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덕(德)과 유사한 불교의 개념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11. 10:03

불교에서 덕(德)과 유사한 개념은?

 

 

유튜브에는 갖가지 볼거리로 넘쳐난다. TV를 보는 것보다 유튜브 보는 시간이 더 많다. 유익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무익한 것들이다. 유익한 것 하나를 들라고 말하면 최진석 선생의 노자와 장자 강연에 대한 것이다.

 

작년 이천으로 납품 갈 때 주로 최진석 선생의 강연을 들었다. 두 번, 세 번 들은 것도 있다. 들을 때 마다 새로웠다. 이전에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도 하지만 나의 인식범위를 넘어선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했을 것이다. 경전을 접하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 같다. 고전을 바탕으로 한 강연을 들으면 역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 같다. 최진석 선생의 노자와 장자강연도 그런 케이스에 속한다.

 

최진석 선생은 장자 강연에서 덕 이야기를 했다. 마치 곤()이 붕()이 되는 것처럼 덕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키우는가? 덕의 두께를 키우라고 했다. 이를 다른 말로 자신의 함량을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덕을 키워 놓으면 붕새가 되어 하늘을 훨훨 저 멀리 저 높이까지 날아갈 것이다.

 

최진석 선생의 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불교에서 덕과 유사한 개념은 무엇일까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꾸살라(kusala)가 가장 가까운 개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유튜브에서 ‘5분 뚝딱 철학 김필영 선생의 아리스토텔레스 덕(arete)이야기를 듣다 보니 거의 맞아 떨어진 것 같다.

 

김필영 선생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이다. 이는 스승이자 경쟁자인 플리톤의 이상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론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왜 사는 것일까? 어떤 이는 사는데 이유가 있느냐고 말한다. 저 들에 있는 야생화는 왜 꽃을 피우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저 강아지는 왜 태어났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존재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는데 이유를 묻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사유능력이 있다. 언어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한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삶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목적이 없는 삶은 정신능력이 없는 존재의 삶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인간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으로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했을 때를 말한다. 마치 의자가 의자로서 기능을 잘 발휘했을 때 좋은 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선한 능력을 한껏 고양했을 때 잘 사는 것이 된다. 덕과 같은 것이다. 덕이란 무엇일까?

 

흔히 덕장이라는 말을 한다. 용장, 지장, 덕장이 있지만 덕장을 최고로 쳐 준다. 왜 그런가? 덕장은 용장과 지장을 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이 있는 자가 천하를 가진다고 했을 것이다.

 

덕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필영 선생은 ‘5분 뚝딱 철학에서 덕을 키우는 방법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예로 들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덕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이고, 정의는 무시와 굴복의 중용이고, 후함은 인색과 방탕의 중용이라는 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을 영어로 아레테(arete)라고 한다. 아레테는 인간이 가진 탁월한 기능을 발휘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좋은 것(goodness)’이 된다. 그런데 좋은 것은 선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꾸살라()와 잘 맞아 떨어진다.

 

초기경전에서 꾸살라(kusala)는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번역된다. 반대되는 말은 아꾸살라(akusala)이다.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꾸살라는 열 가지 선행으로 잘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벗들이여, 어떠한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입니까? 벗들이여, 1)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4)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5) 이간질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6) 욕지거리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7) 꾸며대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8) 탐욕이 없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9) 분노가 없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10) 바른 견해가 착하고 건전한 것입니다. 이것들을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고 합니다.”(M9)

 

 

이를 십선행이라고 한다. 천수경에서는 십악참회로 나타나 있다. 다만 천수경과 차이나는 것은 열 번째 항목이다. 천수경에서는 치암중죄금일참회라고 하여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에 대하여 중죄라고 했으나 니까야에서는 삿된 견해를 가진 것에 대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라고 했다. 그래서 십악행에서 열번째 항목을 보면 삿된 견해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고 합니다.”(M9)라고 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꾸살라행은 해탈과 열반의 삶을 지향하는데 적용된다. 이는 다름아닌 출세간의 삶에 대한 것이다. 세간적 삶에서는 꾸살라라는 말대신 공덕을 뜻하는 뿐냐(puñña)라는 말을 사용한다.

