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과학적 유물론자의 말은 진실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10. 09:31

과학적 유물론자의 말은 진실일까?


지식인들이 문제다. 보통불자가 보는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많이 배워서일까 배운 티를 내는 것 같다. 지식인 불자들 상당수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내세를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아마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믿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번도 원자의 구조를 보지 못했지만 과학자들의 실험데이터와 논문이 있기 때문에 믿을 것이다.

내세를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업과 업보를 믿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교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행위를 하면 과보가 따른다는 것은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던 것이다. 그럼에도 내세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과학자들이 내세를 믿지 않는 것은 물질을 탐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연과학자들은 물질을 탐구한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을 쪼개고 쪼개서 궁극을 보고자 할 것이다. 화학, 생물학 등 모든 과학이 그렇다. 분석을 통해서 궁극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공학이나 의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학자들은 물질을 탐구한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자들은 유물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 오로지 물질인 것이다. 그런데 물질에는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도 정신을 찾을 수 없다. 유물론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부처님 당시에도 유물론자가 있었다. 육사외도 스승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잘 알려져 있다. 아지따는 우리 몸은 사대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유물론은 단멸에 대한 것이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몸에서 파생된 정신도 함께 무너지므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이와 같은 허무주의적 견해는 결국 업과 업보를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외도 스승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보시는 실로 어리석은 자들의 말이고, 사후의 존재를 설하는 사람들의 말은 오로지 공허한 거짓일 뿐이다. 어리석은 자이건 현명한 자이건 몸이 파괴되고 죽은 후에는 괴멸하여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된다.”(S24.49)

 


보시공덕을 부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단멸론자들은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면 내세는 부정되고 업과 업보도 부정되고 당연히 윤회도 부정된다.

윤회는 불교의 근간이다. 윤회없는 불교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님 중에도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이 있다는 사실이다! 법륜스님도 그렇다. 법륜스님은 즉문즉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내생이 있느니 업느니 이런 얘기 하는 게 부처님이겠어요? 그러면 천당이 있느니 없으니 하는 거와 차이가 뭐가 있어요? 똑 같은 얘기지. 천당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증명을 하겠어요? 없다고 그러면 증명을 하겠어요? 내생이 있다면 증명을 하겠어요? 없다는 것을 증명을 하겠어요? 이런 걸 뭐라 그런다? 믿음에 속한다. 알았습니까?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있는 줄 아는 거고.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는 줄 아는데. 있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없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거요 이거는.”(법륜스님, 즉문즉설 제382, 불교의 환생, 2010)


법륜스님은 천당도 없고 천국도 없다고 했다.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증명되지 않은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법륜스님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스님의 과학적 사고방식이 클 것이다. 다음으로 전국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인뿐만 아니라 타종교인, 그리고 일반사람들까지 아우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부정한 것이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은 현세에 충실하자는 메세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업과 업보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후로도 법륜스님은 윤회에 대하여 단지 믿음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법문했다.

과학자들은 내세를 부정할 수 있다. 물질을 분석하는 입장에서 내세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수학자도 그렇게 말했다. 경북 P공대에 있는 수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인들은내세가 없다면 지금 제멋대로 살다가 가면 될 것이라며내세가 없다는 주장을 공격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적인 주장이다. 그리 주장하는 사람이나 그리 할 일이다.”(K교수, 내세에 대한 믿음이 행복을 증진하는가?, 불교닷컴 2014-06-16)


K
교수는 내세와 윤회가 없어도 충분히 윤리적으로 살아 갈 수 있다고 했다. 소수의 사람들은 가능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되는대로 살 것이다.

내세가 없다면 내세를 위한 공덕도 짓지 않을 것이다. 보시공덕, 계행공덕, 수행공덕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현세에서 행복하게 살다 가면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즐기는 삶이 된다. 이는 다름아닌 탐, , 치의 삶이다.

