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3. 11:16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요즘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디가니까야를 구입한지 오래 되었다. 2012년 구입했으니 9년 되었다. 그동안 드문드문 읽었다. 필요한 부분만 본 것이다. 그럼에도 흔적은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 온통 노랑형광메모리펜 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읽듯이 읽어 보지는 못했다.

 

경전을 소설 읽듯이 읽을 수 없다. 한번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새겨야 한다. 어느 곳을 펼쳐도 문제가 없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어느 곳을 펼쳐도 똑같다. 이런 이유로 경전을 소설 읽듯이 읽지 않는다.

 

디가니까야는 긴길이의 경전이다. 이는 책제목에서 나타나 있다. 디가(dīgha)라는 말자체가 ‘long’의 뜻이어서 디가니까야는 긴길이의 경을 모아 놓은 경전이라는 뜻이 된다.

 

니까야마다 성격이 있다. 흔히 사부니까야라고 한다. 상윳따니까야는 가르침을 56개 주제로 나누어 분류해 놓은 것이다. 맛지마니까야는 핵심교리에 대한 심오한 내용이 특징이다. 앙굿따라니까야는 11개 법수별로 되어 있는데 재가자들이 읽기에 적합한 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럼 디가니나까야는 어떨까?

 

디가니까야는 긴길이의 경전이다. 마치 단편소설을 읽는 것 같다. 그래서 디가니까야에 대하여 신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웅대한 소설적 구성의 경전이라고 말한다.

 

최근 디가니까야에서 감명 깊게 읽은 것이 있다. 그것은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것이다. 마치 바이블의 창세기와도 같다. 그렇다면 불교의 세계의 기원은 어떤 것일까?

 

연기법으로 논파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방대한 초기경전에서 창세기와 비슷한 세계의 기원에 대한 가르침은 많지 않다. 긴길이의 경을 특징으로 하는 디가니까야에서만 보인다. 이는 아마도 읽는 이로 하여금 신심을 고취하게 해 줄 목적이 있는 것 같다.

 

부처님 당시 사상계는 기존의 브라만교와 육사외도의 사상이 혼재하고 있었다. 브라만교가 영원주의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육사외도의 사상은 반브라만적인 것이어서 허무주의적 경향이 있었다.

 

부처님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했다. 어떻게 논파했는가? 연기법으로 부순 것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도 단 몇 줄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의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는 구절로 허무주의를 부수었고, 또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의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는 구절로 영원주의를 부수었다. 이는 연기법 공식을 적용하면 알 수 있다.

 

연기송이 있다. 연기법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연기송으로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를 깰 수 있다. 그래서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발생적 연기로 허무주의가 거짓임을 증명했고, 또한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환멸적 연기로 영원주의가 거짓임을 증명한 것이다.

 

바이블 창세기가 연상되는 세계의 기원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보면 오늘날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유일신교와 유사한 내용이 있다. 일부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어느 정도일까? 대표적으로 하느님을 창조주라 하고 또한 창조주를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이 그렇다.

 

 

부처님은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등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마치 독화살을 맞고 있는 듯한 현실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사성제를 설했다. 그러나 제자 중에는 우주론이나 세계의 기원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자들이 종종 있었던 것 같다. 그 중의 한사람이 쑤낙깟따였다.

 

쑤낙깟따는 부처님에게서 떠나고자 했다. 신통을 보여주지 않아서 못 믿겠다는 것이다. 또한 궁금한 세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 빠띠까의 경’(D24)은 이와 같은 쑤낙깟따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한 경이라고 볼 수 있다. 무려 32페이지에 달하는 마치 웅대한 소설을 읽는 듯한 경이다.

 

빠띠까의 경에서 마치 창세기와 같은 세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불과 세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내용이다. 그럼에도 매우 심오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경을 읽으면 마치 바이블의 창세기 장면이 연상된다.

 

불교경전에도 바이블 창세기와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은 놀랍다. 대승경전에서도 접해 보지 못했고, 상윳따나 맛지마, 앙굿따라에서도 보지 못했다. 오로지 디가에서만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디가니까야 송출은 신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결집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경은 긴길이로 웅대한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는 디가니까야가 1,500페이지가 넘지만 경은 고작 33개 밖에 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개의 경에 평균 45페이지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설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세계의 기원도 알 뿐만 아니라 그 이상도 안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창세기 이전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이 전생을 볼 줄 아는 숙명통을 가진 것 등을 비롯한 일체지자이기 때문이다.

 

망상적 하느님이 있는데

 

상윳따니까야를 보면 망상적 하느님이 있다. 여기서 브라흐마를 하느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번역 방식이다. 이에 반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역 아함경에서와 같이 범천(梵天)’으로 번역했다.

 

망상적 하느님은 바까브라흐마를 말한다. 그는 자신이 창조주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살다 보니 자신의 전생을 잊어버린 것이다.

