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섭법의 동사(同事)가 왜 동등한 배려의 뜻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3. 09:56

사섭법의 동사(同事)가 왜 동등한 배려의 뜻일까?

 

 

몸도 마음도 편안한 차분한 새벽이다. 충분히 자고 난 새벽에 무엇을 해야 할까? 가능하면 눈과 귀를 차단하면 좋다. 명상하는 것처럼 마음의 문만 열어 놓아야 한다.

아침 6시가 되기 전까지는 내 시간이다. 물론 이후도 내 시간이지만 6시 이전은 특별하다. 가만 눈 감고 지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떠 오른다. 모두 글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다.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있다.

경전을 열어 보면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다. 메모할 수 있으나 사진을 찍어 둔다. 이럴 때 스마트폰은 매우 유용하다. 어느 것이든지 찍고 보는 것이다.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부처님 제자에 대한 것이다.

80명의 으뜸제자가 있는데


부처님 제자라고 하면 십대제자가 잘 알려져 있다. 지혜제일의 사리불 등과 같이 이름 앞에 수식어가 붙는다. 그런데 부처님 제자 중에는 출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 제자 중에는 남자재가제자도 있고 여자재가제자도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제일의 품’(A1.196-275)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 제자 중에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모두 80명의 제자가 있다. 수행승(비구)47명이고, 수행녀(비구니)14명이고, 우바새(청신사)9명이고, 우바이(청신녀)10명이다. 출가자는 63명으로 78%를 차지한다. 비구는 47명으로 58%에 달한다. 재가의 제자를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한사람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 제자는 모두 특출 난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이름 앞에 제일또는 으뜸의 뜻을 지닌 악가(agga)’가 붙는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80대 제자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출재가의 차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가르침을 실천하면 사향사과와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 다만 출가하는 것이 재가에 있는 것보다 유리하다. 번잡한 재가의 삶과 오로지 수행만 하는 출가의 삶은 다르기 때문이다. 가르침 앞에서는 모두 출가와 재가가 동등하고, 가르침 앞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것이다.

 

부처님의 80명의 으뜸 제자 중에서도 으뜸은 누구일까? 부처님은 모두 8명을 들었다. 출가자는 4명이고, 재가자도 4명이다. 성별로도 남자가 4명이고, 여자도 4명이다.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누구를 닮아야 할까?


상윳따니까야에 아들의 경이 있다. 부처님은 재가신도에게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장자 찟따와 핫타까 알라바까처럼 되어야 한다.”(S17.23)


장자 찟따는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이다. 이를 재가의 설법제일이라 할 수 있다. 출가에서는 뿐나 만따니뿟따를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 (dhammakathikāna agga’)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알라바까는 네 가지 섭수의 기초로 대중을 돕는 님 가운데 제일이다. 이를 사섭법 실천의 제일이라고 할 수 있다. 출가에서 사섭법제일은 보이지 않는다.

 

외동아들이 출가하면 으뜸출가자 중에서 본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사랑하는 아들아, 만약 네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면 그 때는 사랑하는 아들아, 싸리뿟따와 목갈라나처럼 되어야 한다.”(S17.23)라고 했다.

 

사리뿟따는 위대한 지혜를 지닌 님 가운데 제일(mahāpaññāna agga)’이다. 일반적으로 지혜제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고, 목갈라나는 신통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iddhimantāna agga)’로서 신통제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두 제자는 부처님 으뜸제자중의 으뜸제자이다. 두 제자는 부처님의 왼팔과 오른팔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에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이었던 그 세존들께서도 한 쌍의 최상의 제자가 있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싸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있는 것과 같다.”(S47.14)라고 했다.

 

재가신도에게 외동딸이 있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이에 대하여 재가로 산다면 사랑하는 딸아, 너는 재가의 여자 신자 쿳줏따라와 난다의 어머니 벨루깐다끼야처럼 되어야 한다.”(S17.24)라고 말했다.

