 

 

불은 재료가 있어야 탄다. 촛불은 초가 있어야 한다. 심지도 있어야 한다. 인생을 등불로 비유할 수 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윤회의 불은 계속 타고 있다. 이 몸과 마음이 다 하면 또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타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연료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탐, , 치이다. 존재는 탐, , 치를 연료로 해서 타오른다.

 

인간은 탐, , 치의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탐, , 치이기 때문에 탐욕의 불로 타오르고, 성냄의 불로 타오르고, 어리석음의 불로 타오른다. 욕심을 내면 낼수록, 욕심이 땔감이 되어 거세게 타오를 것이다. 이번 생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탐욕의 땔감, 성냄의 땔감, 어리석음의 땔감은 다음 생에도 활활 타오르게 하는 연료가 된다.

 

, , 치는 집착의 산물이다. 더 근원적으로 갈애에 의한 것이다. 느낌에 대하여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갈애가 되고,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되면 집착이 된다. 그런데 집착은 윤회의 땔감이 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집착인가?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고 있는 한 집착이 땔감이 되어서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등불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집착이라는 땔감으로 훨훨 타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등불이 가지는 빛에 의해서 어둠을 밝히기 때문에 무명을 몰아내는 지혜를 의미한다. 청정도론에서 등불의 비유는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을 계속 지필 것인가? 불을 끌 것인가? 불이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라면 윤회의 땔감이 되기 때문에 꺼야 할 것이다. 어떻게 꺼야 하는가? 윤회의 땔감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된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소멸하는 무탐, 무진, 무치의 길로 가면 윤회의 불은 꺼질 것이다. 마치 땔감이 다 탔을 때, 더 이상 탈 것이 없을 때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

 

한번 글에 집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일년전에도 그랬고 이년전에도 그랬다. 십년전에도 그랬다. 바로 이 자리에서 십년을 하루 같이 오전일과를 글쓰기로 보냈다.

 

글을 쓸 때는 글쓰기 삼매에 빠지는 것 같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힘든 지도 모른다. 몸이 아픈 줄도 모른다. 이렇게 오전 일과를 다 보내고 난 다음 비로소 나의 일을 시작한다. 생업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과 접하게 된다. 인터넷으로 접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접하는 순간 정신은 오염된다. 요즘은 에스앤에스 영향이 크다.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을 본다. ‘좋아요가 많으면 즐거워한다. 누가 눌렀는지 명단을 훑어본다. 좋아요 추천이 많거나 댓글을 많이 단 사람을 보면 찾아가 보고 싶다. 만나서 선물도 하고 점심을 사 주고 싶다. 물론 이야기도 들어 보아야 한다. 듣다 보면 배울 것이 있을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분노한다고 해서 따라서 분노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된다. 거울로서 그 사람을 보아야 한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가르침의 거울로 보는 것이다.

 

가르침의 거울이 있다. 이를 담마다사(Dhammadasa)라고 한다. 나의 법명도 담마다사이다. 이를 한자어로 법경(法鏡)이라고 한다.

 

담마다사는 법을 뜻하는 담마와 거울을 뜻하는 아다사의 복합어이다. 담마다사는 초기경전에 종종 눈에 띈다. 테라가타에서 꿀라장로는 “앎과 봄을 얻기 위해 가르침의 거울을 붙잡고 이 몸이 안팍으로 공허한 것을 관찰했다.”(Thag.395)라고 했다.

 

담마다사는 가르침의 거울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뭇삶들이 거울로 자신의 몸이나 얼굴에서 장점이나 결점을 보듯이, 이와 같이 수행자는 자신의 존재에서 오염과 정화를 그대로 보는데, 그 통찰에 의한 앎을 여기서 가르침의 거울이라고 한다.”(ThagA.II.168)라고 했다.

 

사람들은 매일 거울을 본다. 거울은 나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어 준다. 얼굴은 액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보여주지 못한다. 마음의 거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담마의 거울로 볼 수밖에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 비추어 자신의 오염원을 보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내가 얼마나 성냄이 많은지,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가르침의 거울로 보는 것이다.

 

거울을 보면 있는 그대로, 액면 그대로 나의 모습을 비추어 준다. 법의 거울로 나의 마음을 보면 나에게 어떤 오염원이 남아 있는지 볼 수 있다. 그런데 타인을 통해서도 나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마치 존자 난다가 천녀를 봄으로써 쑨다리의 아름답지 못함이 명료하게 되는 것과 같다.”(Vism.22.99)라고 언급한 것과 같다.

 

중생의 세계에서 중생으로 살아 갈 때 부딪친다. 세계와 세계가 부딪치는 것이다. 충돌이 일어날 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럴 때 타인은 나의 거울이 된다. 이를 가르침의 거울로 비추어 보면 나의 단점이나 결점이 드러난다.

 

토요일 오전 글을 쓰느라고 시간을 다 보냈다. 아침 일찍 나와서 자판을 두들기다 보면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간다.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마음이 청정하다. 외부 자극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 다시 마음은 오염될 것이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나를 돌아 보게 한다면 그 사람은 나의 거울이 된다. 그 사람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보기 때문이다. 경계에 부딪칠 때마다 가르침의 거울로 비추어 보아야 한다.

 

 

2021-08-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