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성취한 것에 만족하여 머무르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10. 11:37

성취한 것에 만족하여 머무르면

 

 

시간이 남을 때 유튜브를 할 것인가 글쓰기를 할 것인가? 고민된다. 유튜브를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빠져 들다 보면 알고리즘 하자는 대로 끌려 간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감각적 즐거움을 쫓는 것이다. 나중에 하고 나면 허무감이 밀려온다. 남는 게 없는 것이다.

 

글쓰기를 하면 남는다. 내것이 되는 것이다.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려 놓으면 일시적으로 강한 성취를 맛본다. 공유하는 즐거움도 있다. 누군가 공감하면 글을 쓰는 맛이 난다. 계속 글을 쓰는 추동력이 생겨난다.

 

유튜브와 글쓰기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유튜브는 수동적이고 소극적 행위에 대한 것이고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글쓰기는 능동적이고 적극적 행위에 대한 것이고 사유를 즐기는 것이다. 지금 부처님이 계신다면 수행자에게 무어라고 말씀 하실까? 아마도 유튜브를 하지 말라. 유튜브를 하면 악작죄가 된다.”라며 계율을 하나 만들었을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아간다.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감각을 즐긴다. 이를 오욕락(五慾樂)’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감각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것이나 귀에 들리는 것, 또는 코로 냄새 맡거나 혀로 맛볼 수 있는 것, 그리고 몸으로 감촉할 수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대부분 이런 삶을 살아간다.

 

눈으로 매혹적인 형상을 즐기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또다시 새로운 대상을 찾는다. 유튜브 영상을 시청할 때 자주 대상을 바꾸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음악도 그렇다. 조금 더 자극적인 음을 찾는다. 맛도 그렇다. 좀 더 매운 맛을 찾는 것도 금방 싫증 나기 때문이다. 몸의 감촉도 그렇다. 자주 파트너를 바꾸는 것도 즐거움이 오래 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감각적 대상은 즐거움이 오래 가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짜릿한 즐거움을 맛보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아 불만이다. 불만은 불만족을 의미한다. 불만적은 불편한 상태이다. 불편하기 때문에 괴롭다. 결국 감각적 즐거움은 괴로움이다.”라는 말로 귀결된다. 이는 경전에서도 확인된다.

 

 

형상, 소리, 냄새,

감촉, 사실의 모든 것들

원하는 것, 사랑스러운 것, 마음에 드는 것,

존재라고 하는 모든 것.

 

그것들은 하늘 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들이 소멸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네.”(S35.136)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가 편하게 감각적 욕망만을 즐기려고 할 때 하품 나올 것이다. 권태가 삶을 지배했을 때 끊임없이 즐길거리를 찾아 기웃거릴 것이다. 더 센 자극을 찾을 때 결국 술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그 순간은 천상일지 몰라도 깨면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술은 괴로움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추상적 사유의 즐거움

 

즐거움에는 감각적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감각적 욕망을 여의는 즐거움이 있다. 어떤 것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사람이 그것이 뭇삶이 체험하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분 좋음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훨씬 아름답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어떠한 것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아름답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세상에서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훌륭하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다.”(M59)

 

 

감각적 즐거움 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세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첫째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는 것이고, 둘째는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는 것이고, 셋째는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즐길 대상을 바꾸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대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대상으로 바꾸라는 것과 같다.

 

감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귀로 듣는 것 등 오감에 크게 의존한다. 이는 물질적 대상을 즐긴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감각을 즐기면 즐길수록 사유하고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이다. 매혹적인 형상을 접했을 때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정신적 대상을 추구하면 사유를 하게 된다. 어떤 사유를 말하는가? 추상적 사유를 말한다.

 

선정에 들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감각적 대상을 멀리 해야 한다. 감각적 대상에서 얻는 즐거움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정신적 대상에 집중하게 된다. 이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선정에 들 때는 먼저 사유와 숙고를 갖추는 것이다.

 

사유와 숙고는 언어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호흡을 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신체적인 형성에 해당되는 호흡을 언어적 형성에 해당되는 사유와 숙고로 지켜보는 것이다. 마치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을 묶어 두는 것과 같다. 이렇게 호흡을 관찰했을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경에서는 희열과 행복을 맛볼 것이라고 했다.

