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담배피는 노인에게 혐오가 일어났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16. 09:09

담배피는 노인에게 혐오가 일어났는데

 

 

오늘은 대체휴일이다. 어제 일요일은 광복절이었다. 국경일이 일요일에 있으면 그 다음날 월요일 하루 쉬는 법이 통과된 모양이다. 업체 담당자와 통화하다가 알았다. 고객사로 택배 붙여야 하는데 대체공휴일 때문에 하루 더 걸린다는 것이었다.

 

자영업자에게 대체공휴일은 의미 없다. 국경일 등 쉬는 날도 의미가 없다. 일인사업자에게는 월, , , , , , 금만 있을 뿐이다.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아지트에 나가는 것이다.

 

오늘 아침 일찍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지트로 출발했다. 집이라는 곳은 잠자는 곳이고 잠시 머무는 곳이어야 한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자세가 나오기 때문에 게을러질 수밖에 없다.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아파트에서 탈출해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사람을 보았다. 늘 보는 사람이다. 나이가 70은 넘은 것 같다. 풍채 좋은 노인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경비실 옆 흡연장소이다.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가 든 노인들이다. 갑자기 혐오가 일어났다.

 

왜 그 노인을 보면 혐오가 일어날까? 나의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노인은 잘못이 없다. 담배 피우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서 엘리베이터를 들락날락 하기 때문이다.

 

고층아파트에 살고 있다. 스물세평 작은 아파트임에도 25층에 달한다. 엘리베이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무려 50가구가 살고 있다. 한가구당 3-4명 산다면 150명에서 200명 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알지 못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늘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담배피는 노인들을 말한다. 네 명가량 된다.

 

오늘 아침 일터로 향하면서 혐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왜 혐오를 하는 것일까? 담배 피울 수도 있지 않은가? 술 마실 수 있듯이 담배피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흡연하는 것에 대하여 백안시한다면 속이 좁은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인상이라는 것은 무섭다. 하나의 상이 형성되면 좀처럼 타파되기 힘들다. 부정적인 상이 형성되었을 때 그 사람 모습만 보아도 혐오가 일어나고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혐오라는 오염원을 부술 수 있을까?

 

혐오와 관련하여 초기경전 한 구절이 생각났다.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 두 번째 군대는 혐오라 불리고”(Stn.436)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혐오는 빠알리어 아라띠(arati)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는

'dislike, discontent’의 뜻이고, 한자어로는 不快(불쾌)’의 뜻이다.

 

아라띠가 쓰인 경이 또 있다. 부처님의 성도과정에서 부처님을 유혹하려는 마라(惡魔)의 딸을 말한다. 숫따니빠따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땅하와 아라띠와 라가를 보고 성적 교섭에 대한 욕망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Stn.835)라고 했다. 여기서 땅하는 갈애를 말하고, 아라띠는 혐오를, 그리고 라가는 탐욕을 말한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한 것은 갈애, 혐오, 라가라는 불선법이다. 이는 다름 아닌 악마를 말한다.

 

아라띠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보면 이 단어가 사용된 경을 알려 준다. 그 중의 하나가 숫따니빠따 바셋타의 경쾌락과 불쾌를 버리고, 청량하여 집착없이 온 세상을 이겨낸 영웅,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릅니다.”(Stn.642)라는 게송이다. 혐오를 뜻하는 아라띠가 이번에는 불쾌의 뜻으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혐오를 이겨낸 자는 악마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이다. 이는 악마의 군대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욕망, 혐오, 기갈, 갈애, 권태와 수면, 공포, 위선과 고집이라는 악마의 군대를 말한다. 악마의 군대를 승리한 자에 대하여 영웅이라고 했다.

 

영웅을 빠알리어로 비라(vīra)라고 한다. 비라라는 말은 자이나교도 창시자 마하비라(mahāvīra: great hero)’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경을 보면 부처님을 비라라고 했다.