사람들은 욕심부리고 성내는 것이 중죄인줄 모른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다. 천수경을 보면 십악참회가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살생업과 동급으로 중죄에 해당된다. 업과 업보를 안다면 탐, , 치로 살 수 없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내세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 같다. 리차드 도킨스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재미 철학자는 인간을 단지 기계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묘사했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썼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행위는 기계적·인과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나는 의도의 형성이나 목적 지향적 행위를 뇌세포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실용적인 면에서 기계적·인과적 설명이 쉽고 편리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쉽고 편리하다고 해서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재미철학자의 글을 보면 유물론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스승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유물론과 유사하다. 다만 현대판 유물론이기 때문에 이를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미에 결론적으로 "쉽고 편리하다고 해서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자신의 과학적 성과물이야말로 진리임을 말한다. 이는 기존의 진리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 된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진리로 인정할 수 없음을 말한다. 유심론 같은 것을 진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어느 시대에서나 유물론은 있었다. 과학이 발달한 요즘은 과학적 유물론이라 하여 좀더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들의 주장대로 내세가 없다면 반의 확률밖에 안된다.

반의 확률에 내기를 걸 수 없다. 내세 없다고 보아 막행막식하며 산다면 낭패 보기 쉽다. 나머지 반의 확률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세와 윤회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안심이다. 유물론자의 말은 참고만 하면 된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유물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허무주의자들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등을 개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단견斷見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 귀와 같은 물질적 형태가 스스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한다고 주장합니다. 감각기능에 속하는 의식(, mana)도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하나로 표현되는 의식의 소멸을, 자기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우주와 융합되거나 우주 속으로 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바보이든 현명한 이든 죽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죽은 다음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보는 내생에서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상응하는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도 내생에서 자신이 지은 선업의 과보를 누리지 않는다. 죽은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허무주의적 견해를 취하는 아지따의 가르침의 일부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악행을 피하거나 선행을 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주장과 같이 정말로 죽은 뒤에는 내생이 없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죽음 이전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자인
自認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면 죽음 이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이 주장하던 바대로라면 살아있는 자아(앗따, atta)나 유정(
有情, 삿따. satta)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지따가, 사람은 사대四大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도 자아와 유정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내생을 위해 선행을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쾌락을 누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은 소멸한다고 하는 이러한 허무주의적 견해와 결부된 갈애를, 비존재에 대한 갈애(
無有愛 vibhava-tahā)라고 합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초전법륜경에 있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단멸론에 대한 것이다. 이는 유물론에 바탕한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후예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적 유물론자들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권위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 말을 믿어도 될까? 그 사람이 박사학위가 있고 교수이기 때문에 그 사람 말을 믿어야 할까? 자신의 연구성과를 내밀면서 "이것이 진리이다."라는 식으로 말했을 때 믿어야 할까?

과학자들이 탐구한 것은 물질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정신을 탐구한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내세를 말하지 않는다. 내세를 부정하기도 한다.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만 믿겠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말은 진리일까? 그들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해도 유물론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유물론은 반쪽짜리 진리밖에 되지 않는다. 물질을 탐구하는 자들은 내세를 말할 수 없다. 인간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정신과 물질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은 구분 되어 있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에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가 있다. 이를 위빠사나 1단계 지혜라고 한다. 이렇게 위빠사나 지혜는 정신과 물질이 구분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첫번째 통찰이라고 한다. 유물론자들은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정신이 물질을 앞선다고 했다. 이는 법구경 1번 게송에서도 확인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내세는 있다. 업과 업보도 있다. 보시를 하면 보시과보를 받는다. 이것은 세상이치이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내세는 있다. 유물론자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저 세상은 없다.’고 견해를 갖는다면, 그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저 세상은 없다.’고 사유를 한다면, 그는 잘못된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저 세상은 없다.’고 언어를 말한다면, 그는 잘못된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저 세상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 세계를 아는 거룩한 이들에게 적대하는 것이 됩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저 세상은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주면서 스스로를 칭찬하고 남을 비난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악한 계행을 실천하며 앞서 있었던 선한 계행을 버립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언어, 거룩한 이에 대한 적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줌, 스스로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 이러한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잘못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M60)


2021-08-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