 

희열과 행복을 맛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감각을 통한 것이고 또하나는 사유를 통한 것이다. 전자를 물질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고, 후자를 정신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물질적 성취보다는 정신적 성취가 훨씬 더 오래 간다는 것이다. 매혹적 대상을 보는 데서 오는 감각적 즐거움은 짧지만 선정을 통해서 오는 정신적 즐거움은 꽤 오래 감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훌륭하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다.”(M59)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추상적 사유의 즐거움이라 해야 할 것이다.

 

글 쓰는 즐거움

 

글 쓰는 것도 즐거움이다. 다만 힘이 들고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 글은 논리이기 때문에 머리를 많이 써야 한다. 마치 하나의 창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것 같다. 그런데 글은 글을 완성했을 때 기쁨도 있지만 글을 쓰고 있는 과정에서 기쁨도 크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이는 몰입하기 때문이다. 글쓰기 삼매에 빠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글쓰기는 정신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또한 언어적 행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글은 언어의 영역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유가 일어나는데 이는 창작의 영역에 들어 간다. 글쓰기는 창의에 바탕을 둔 고도의 정신적 노동이라고 볼 수 있다.

 

왜 나는 매일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의무적으로 쓰고 있다. 시간만 남으면 쓴다. 두세 시간 여유가 있다면 글 하나 나올 시간인데.”라며 자판을 두들긴다. 스스로 글쓰기 족쇄에 갇혀 지내는 것이다. 이런 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오늘 일요일 오전 머리를 굴려 자판을 치고 있다. 머리 속에 있는 것이 마치 모니터 흰 여백에 탁탁 박히는 것 같다. 이런 것을 즐기고 있다. 글을 쓰면서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마침내 글이 완성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강한 쾌감을 느낀다. 이런 즐거운 느낌은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감각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물질적인 것 보다 정신적인 것이 더 세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더 오래 간다. 물질적인 것 보다 정신적인 것이 더 세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몸을 옹기라고 알고

이 마음을 성채처럼 확립하여

지혜를 무기로 악마와 싸워

성취한 것을 수호하되 집착은 여의어야 하리.”(Dhp.40)

 

 

몸을 옹기처럼 알고 마음을 성채처럼 확립하라고 했다. 몸을 옹기라고 본 것은 부서지기 쉽기 때문이다. 옹기는 언젠가는 부수어 질 운명이다.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결국 부서지게 될 것이다. 몸도 마찬가지이다. 머리카락부터 시작하여 서른두 가지 신체적 형성기관은 결국 부수어 지고 만다.

 

몸은 지금 이순간에도 부서지고 있다. 자양분이 공급되면 끊임없이 생성되고 또한 소멸된다. 생명기능이 끝나면 썩어서 사대로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다르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이기 때문에 부수어 지지 않는다. 그러나 제어되지 않는 것이 마음이다. 천방지축 날 뛰는 마음은 제어되어야 한다.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의 밧줄로 묶어 두면 행경의 범위 안에서만 마음이 있게 될 것이다.

 

전사(戰士)가 되어서

 

게송에서 이 마음을 성채처럼 확립한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통찰에 몰두하여 마음을 확립하는 것을 말한다. 호흡관찰이 좋은 예이다.

 

수행자는 마치 전쟁터의 전사(戰士)와도 같다. 수행자는 번뇌와 전쟁을 한다. 이는 부처님이 성도과정에서 마라(惡魔)와의 전쟁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마군(魔軍)과 전쟁을 했다. 어떤 마군인가? 일곱 가지 마라의 군대가 있다. 욕망의 군대, 혐오의 군대, 기갈의 군대, 갈애의 군대, 권태와 수면의 군대, 공포의 군대를 말한다. 모두 마음의 번뇌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마음의 번뇌와 싸워서 승리했다. 마치 전쟁터에서 전사가 적을 무찔러 승리한 것과 같다. 어떻게 승리했는가? 지혜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아는 위빳사나의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지혜를 무기로 악마와 싸운다.”고 말한 것이다.

