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존재는 왜 오고 가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10. 16:09

존재는 왜 오고 가는가?

 

 

이 세상에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먹고 살지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먹는 것은 사는 것이 된다.

 

요즘 유튜브에서 새에 대한 것을 보고 있다. 부화해서 비상하기까지 과정에 대한 것이다. 놀랍게도 2주 안에 모두 끝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눈도 못 뜨는 시뻘건 것이 2주 후가 되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새 다큐에서 텅 빈 둥지를 보면 무상을 느낀다. 분명히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생명이 꾸물거렸는데 때가 되었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마치 일장춘몽처럼 여겨진다. 사람도 그런 것 아닐까?

 

새끼새의 성장속도는 경이롭다. 하루가 다르게 그야말로 폭풍성장 한다. 이는 아기가 태어났을 때 백일도 되지 않아 몸무게 두 배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없다. 무엇이 새끼로 하여금 폭풍성장하게 만드는 것일까?

 

어미새는 부지런히 먹이를 나른다. 주로 벌레가 많다. 애벌레의 경우 영양의 보고나 다름없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둥지를 들락날락 하며 먹이를 물어 다 준다. 이때 새끼새는 입이 찢어져라 크게 벌린다. 먹고 나서 또 크게 벌린다. 새끼들은 서로 입 벌리기 경쟁을 하는 것 같다.

 

먹어야 산다. 새끼새도 먹어야 폭풍성장을 한다. 하루 하루가 지남에 따라 날개가 자라고 몸집은 커져 간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2주만에 이루어진다.

 

새 다큐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생명이다. 이는 없던 것에서 생명이 출현하는 것이다. 시발점은 알을 낳는 것에서 시작된다. 더 근원적인 것은 수컷과 암컷이 짝짓기 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짝짓기에서 시작된다. 짝짓기가 없으면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는 난생과 태생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짝짓기야 말로 생명의 탄생을 위한 위대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짝짓기 하면 생명이 탄생된다. 없던 것에서 있는 것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 다음 부터는 먹어야 한다. 먹어야 폭풍성장을 한다. 먹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생명 기능이 끊어지고 말 것이다.

 

생명 기능이 끊어진 존재는 하나의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도 생명 기능이 끊어지면 나무토막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벗이여, 세 가지 즉,

생명력과 체열과 의식이 이 몸을 떠나면, 여기 이 몸은 무정한 통나무처럼 버려지고 던져져 누워 있게 됩니다.(M43)라고 했다.

 

요즘 종종 빈집을 본다. 농촌에는 가면 갈수록 빈집이 늘어난다. 고향에 있는 종가집도 빈집이다. 일년에 한번 활용하는 빈집이다. 매년 6월경에 제사 지낼 때 고향집을 찾는다.

 

 

고향집은 해방후에 지어졌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불타 버릴 뻔했었는데 용케 살아 남은 집이기도 하다. 그런 고향집은 유년기 추억이 있는 집이다.

 

고향집을 보면 마치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당시 유년기 시절에는 사람들로 북적이었으나 지금은 고요하다. 마치 폭풍성장한 새끼새들이 둥지를 모두 떠나 버린 것 같은 고요를 말한다.

 

존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없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진다. 장소는 그대로인데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던 것이 된다. 대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간 것일까?

 

사람이 죽으면 슬퍼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더욱 슬퍼할 것이다. 아들이 죽었다면 더욱 더 슬퍼할 것이다. 그런 아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 것일까? 이에 대하여 테리가타에서는 오는 것처럼 갔으니 거기에 어떤 슬픔이 있겠는가?”(Thig.130)라고 했다.

 

어떤 존재이든지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짝짓기를 하여 태어난 새끼새는 어미가 부지런히 날라 준 먹이를 먹고 폭풍성장을 하지만 2주 후에는 떠난다. 이후 삶은 알 수 없다. 어느 풀숲에서 딱딱하게 굳은 물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존재이든지 오는 것처럼 간다. 오는 것은 죽어야 오는 것이다. 죽어서 인간이나 축생 등으로 계속해서 태어나는 것을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는 것은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남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슬퍼할 것이 없다. 본래 오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고 가는 것의 이치를 아는 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아들이 죽었다고 슬퍼하는 자는 오고 감의 이치를 모르는 자이다. 그래서 뭇삶의 운명이 그러할 뿐이다.”(Thig.128)라는 사실을 안다면 슬퍼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 있는 존재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존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나의 것이라는 애착이 있다. 아들이 죽으면 내 아들아 어디 갔느냐?”라며 슬피 운다.

 

아들은 내가 청해서 온 것이 아니다. 아들은 아무도 청하지도 않았는데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왔고, 또한 아들은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고 그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간다.”(Thig.129)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년시절 고향집 처마에 제비의 성장과정을 보았다. 어느 날 제비가 날라와 부지런히 집을 짓고 있었다. 논에 있는 흙과 짚을 엮어서 처마에 지은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제비새끼가 태어났다. 너댓마리 제비새끼가 입을 찢어지게 벌이고 있는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없던 것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이 세상 살면서 가장 신비로운 현상은 생명이다. 어떻게 없던 것에서 있는 것으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도 어떻게 폭풍성장 하는 것일까? 물체는 항상 그 자리에 있고 또한 항상 그 모습 그대로인데 반하여 생명 있는 것들은 갑자기 출현하여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생명은 본래 없던 것이다. 없던 것이 갑자기 출현했을 때 경이롭다. 어떻게 무()에서 유()가 될 수 있을까? 바위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에 반하여 생명 있는 것들 것 변화무쌍하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죽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그는 윤회하며 갈 것이리라. 오는 것처럼 갔으니 거기에 어떠한 슬픔이 있겠는가?”(Thig.130)라고 했다.

 

생명이 없던 것에서 출현한다면 이는 저 세상에서 죽어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생명이 어느 날 나무토막처럼 생명력과 체열과 의식이 끊어진다면 이 세상에서 죽어서 저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에 대하여 오고 가는 것의 이치를 아는 것이라고 한다.

 

오고 감의 이치를 안다면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오는 자에게도 가는 자에게도 모두가 낯설게 만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아들이 죽었다고 하여 내아들아, 어디 갔느냐?”며 슬피 운다면 어리석다는 것이다. 오고 가는 자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말한다. 마치 낯선 자에게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존재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와서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가 버린다.

 

 

2021-09-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