 

바까하느님은 복과 수명이 다하여 아래 세상에 화생했다. 그는 인간으로 있을 때선정수행을 하여 수명이 500겁인 색계 4선천에 태어났다. 그 다음에는 수명이 60겁인 색계 3선천에 태어났고, 또 그 다음에는 수명이 8겁인 색계 2선천에 태어났다. 현재 그는 수명이 고작 1겁밖에 되지 않는 색계 초선천 즉 범천에 태어난 것이다. 계속 강등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바까는 색계 초선천에서 고작 1겁 밖에 살지 못했음에도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해서인지 자신의 전생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에게 이것만이 항상하고, 이것만이 견고하고, 이것만이 영원하고, 이것만이 완전하고, 이것만이 불변의 진리이다.”(S6.4)라고 생각했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영원주의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유일신교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바까하느님을 깨쳐 주고자 했다. 부처님은 바까하느님에게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전생을 알려 주었다. 전생에 쌓은 지계공덕, 보시공덕, 수행공덕으로 색계천상에 태어나 하느님이 된 것이다.

 

하느님도 윤회하는 중생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를 비판했다. 브라만교는 오늘날 한국에서 보는 유일신교와 매우 유사한 것이다. 이는 범천 즉 하느님의 세계라 불리우는 색계 초선천에서 나중에 화생한 자가 먼저 화생한 자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벗들이여, 거기에 먼저 태어난 한 뭇삶이 있는데, 그는 이와 같이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게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예전에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바랬는데, 그러한 내 마음의 서원 때문에 이 뭇삶들이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D24.29)

 

 

불교에서 세계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다. 이는 한국의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바이블에서는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했으나 초기경전에서는 업력(業力)에 따른 것이다.

 

불교에서 우주관은 우주가 성겁기가 되었을 때 아래 세상이 생겨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복과 수명이 다한 존재가 아래 세상에 떨어질 때 형성되는 것이다. 바까브라흐마가 색계 4선천에서 계속 강등되어 색계 초선천에 이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에서 세상은 색계 초선천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세상은 어떻게 발생되었을까? 이는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겁기 인간세상에 대하여 바쎗타여, 언제 어느 때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마치 끓인 우유가 식으면 그 위에 엷은 막이 생기는 것처럼, 맛있는 땅조각이 물 위에 막을 형성하며 나타났다.”(D27.7)라고 묘사되어 있다. 인간의 기원이자 계급의 기원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왜 "하나님아버지"라고 말할까?

 

세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보면 스케일이 크다. 우주적 스케일이다. 마치 천지창조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제일의 원인을 갖는 창조주가 있어서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주라 불리우는 하느님도 중생일 뿐이다. 이는 경에서 색계 초선천에 가정 먼저 화생한 자에 대하여 뭇삶(satta: 衆生)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느님도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디가니까야 빠띠까의 경에서 보는 하느님은 마치 바까하느님을 보는 것처럼 망상적 유형의 하느님이다. 이는 자신의 전생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창조주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1)하느님, 2)위대한 하느님, 3)정복자, 4)정복되지 않는 자, 5)모든 것을 보는 자, 6)지배자, 7)주재자, 8)작자, 9)창조주, 10)최상자, 11)조물주, 12)전능자, 13)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ahamasmi 1)brahmā 2)mahābrahmā 3)abhibhū 4)anabhibhūto 5)aññadatthudaso 6)vasavattī 7)issaro 8)kattā 9)nimmātā 10)seṭṭho 11)sajitā 12)vasī 13)pitā bhūtabhabyāna)”(D24.30)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묘사를 보면 무려 13가지에 달한다. 이 중에 익숙한 것은 “1)하느님(brahma), 9)창조주(nimmātā), 11)조물주(sajitā), 12)전능자(vasī)”일 것이다. 이런 용어는 한국사람이라면 익숙하다. 교회에서 들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더 익숙한 말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말이다.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에서 다녔다. 고교 3년 동안 기독교를 접했기 때문에 기독교의 예배와 찬송은 매우 익숙하다. 언젠가 친구 결혼식을 교회에서 했는데 진행방식이 너무 익숙해서 놀란 적이 있다. 그런데 미션스쿨에서 귀가 따갑게 들은 말은 하나님아버지라는 말이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왜 "하나님아버지"라고 말할까? 이는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부처님당시 브라만교의 브라흐마를 묘사한 것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이다. 불교경전에서 브라만교의 창조주 브라흐마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pitā bhūtabhabyāna)”(D24.30)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고참인 것처럼

 