 

재가의 으뜸 청신녀 중에서 으뜸은 쿳줏따라와 벨루깐다끼야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나의 재가 여제자 가운데 표준이며 척도이다.”(S17.24)라고 했다. 부처님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말한 것일까?

 

쿳줏따라는 많이 배운 님 가운데 제일(bahussutāna agga)’이다. 시녀출신이지만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오백명의 궁녀에게 법문을 했다. 아난다와 같은 다문제일이다. 벨루깐다끼야는 선정을 닦는 님 가운데 제일 (jhāyīna agga)’이다. 외아들 난다가 오랑캐의 왕에게 사로잡혀 그녀 앞에서 참수될 때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선정에 자유자재로 들었기 때문에 선정제일이다.

 

재가의 외동딸이 출가한다면 누구를 닮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사랑하는 딸아, 만약 네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면 그 때는 사랑하는 딸아, 수행녀 케마와 우빨라반나처럼 되어야 한다.”(S17.23)라고 했다.

 

케마는 위대한 지혜를 지닌 님 가운데 제일이다. 사리뿟따와 같은 지혜제일을 말한다. 우빨라반나는 신통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이다. 목갈라나와 같은 신통제일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케마와 우빨라반나는 비구니 제자 중에서 한 쌍의 최상의 제자이다. 마치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와 같은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섭법의 동사(同事)가 왜 동등한 배려의 뜻일까?

 

외동아들과 외동딸은 귀하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재가의 삶을 살면 찟따와 알라바까, 쿳줏따라, 벨루깐다끼야처럼 되라고 했다. 출가의 삶을 살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케마, 우빨라반나처럼 되라고 했다. 남자라면 한쌍의 최상의 재가제자중에서 누구를 들어야 할까? 나의 경우에는 알라바까를 들고 싶다.

 

왜 알라바까인가? 사섭법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제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섭법은 재가자에게 있어서 최상의 실천수행방법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핫타까 알라바까와 섭수의 경’(A8.24)을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사섭법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섭수의 기초가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보시하는 것, 사랑스럽게 말하는 것, 유익한 행위를 하는 것, 동등한 배려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섭수의 기초가 있다.(A4.32)

 

 

여기서 섭수라는 말은 빠알리어 산가하(sagaha)를 번역한 말이다. 산가하는 ‘1. treatment; 2. Compilation’의 뜻으로 대우 또는 대접의 의미가 있다. 이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하라고 했다.

 

사섭법에서 동사(同事)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한자뜻풀이 하여 함께 함또는 고락을 함께 함의 뜻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왜 그런가? 동사를 뜻하는 빠알리어 사마낫따(samanatta)‘identity; equality’의 뜻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등의 의미가 강하다.

 

사마낫따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는 동등한 배려로 번역해 놓았다. 반면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함께 함[同事]’라고 번역해 놓았다. 이런 번역은 한역경전에서 한자 뜻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사를 뜻하는 사마낫따가 왜 동등한 배려일까?

 

빠알리 사전 PCED194에 따르면 사마낫따에 대하여 ‘equanimous, of even mind’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에 대하여 ‘A.IV,364’를 참고하라고 했다. 찾아보니 사마낫따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동등한 배려 가운데 최상의 것은 흐름에 든 님의 입장에서 흐름에 든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고, 한번 돌아오는 님의 입장에서 한번 돌아오는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고, 돌아오지 않는 님의 입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고, 거룩한 님의 입장에서 거룩한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는 것이다.”(A9.5)

 

 

사마낫따는 동등하게 배려하는 것이다. 수다원에게는 수다원의 입장에서 배려하는 것이고, 사다함에게는 사다함의 입장에서 배려하는 것이다. 설령 그가 깨달은 자라고 할지라도 깨닫지 못한 자가 있다면 깨닫지 못한 자의 입장이 되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 눈높이가 되라는 말과 같다. 서서 내려다보지 말고 키를 낮추어 아이의 눈높이로 보라는 말과 같다. 이것이 동등한 배려이다.

