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고사(事故死)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5. 12:04

사고사(事故死)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삶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태어났으니 끝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날이 언제가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우리는 모두 업생(業生)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은 업이 익어서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죽음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적시적 죽음이고 또 하나는 비시적 죽음이다. 적시적 죽음은 수명대로 살다 죽는 것을 말한다. 나이 들어 오래 살다 죽었을 때 제명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경우 호상(好喪)이라고도 말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사고 등으로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이다. 이를 비시적 죽음이라고 한다.

 

비시적 죽음은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비시적 죽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천상의 존재라면 적시적 죽음이 될 것이다. 천상은 수명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수명대로 살다 죽는다고 하지만 천상처럼 수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사실상 비시적 죽음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 이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은 비시적 수명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비시적 죽음은 수명을 존속시키는 업을 방해하는 업으로 일어나는 것이다.”(Vism.8.2)라고 했다.

 

방해업 때문에

 

사고사 등 비시적 죽음을 맞이 하는 것에 대하여 방해업 때문이라고 했다. 방해업은 무엇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방해업(upapīaka kamma)다른 업에 의해서 결생이 주어지고 이숙이 생겨날 때, 생겨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방해하고 저해하고 지속시키지 않는다.”(Vism.19.15)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이숙(異熟)이다.

 

이숙은 업이 익음을 말한다. 과거 행위한 것이 조건이 맞아 떨어져서 결과로 나타날 때 업이 익었다고 말한다. 이를 깜마위빠까(kammavipāka)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업이숙(業異熟)이다. 업이 달리 익는 것을 말한다. 업이 시간을 두고 달리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 여건이 맞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생에 지은 행위는 어떠할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현생에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생에 지은 것이 현생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여건이 맞지 않을 때 다음 생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본다면 현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거나 사고가 나는 것도 어쩌면 과거 지은 행위가 익어서 나타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 대하여 업생(業生)이라고 말한다.

 

업생으로서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과거에 지은 행위가 어떻게 익어 나타날지 모른다. 이와 같은 업생에 대해서는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또한 파옥사야도의 업과 윤회를 보면 인연담을 곁들여 설명되어 있다.

 

파옥사야도의 업과 윤회를 보면 방해업에 대하여 주로 해로운 방해업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로운 방해업에 대하여 해로운 업은 또한 오래 살게 하는 유익한 업을 방해하여 수명이 짧아지게 한다.”(업과 윤회, 379)라고 설명해 놓았다. 사고사나 질병 등으로 제명대로 못살고 죽는 것에 대하여 수명을 방해하는 방해업의 작용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사고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갖가지 사고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살다보면 갖가지 사고를 겪는다. 재수 없으면 지나가다 간판이 떨어져 즉사할 수 있다. 천정이 무너져 죽고 바닥이 무너져 죽는다. 뉴스를 보면 갖가지 사고로 죽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단체로 놀러 갔다가 자동차가 물에 빠져 죽는 경우도 있다. 이를 우연으로 볼 것인가 필연으로 볼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하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이 죽는 것은 반드시 업보의 성숙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몰리야 씨바까의 경에서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납니다.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체험해야 합니다.”(S36.2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우연한 죽음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하필 그때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우연한 피습(Opakkamikāni)’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사고의 우연성을 인정했다. 자동차 사고 같은 것이다. 누구도 예측 못하는 것이 발생했을 때 이를 우연의 피습으로 보는 것이다. 주석에서는 두 가지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하나는 직적접인 우연의 피습이고, 또 하나는 간접적인 우연의 피습이다.

 

직접적인 우연의 피습에 대한 예가 있다. 누군가 간통자로 내몰려서 곤봉 등으로 맞았을 때 이는 직접적인 타격에 대한 것이다. 간접적인 우연의 피습으로서는 부처님이 돌조각에 맞은 사건을 들 수 있다. 데바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할 목적으로 바위를 굴렸을 때 돌조각 하나가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우연한 피습에 의해서

 

누구나 우연한 피습을 당할 수 있다. 이러한 우연의 피습에 대하여 부처님은 씨바까여,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반드시 업보의 성숙에 의해서만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중독, 물림, 불타고, 익사하고, 살해되는 것은 제때에 업보에 따라 죽지 못한 것으로 본다. (Milp.302)”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고는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른다. 사고가 일어난다면 순간적이다. 나이가 들어 부주의하면 넘어 질 수 있다. 만약 골반을 다친다면 큰 일이다. 골반이 골절되면 누워 지내야 하는데 이는 수명단축 요인이 된다. 이런 것도 우연의 피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처에 죽음의 위험이 있다. 한눈 팔면 죽을 수 있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치명적인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운전 중에 딴 짓 하다 사고 날 수 있다. 사고는 순간이다. 언제 어디서나 사고의 위험이 있다. 이는 업보의 성숙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씨바까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여깁니다. 그러나 스스로 체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고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되었다는 것도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36.21)

 

 

모든 것을 과거의 원인으로 돌려 버리면 숙명론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과거의 업으로 본다면 사고는 과거의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어서 나타난 결과로 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부정했다.