 

후대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영웅이라고 했다. 악마와 싸움에서 이긴 영웅을 말한다. 욕망, 혐오 등 오염원과 싸워서 이긴 부처님을 영웅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 대웅전(大雄殿)은 악마의 군대와 싸운 위대한 영웅을 기리는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영웅은 부처님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염원이라는 악마의 군대와 싸워 이긴 자는 모두영웅이 된다. 여자도 영웅이 될 수 있다. 테리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 ‘비라는 영웅적 가르침으로

수행녀로서 정신능력을 닦았다.

악마와 그의 탈것을 쳐부수고

그대는 최후의 몸을 얻어야 하리라.”(Thig.7)

 

 

비라 장로니가 읊은 게송이다. 비라라는 이름 그대로 장로니는 영웅이다. 비라는 ‘hero’의 뜻으로 영웅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웅적 가르침으로 영웅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오염원을 쳐부순 영웅이다.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에서는 마라의 군대(mārasenā)를 쳐부순 용감한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의 오염을 소멸시킨 자들은 모두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악마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니까야에서 묘사된 악마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부처님과는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다.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악마는 일반적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유혹하는 입장에 있다. 그런 한편 엄격한 고행을 주장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극단적 쾌락과 극단적 고행을 모두 버렸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의 극단을 섬기지 않는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S56.1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고 실천방법으로서 팔정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극단적 쾌락도 악마이고 극단적 고행도 악마가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악마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악마는 번뇌도 악마이고, 업형성력도 악마가 된다. 또한 해탈과 열반을 방해하는 것은 모두 악마가 된다. 그래서 악마는 항상 부처님의 반대 편에 서 있다.

 

초기불교에서 악마가 등장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대조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이 무탐, 무진, 무치의 가르침을 말했을 때 이와 반대되는 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다. , , 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악마의 군대가 된다.

 

악마의 군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군대는 욕망의 군대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첫번째 군대는 욕망의 군대이다. 그런데 욕망의 군대는 반드시 마음의 오염원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욕망을 부추기는 자도 악마이기 때문이다.

 

욕계천상 중에 타화자재천이 있다. 욕계천상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높은 위치라는 것은 수명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천상은 수명이 길면 높은 위치에 있다. 타화자재천(paranimmitavasavatti)은 욕망이 극대화된 천상이다.

 

타화자재천은 남이 만든 것을 지배하는 신들의 하늘나라이다. 또한 감각적 욕망계의 최고천이기도 하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편에 서 있는 천상이기도 하다. 특히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있어서 그렇다.

 

타화자재천의 존재는 수행자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방해한다. 마라가 자신의 세 딸 땅하, 아라띠, 라가를 시켜서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하려는 것과 같다. 또한 악마는 여러 모습으로 변신하여 젊은 수행자를 유혹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S4.21)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 악마의 의미는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오염원을 악마라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온을 악마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오온이 왜 악마일까? 이는 부처님이 물질도 느낌도 지각도, 형성과 또한 의식도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니 이렇게 거기서 탐착을 벗어나네”(S4.16)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어지는 게송에서 이렇게 탐착에서 벗어나 안온하게 모든 얽매임을 뛰어넘은 자는 어떠한 곳에서 찾더라도 악마의 군대가 발견할 수 없네.”(S4.16)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오온을 내것이라고 여기면 악마의 손아귀에 있음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악마의 개념은 타종교와 다르다. 악마는 늘 부처님과 반대편에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악마는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 이렇게 다섯 가지 종류의 악마로 정리된다.

 

오늘 아침 나에게서 혐오가 일어났다. 노인에 대한 혐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면서 담배나 피우는 것에 대한 혐오를 말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해 본 것도 아니다. 나의 생각일 뿐이다. 마음 속의 혐오가 온갖 상상력을 만들어 낸다.

 

어떻게 해야 마음속의 혐오를 없앨 수 있을까? 그것은 혐오가 악마의 군대임을 아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악마의 군대에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에 대한 혐오가 일어나는 한 나는 악마의 낚싯바늘에 물려 있는 것이다.

 

 

2021-08-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