 

서양철학에 대하여 잘 모른다. 다만 유튜브에서 요약해 놓은 것을 보고서 대강을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서양철학의 뿌리인 그리스철학을 보면 불교와 유사한 면도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에 관한 것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강조했다. 인간의 탁월한 능력을 덕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사는 목적에 대한 것이다. 삶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덕을 쌓는 것을 삶의 목적이라고 본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현세적인 것이다. 그리스철학에서 내세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은 현세와 내세의 행복에 대한 것이다. 만일 부처님이 현세의 행복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면 단멸론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말씀하셨다. 이는 법구경에서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한다.”(Dhp.18)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과 열반이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려면 꾸살라행을 해야 한다.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들은 한결 같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Sabbapāpassa akaraa,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pariyodapana

eta Buddhāna' sāsana.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Dhp183)

 

 

법구경에 있는 게송이다. 이 게송은 매우 유명하다. 칠불통계게라 하여 불교의 이념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수가 담긴 게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 이 게송으로 압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게송에는 율, , 론 삼장이 모두 다 들어가 있다. 모든 죄악을 짓지 않는 것(諸惡莫作)은 율장에 대한 것이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衆善奉行)을 성취하는 것은 경장에 대한 것이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自淨其意)은 논장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게송에서는 아꾸살라와 꾸살라가 나온다. 아꾸살라는 십악행에 대한 것이고, 꾸살라는 십선행에 대한 것이다. 악행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선행은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율장에 해당되고, 해야 되는 것은 경장에 해당된다. 하지 말하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을 했을 때 마음이 깨끗해질 것이다. 이 세상에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국 해탈과 열반으로 귀결된다.

 

나는 덕이 있는 사람일까? 나에게 덕이 있다면 주변에 사람들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덕이 부족한 것 같다. 그러나 실망할 것 없다. 마치 곤이 붕이 되는 것처럼 덕의 두께를 키워야 한다. 자신의 함량을 키웠을 때 사람들이 따를지 모른다.

 

덕 있는 사람이 있다. 아마 타고난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덕의 두께는 키운다고 해서 키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정도 노력하면 덕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함량 키우는 것은 이번 생에 안되면 다음 생에 이어지질 수도 있다.

 

장자에서 말하는 덕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은 불교에서 말하는 꾸살라와 비슷한 것이라고 본다. 덕이 있다는 것은 꾸살라행을 해서 선업공덕이 있다는 말과 같다고 본다. 덕을 쌓는다는 것은 선업공덕을 쌓는다는 말과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삶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목적없이 살면 축생과 다를 바 없다. 불교인이라면 당연히 해탈과 열반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그 과정에서 꾸살라행을 해야 한다. 덕을 쌓는 것과 같다. 곤이 붕이 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래 살아야 한다.

 

내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오래살면 살수록 선업공덕을 쌓을 기회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없는 사람들은 오래살수록 악업만 늘어나기 쉽다.

 

장로는 보시하는 사람에게 축원을 해 준다. 법구경에서는 아유 완노 수캉 발랑 (āyu vaṇṇo sukha bala)”이라고 한다. 이는 “장수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건강하기를!(Dhp.109)이라는 뜻이다. 이를 이른바 사대축원이라고 볼 수 있다.

 

사대축원에서 장수는 어떤 의미일까? 단지 즐기기 위해 오래 살라는 것일까? 아니다. 공덕지으라고 오래 살라고 하는 것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공덕 지을 기회는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다. 다들 오래오래 살아서 많은 공덕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덕을 많이 쌓아야 한다. 내가 오래 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2021-08-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