 

누군가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숙명론이 된다. 모든 것을 숙명론으로 본다면 사고는 예정되어 있는 것이 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부처님은 업보의 성숙도 말했지만 동시에 우연적 사건도 인정했다. 그래서 숙명론적 사고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했고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도 인정한 일상우연

 

부주의하면 사고는 나게 되어 있다. 부주의해서 난 사고에 대하여 업보의 성숙에 의한 과보로 본다면 지나친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죽을 요인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몰리야 씨바까의 경에서 1)담즙(Pitta), 2)점액(Semha), 3)바람(Vāta), 4)체질(Sannipātikāni), 5)계절의 변화(Sannipātikāni), 6)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 7)우연한 피습(Opakkamikāni), 8)업보의 성숙(Kammavipākajāni) 이렇게 여덟 가지로 설명했다.

 

여덟 가지 요인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있는 업보의 성숙(Kammavipākajāni)이 있다. 이는 업이숙을 말한다. 업이 시간 차이를 두고 달리 익어 결과로서 나타남을 말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여덟 가지 중에서 우연히 발생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사건에서 5)계절의 변화, 6)불운한 사건, 7)우연한 피습, 이렇게 세 가지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업보의 성숙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 왜 그런가? 어느 것도 원인과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우연은 없다.

 

어떤 것이든지 우연히 생겨난 것은 없다. 우연처럼 보이는 것도 인과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났을 때 이를 업보의 성숙이라고 볼 수 없지만 하필이면 그때 그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것도 인과에 따른 것이다.

 

부처님은 우연을 인정했다. 그러나 절대적 의미에서 우연론은 아니다. 부처님은 우연의 피습이라 하여 업보의 성숙과 관계 없이 사고나 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이는 사는 과정에서 무수하게 목격 되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죽었다면 하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화는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일상적 의미(sammutisacca)의 우연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우연한 피습과 같은 일상우연은 연기법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 절대적 의미의 우연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우연적 사건은 다반사로 발생된다. 이런 우연을 인정하지 않으면 숙명론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숙명론적으로 본다면 여덟 번째 항인 업보의 성숙만 적용 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연론도 인정하지 않고 숙명론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A3.61)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전생의 원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면 숙명론이 되고, 모든 것이 원인 없이 조건없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면 우연론이 된다. 이에 부처님은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왜 모든 것이 접촉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내가 설한 이러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다.”(A3.6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접촉감역이다.’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 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다.”(A3.6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연 역시 접촉으로 부터

 

부처님은 몰리야 씨바까의 경에서 여덟 가지 사건을 말씀 하셨다. 이 중에서 세 가지 즉 5)계절의 변화, 6)불운한 사건, 7)우연한 피습은 우연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절대적 우연은 아니다. 우연이라고 하지만 인과에 의한 우연을 말한다. 이런 우연 역시 접촉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접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접촉이 일어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세상이 생겨난다고 했다. 이는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S35.107)라고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이 생겨나는 것은 접촉이 있기 때문이다. 눈이나 귀 등 여섯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세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접촉으로 인하여 연기가 회전된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무명과 행, , 명색이 빠지고 여섯 감역의 접촉에서 부터 연기가 회전됨을 말한다. 이른바 8지연기를 말한다.

 

연기는 12연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연기와 관련된 경을 보면 12지 연기는 절반가량 된다. 연기에는 12연기뿐만 아니라 11, 10, 9, 8, 7, 6, 5, 4, 3, 2지와 같이 다양한 연기가 있다.

 

부처님은 상황에 맞게 연기를 설하였다. 숙명론이나 우연론, 화작론을 논파할 때는 8지 연기를 설하였다. 이는 삼사화합촉에서부터 시작되는 연기를 말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우연적 사고는 8지연기로 설명이 가능하다. 사고는 접촉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업보성숙에 따른 과보는 12지연기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는 8지연기에다 과거 전생과 관련이 있는 무명, , , 명색이 추가된다. 그래서 삼세양중인과로 방해업 등 업과 업보의 가르침을 설명할 수 있다.

 

접촉으로부터 세상이 시작되었다면 숙명론이나 우연론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접촉으로부터 세상이 시작되었다면 일상우연도 연기의 범주안에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5)계절의 변화, 6)불운한 사건, 7)우연한 피습과 같은 일상우연도 역시 연기법의 지배를 받게 된다.

 

세상사가 반드시 업보의 성숙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접촉이 있기 전에 업보의 성숙은 있을 수 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는 업이숙에 따른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접촉에 따른 연기가 회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숙명론과 우연론, 그리고 존우화작론을 비판할 때 여섯 감각영역의 접촉에서 세상이 시작된다고 했다.

 

사고가 나는 것도 접촉이 있어서

 

과거에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는 피할 수 없다. 전생에 어떤 잘못을 해서 이 생에서 과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반드시 업보의 성숙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업보의 성숙을 포함하여 “1)담즙, 2)점액), 3)바람, 4)체질, 5)계절의 변화, 6)불운한 사건, 7)우연한 피습, 8)업보의 성숙이렇게 여덟 가지 요인이 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접촉에 따른 것이다.

 

접촉이 없으면 세상도 없다. 접촉이 있어서 세상도 있게 된다. 사고가 나는 것도 접촉이 있어서 나는 것이다. 접촉이 없으면 사고도 나지 않는다. 사고 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늘 주의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늘 사띠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을까?

 

 

2021-10-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