초기경전에서 세계에 대한 설명을 보면 놀라운 것으로 가득하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유일신교의 창조주 개념을 깨 버리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창조주의 외로움을 들 수 있다. 이는 오 다른 뭇삶들이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aho vata aññepi sattā itthatta āgaccheyyunti)”(D22.30)라고 열열히 바랬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이는 그는 그곳에서 오랜 세월 홀로 살았기 때문” (D22.30)이라고 했다. 이를 하느님의 고독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하늘사람이 복과 수명이 다하여 마치 강등되듯이 아래 세상에 홀로 화생했을 때 심심했을 것이다. 마치 무인도에서 홀로 된 자가 사람 보기를 희망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오랜 세월 홀로 지내다 보니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말벗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출현하기를 학수고대했는지 모른다. 마침내 꿈은 실현되었다. 복과 수명이 다한 자들이 색계 초선천에 화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든지 먼저 들어온 사람이 고참이다. 학교에서는 학번으로 따지고, 군대에서는 군번으로 따진다. 회사에서는 입사년도로 따진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든지 위계질서는 있다. 세상이 생겨날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 보다 먼저 온 존재가 있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중에 화생한 존재는 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여기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24.30)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먼저 온 자가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자가 있다면 그가 나의 창조자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도 같다. 부모가 있어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 태어나 보니 부모가 있었던 것이다. 우주 성겁기에도 이런 일이 발생했다.

 

나중에 화생한 자는 먼저 화생한 자를 자신의 창조주로 보았다. 먼저 화생한 자는 말벗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내 화생한 자가 나타나자 자신의 뜻대로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뭇삶은 나에 의해 창조되었다. (Mamañhi pubbe etadahosi)”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장 먼저 태어난 자는 창조주가 되었다.

 

창조주가 있으면 피조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중에 태어난 자들은 이 존자는 하느님이고, 위대한 하느님이고, 정복자이고, 정복되지 않는 자이고, 모든 것을 보는 자이고, 지배자이고, 주재자이고, 작자이고, 창조주이고, 최상자이고, 조물주이고, 전능자이고,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이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D24.30)라고 생각한 것이다.

 

미션스쿨 고교 3년은 최악의 시기

 

나의 고교 3년은 최악이었다. 서울 혜화동에 위치한 K고교에서 3년은 혼란과 혼돈의 연속이었다. 이는 미션스쿨이 나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학교를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동대부중에서 다녔기 때문에 불교가 먼저 자리 잡았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기독적 인격이라는 교훈을 표방하는 미션스쿨에 배정받고 보니 3년동안 마음으로 저항한 것이다.

 

미션스쿨 3년 동안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였다. 교목은 설교할 때 반드시 하나님아버지라고 했다. 하느님도 부족하여 아버지를 붙인 결과 대단히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성경시간에 번호순으로 한명씩 교단에 올라가서 기도해야 했는데, 학생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아버지를 부르는 것부터 시작했다.

 

운동장에서 전체예배가 있었다. 초청된 목사는 지금 이순간에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학생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뜨끔했다. 목사가 설교하는 내내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션스쿨 3년동안 한번도 하나님아버지라고 불러 본 적이 없다. 부르는 순간 나의 정신을 빼앗길 것 같았다. 그런 하나님은 공포의 하나님이었다국민학교 다닐 때 크리스마스날 교회에 빵 타러 갔었는데 그 때 알려 준 노래가 있었다. 하나님을 믿다가 믿지 않으면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노래였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겪은 정신적 트라우마는 꽤 오래 갔다.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두렵고 무섭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그러다가 초기불교를 만나게 되었다. 더구나 디가니까야에서 세계의 기원에 대한 가르침을 접하게 되었을 때 이제 더 이상 두려운 존재는 아닌 것이 되었다. 왜 그런가? 이는 하느님에 의한 창조라고 믿는 것에 대하여 전래적인 세계의 기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 분명히 압니다. 그것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이상에 대해서도 분명히 압니다. 그것에 대하여 분명히 알아서 집착을 여의고 집착을 여읜 뒤에 나는 열반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그것을 잘 알아서 여래는 재난을 여읜 것입니다."(D24.30)

 

 

부처님은 세계의 기원을 잘 안다고 했다. 어떻게 안다는 것일까? 이는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의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환멸적 연기로 영원주의가 논파됨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세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디가니까야에 묘사되어 있는 세계의 기원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바이블에 묘사되어 있는 창세기와 유사하다. 이를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있을까?

 

부처님 당시 사성계급의 최상층에 있었던 지배계층의 종교는 브라만교였다. 브라만교의 브라흐마에 대한 13가지 묘사를 보면 오늘날 바이블에서 보는 유일신의 묘사보다 더 많고 더 생생하다.

 

불교에서 본 브라만교의 하느님은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색계 초선천에서 고작 1겁 사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너무 오래 살아서 과거전생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산다고 착각하며 마치 자신이 창조주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초기경전을 접하고서 유일신교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부처님 당시에도 오늘날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유일신교와 매우 유사한 브라만교가 있었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영원주의를 논파했는데 바로 브라만교의 영원주의 교리를 부순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허무주의도 논파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위대하다. 발생적 연기로 영원주의로 격파하고, 환멸적 연기로는 허무주의를 부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도에서 사상통일을 이루었다. 이런 가르침이 니까야에 실려 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그런 하나님은 없기 때문이다. 있다면 윤회하는 중생으로서 하나님은 있다. 우리와 똑 같은 존재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헤매지 않았을 것이다. 니까야가 널리 읽혀 져야 하는 당위성을 말한다.

 

 

2021-10-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