 

동등한 배려를 뜻하는 사마낫따는 사섭법을 이루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동사라 하여 함께 함또는 고락을 함께 함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사마낫따의 의미가 ‘equality’ 또는 ‘equanimous, of even mind’인 것을 간과한 것이다. 한문 동사(同事)를 우리말로 풀어 쓰다 보니 잘못 사용한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리더가 되고자 한다면

 

부처님의 으뜸 재가남자제자중에서 핫타까 알라바까는 의뜸 중의 으뜸이다. 이는 부처님이 알라바까에게 오백명의 재가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서 핫타까여, 그대를 따르는 이 대중은 실로 엄청납니다. 핫타까여, 어떻게 그대는 이 대중을 섭수합니까?”라고 물어 본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핫타까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대중을 세존께서 가르쳐주신 네 가지 섭수의 토대로 이 대중을 섭수합니다. 저는 이 사람은 보시를 베풀어 섭수해야 한다.’고 알면 그 사람을 보시를 베풀어 섭수합니다.”(A8.24)

 

 

알라바까는 부처님에게서 배운 사섭법을 대중들에게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시로서 베푸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스런 말로, 도움을 주는 행위로, 동동한 배려로 대우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과거세나 미래세나 대중을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대중에게 보시를 베풀고, 사랑스럽게 말하고, 도움을 주고, 동등한 배려를 하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리더가 되고자 한다면 사섭법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리더거 되려면 덕이 있어야 한다. 어떤 덕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알라바까를 예로 들었다. 알라바까는 1)믿음이 있고, 2)계행을 지키고, 3)부끄러움을 알고, 4)창피함을 알고, 5)많이 배우고, 6)관대하고, 7)지혜를 갖추고, 무엇보다 8)겸손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덕목을 갖춘 자가 사섭법을 실천한다면 리더가 되지 못할 자 없을 것이다.

 

사섭법제일이 되어야

 

새벽에 스마트폰을 쳤는데 아침 6시가 되자 중단했다. 감자를 두 개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먹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서 쓰기를 계속했다. 스마트폰 자판을 엄지로 치는 것과 컴퓨터 자판을 두 손가락으로 때리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사무실에는 경전도 펼쳐 볼 수 있어서 글을 쓰는데 있어서 속도가 난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 오전 10시가 되었다. 이제 마무리해야 될 때이다.

 

오늘 글은 부처님의 재가제자 중의 핫타까 알라바까에 대하여 써 보았다. 부처님 재가의 으뜸제자 중에서도 으뜸제이다. 재가불자라면 본받아아야 할 제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재가의 신도에게 외동아들이 있다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장자 찟따와 핫타까 알라바까처럼 되어야 한다.”(S17.23)라고 했다.

 

재가의 으뜸중의 으뜸제자 알라바까를 닮고자 한다. 여덟 가지 덕목으로 사섭법을 실천하고자 한다. 특히 사섭법중에서 네 번째 항 사마낫따(samanatta)에 대하여 한국불교에서는 동사(同事)라고 하는데, 이를 함께 함[同事]’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동사를 뜻하는 빠알리 사마낫따는 본래 ‘equanimous, of even mind’의 뜻이다. 그래서 동등한 배려가 맞다. 누구에게든지 동등한 배려로 대하면 성공하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핫타까 알라바까의 여덟 가지 덕목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강조되었던 덕목 중의 하나가 겸손이다. 누구에게든지 눈높이로 대하는 것이 동등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항상 알라바까의 여덟 가지 덕목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시민이라면 누구나 1)믿음이 있고, 2)계행을 지키고, 3)부끄러움을 알고, 4)창피함을 알고, 5)많이 배우고, 6)관대하고, 7)지혜를 갖추고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보시하고, 사랑스런 말을 하고, 도움을 주고, 동등한 배려를 해야 한다. 사섭법제일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불교인의 덕행아닐까?

 

 

2021-09-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