 

번뇌라는 악마의 군대와 싸워서 이겼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법구경 게송에서는 성취한 것을 수호하되 집착은 여의어야 하리.”라고 했다. 성취한 것을 수호하는 것과 집착을 여의는 것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취한 것은 수호해야 한다. 감각적 욕망을 굴복시켰으면 다시는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술을 끊었는데 다시 술병에 손이 간다는 것은 술을 끊은 것이 아니다. 뱉은 음식을 다시 삼킬 수 없을 정도로 혐오해야 끊을 수 있다.

 

번뇌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수호해야 한다. 그렇다고 수호에서 머물면 안된다. 얻은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뗏목이 고맙다고 하여 뗏목을 지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잊어버려야 한다. 그럼에도 성취한 것에 대하여 집착한다면 자만이 될 것이다.

 

자만은 죽음의 길

 

불교수행의 최종목표는 사향사과와 열반이다. 사과에서 각 단계마다 열반체험이 있어야 한다. 한번은 죽었다가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물론 체험해 보지 않았다. 이론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번뇌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된다. 아직 남아 있는 번뇌마저 소멸시켜야 한다. 만약 그가 작은 번뇌에 승리하여 그 도취감으로 산다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즐기기만 하는 것과 같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수다원이 되었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여 사다함 단계로 가야 하고, 사다함은 아나함 단계로 가야 한다. 그래도 남아 있는 번뇌가 있다. 매우 미세한 번뇌를 말한다. 자만이 대표적이다.

 

자만은 남과 비교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아나함에게 있어서 번뇌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내가 아나함인데라는 자만이 남이 있을 것이다. 이런 자만은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진다.

 

아라한에게는 내가 아라한인데라는 자만이 있을 수 없다. 아라한은 무아인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만이 있을 수 없다. 아라한에게는 어떤 번뇌도 있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자아가 있는 자에게는 번뇌가 있지만 자아가 없는 아라한에게 번뇌가 있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자만은 최대의 적이다. 자만은 비교로 인하여 발생된다. “내가 누군데라며 자만하는 순간 죽음이다. 그래서 자만은 죽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자만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음주

 

매일 번뇌와 싸우고 있다. 욕망이라는 마군이 가장 강력하다. 권태라는 마군도 욕망 못지 않게 강하다. 유튜브시청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이 남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글을 쓰는 것이 좋다.

 

행선이나 좌선을 해도 좋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면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마군의 공격에 항복하고 만다. 이겼다고 해도 일시적이다. 음식에 대한 욕망도 크다. 식욕은 성욕과 함께 근본욕구에 해당된다. 성욕은 참아도 식욕은 참을 수 없다. 먹방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음주도 식욕의 범주안에 들어간다. 그런데 음주는 최악중의 최악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형편없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음주는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 술이 한모금이라도 들어가는 순간 악마의 군대에 지배당하고 만다. 불음주계 하나만 잘 지켜도 인생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음주는 감각적 욕망 중에서 최악에 해당된다. 음주는 만악의 근원이 된다. 수행한다고 하여 행선이나 좌선, 일상사띠만 잘 해서는 안된다. 술이 들어가는 순간 속된말로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린다. 왜 그런가? 음주는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음주에서 벗어나라면 음주를 괴로움이라고 알아야 한다. 아니 모든 감각적 욕망을 괴로움이라고 알아야 한다. 물질적 감각에서 정신적 사유로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 글쓰기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성취한 것에 만족하여 머무르면

 

이렇게 자판을 치고 있는 동안 글쓰기 삼매에 빠진다. 정리하여 인터넷에 올리면 일시적으로 강한 성취를 느낀다. 또한 한번 써 놓은 글은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나중에 책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맛에 글 쓰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멈추면 쓰러진다. 이는 성취한 것을 수호하되 집착은 여의어야 하리.”(Dhp.40)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성취한 것에 만족하여 머무르면 쓰러지고 만다. 마치 전투에서 승리한 자가 승리의 기쁨에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있는 것과 같다.

 

성취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달려야 한다. 번뇌 다한 자가 될 때까지 계속 달려야 한다. 멈추면 죽는다. 어떻게 해야 멈추지 않고 계속 잘 달릴 수 있을까?

 

 

2021-10-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