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얽힌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27. 07:39

얽힌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내가 보는 것은 정확한 것일까? 내가 듣는 것은 어떠할까? 최근 페이스북에서 어떤 이가 올린 글을 보았다. 장문의 글 중에서 "시각과 청각은 사람을 속인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에 시각과 청각은 믿을 게 못됩니다.”라며 답글을 남겼다.

테라가타를 보다가 놀랍게도 내가 언급했던 문구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귀로 모든 것을 듣고 눈으로 모든 것을 본다. 슬기로운 자라면 본 것, 들은 것,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Thag.500)라는 게송이 있었기 때문이다. 테라가타에서 마하 깟짜야나 장로는 시각과 청각을 믿지 말라고 했다.

 

테라가타에서 보았던 것이 잠재되어 있다가 튀어 나온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니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라는 말에서 영향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스를 볼 때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본다. 인터넷 뉴스를 볼 때 특히 그렇다. 제목을 보면 모두 눈길을 끌지만 다 읽어 볼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끌리는 것이 있다. 나와 관련 있는 것이기 쉽다. 제목이 자극적이어서 끌리기도 한다. 이른바 낚시성 제목에 걸리는 것이다.

음악을 들을 때 골라 듣는다.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을 스마트폰에 저장해서 듣지만 그날 특별히 끌리는 것이 있다. 그날 기분과 감정에 따라 달리 선택하는 것이다. 유튜브도 그렇다. 유튜브가 영상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듣는 것 위주가 될 때도 있다. 법문이 그렇다. 법문도 골라 듣는 것이다.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어떻게 될까? 편향된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를 왜곡된 시각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선입견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경험에 입각한 편견을 말한다.

나에게 잘 해 준 사람에게는 긍정적이다. 나를 불편하게 한 자에게는 부정적 감정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잠재의식에 저장되어 있어서 감각기관과 접촉했을 때 호불호와 쾌불쾌로 발현된다. 시각과 청각을 믿을 수 없는 이유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Ud.6)

우다나 바히야의 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외도 유행자 바히야가 부처님의 탁발행렬을 가로막고 한마디만 가르쳐 달라고 하자 부처님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
볼때는 보여질 뿐(di
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이라고 했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형상을 볼 때 어떻게 보아야할 지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잘 볼 수 있을까?

눈은 사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시야에 모두 다 들어오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한 대상에 시선이 머문다. 과거 경험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때 시각접촉이 발생된다. 이를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M18.17)라고 말한다. 삼사화합촉이다.

삼사가 화합되어서 접촉이 발생되면 그 다음 단계는 느낌이다. 어떤 느낌인가? 대개 호불호와 쾌불쾌이기 쉽다. 물론 중립적인 느낌도 있다.

호불호와 쾌불쾌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과거 경험과 관련이 있다. 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했다면 불쾌가 일어날 것이다. 그사람에 대해 신세진 적이 있다면 호의적인 감정이 발생할 것이다. 이를 편견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제대로 볼 수 없다. 뉴스를 보고 싶은 것만 보면 편향된 시각을 갖는 것과 같다. 보수와 진보로 갈리는 것도 편향된 시각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보고싶은 것만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욕망에 지배받았기 때문이다. 보기 싫은 것을 보지 않는 것은 성냄에 따른 것이다. 이는 편향된 시각이다. 왜곡된 시각이기도 하다.

과거 경험에 따른 욕망과 성냄에 지배되었을 때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볼 때는 보여 질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라고 했다. 여기서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럴 때는 주석을 보아야 한다. 주석에서는 "그대에게 탐욕 등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는 그곳에 있지 않다.”(UdA.90-94, Srp.II.383-387)"라고 설명되어 있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본다고 하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는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어떤 본질인가?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함을 말한다. 호불호와 쾌불쾌가 발생했을 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된다.

결국 사띠에 대한 것이다. 탐욕과 성냄에 오염된 지각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왜곡이 일어난다.

느낌과 지각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자아와 동일시했을 때 호불호와 쾌불쾌가 발생된다. 그래서 한번 싫으면 "죽어도"싫어한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좋아 한다. 이는 양극단이다.

부처님은 중도를 설하셨다. 양극단을 떠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중도를 실현할 것인가? 알아차리는 것 외 달리 방법이 없다.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났을 때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라면 "나에게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싫어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이름만 보아도 불쾌하다. 이런 불쾌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따져 보니 그 사람에게 모욕당한 것이 있다. 앙금이 남아 있어서 그 사람 얼굴만 보아도 불쾌하고,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싫은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알아차림하면 된다. 그러나 싫어 하는 마음이 더 강하면 속수무책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사과하지 않는 한 용서가 되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이런 감정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싱대방을 미워하면 나만 손해난다. 나의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해서 이득 되는 것은 없다. 싫어 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불선법만 증장되고 불선업을 짓는다면 나만 손해난다. 손해 나는 장사는 하지 않아야 한다. 빨리 떨칠수록 남는 장사가 된다.

사띠로도 안된다면 이번에는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한다. 그 사람 업으로 보는 것이다. 업이 그 사람의 주인이고, 업은 그 사람의 상속자로 보는 것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면 연민의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볼 때는 볼 때 뿐이어야 한다. 볼 때 그 어떤 것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욕망과 성냄과 같은 불선법을 말한다. 만일 지각이 불선법에 오염되었다면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마치 거울에 때가 묻은 것과 같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
혼란된 새김으로 형상을 보면
매혹적인 인상에 마음이 쏠려
오염된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것을 탐착하고 마네.
그래서 형상에서 생겨난
갖가지 느낌들이 안에서 자라나
마음이 혼란하게 되어
탐욕과 분노도 더불어 자라나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운다면
그에게 열반은 멀다고 하리.”(S35.95)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괴로움도 없고 윤회도 없는 불사를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탐, , 치를 소멸해야 한다. 볼 때 탐, , 치가 개입되면 제대로 볼 수 없다. 괴로움과 함께 세세생생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

제대로 보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모두 색안경을 보는 것 같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그럴 것이다. 한번 아니면 아닌 것이다. 한번 싫으면 죽어도 싫은 것이다. 그래서 한번 싫으면 상종하지 않는다. 정말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일까?

그 사람 한면만 보면 나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다. 그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면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한면만 보고 판단하려 한다면 경솔한 것이다.

아떻게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그사람에 대한 선입견 없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가 나의 느낌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 차려야 한다.

느낌은 조건발생한 것으로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느낌을 자신의 것이라고 꽉 움켜 쥐고 있으면 집착이 된다. 집착은 불선업이기 때문에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나만 손해 보는 것이다.

손해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그 사람에 대하여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나만 손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도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알아차림도 안되고 업이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도 안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참으로 풀어야 할 난제이다.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 죽을 때까지 안고 갈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털어 내야 한다. 먼저 만나보아야 할 것이다.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풀어지지 않을까?

용기 있는 자만이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있다. 어떻게 푸는가? 이는사람이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가 엉킨 것을 잘라내듯, 수행승은 계행 위에 서서 집중의 돌로 잘 갈아진 통찰적 지혜라는 칼을 잡고, 정진의 힘에 의해 발휘된 실천적 지혜의 손으로, 갈애의 얽힘을 자르고 부수어버린다.”(Srp.I.50)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매듭은 푸는 것이 아니다. 지혜의 검으로 베어 버리는 것이다. 지혜의 검사(劍士)가 되어서 번뇌를 단칼에 베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2021-09-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