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일플러스일은 이(1+1=2)라고 알고 있었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20. 09:30

일플러스일은 이(1+1=2)라고 알고 있었는데


나는 직업에 대한 편견이 있을까? 요즘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특정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검사출신이 정치를 하고 있다. 야권 대선후보를 보면 현재 네 명의 후보 중에 무려 세 명이다. 막말 정치인도 비리 정치인도 있고 무치 정치인도 있다. 기자출신은 어떤가? 여권 후보 중에는 기자출신이 있었다. 그의 캠프에는 유독 기자출신 의원이 많았다. 그것도 특정 언론 출신이다. 그들이 네거티브로 일관했을 때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나 정치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직업군이 정치인이 되는 것은 재앙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것도 편견일 것이다. 한 두 사람이 개판치는 것을 보고 전체를 개판이라고 싸 잡아 비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직업은 어떠할까?

공학도 출신이다. 그것도 전자공학도 출신이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것에 대해서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 나라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왜 그런가? 우리나라는 전자대국이고 또한 반도체대국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포스코 창업자 박태준이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정치인 박태준은 "저는 일플러스일은 이(1+1=2)라고 알고 있는 기계공학도출신입니다."라고 말했다. 왜 이말이 지금까지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을까? 아마 그것은 '정직'이라는 키워드 때문일 것이다.

공학도 출신은 일플러스일은 이(1+1=2)라고 알고 있다. 이는 매우 수학적이다. 일플러스 일이 일이 되거나 삼이 되는 일은 없다. 언제나 일플러스 일은 이가 된다. 수학적이고 기계적이다. 계측기는 항상 일플러스 일은이라고 알려 준다.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하면 어떻게 될까?

직장생활을 20년 했다. 주로 개발업무에 종사했다. 연륜이 쌓일수록 지위도 올라 갔지만 실무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기술자는 수명이 짧기 때문에 언제 잘릴지 모른다. 기술변화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 실무에서 손을 떼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이렇게 일인사업해서 먹고 사는지 모른다.

 


직장 다닐 때 영업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영업은 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항상 일플러스일은이라고 알고 있는 엔지니어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업하다 보면 일플러스일은 제로가 될 수도 있고 백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한다. 왜 그런가?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변수가 많기 때문에 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정치도 그런 것 같다.

흔히 정치한다고 말한다. 정치는 정치인들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정치한다. 집에서도 정치한다. 부부사이에도 정치가 있고 부모자식간에도 정치가 있다. 각종 모임에도 정치가 있다. 그렇다면 대체 정치란 무엇일까?

정치인들이 정치하는 것을 보면 정치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먼저 여와 야로 나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치파트너가 있음을 말한다. 정치는 정치파트너가 있어야 정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부사이에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파트너가 있기 때문이다. 자녀와 대화할 때도 자녀는 파트너가 된다. 모임에 나가면 대화 상대가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정치파트너가 된다. 일상에서 정치 아닌 것이 없다.

어떻게 해야 정치를 잘 할 수 있을까? 정치는 반드시 파트너가 있기 때문에 먼저 정치파트너를 인정해야 한다. 만일 정치파트너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독재가 될 것이다. 대화는 단절되고 결국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세상사는 항상 일플러스일은 이가 아니다. 영업담당이 말한 것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일플러스일은 이가 되는 것이 맞지만 조건에 따라 제로가 될 수도 있고 백이 될 수도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이고 서로 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자연인이라 하여 심산유곡에서 홀로 살아가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살아 간다. 관계를 떠나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인간은 연기법적 존재이다. 관계와 관계속에서 상호의존 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수한 변수를 안고 사는 것과 같다. 오늘 평안해도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얽히고 설켜 있기 때문에 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이를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말할 수 있다.

대승불교 핵심 교리 중의 하나는 불이사상이다.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런가? 작자와 수자가 다른 것이 아니라면 같은 것이 된다. 이는 아트만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불이사상은 외도사상이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범아일여 사상과 같은 것이다. 또한 변치 않는 자아를 인정하기 때문에 영원주의가 된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주의는 있을 수 없는 삿된 견해가 된다. 이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상호의존연기와 조건발생연기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불이사상은 외도사상이지만 불일불이가 되면 불교사상이 된다. 불일불이는 무엇인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불이가 둘이 아니면 하나일까? 그렇지 않다. 불일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작자와 수자와의 관계를 말한다.

대승경전에 제일공의경이 있다. 경에서는 '유업보이무작자(
有業報而無作者)'라고 했다.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쉬운 말로 하면 "죄를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해서 안된다."라는 말과 같다. 미워해야 할 것은 죄인 것이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는 있지만 죄를 지은 사람은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불일불이사상이다. 단지 불이사상이라고만 하면 외도사상이 되어 버린다. 반드시 불일을 붙여서 불일불이라고 해야 한다.

불일불이사상은 대승불교 핵심사상이다. 특히 유마경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불일불이는 연기법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호의존과 조건발생 연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나홀로 독단으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홀로 존재한다고 보는 유일신교의 영원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는 유물론적 허무주의도 역시 설자리가 없다.

대승불교의 불일불이사상은 부처님의 연기법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는 제일의 공경에서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니까야에서는 작자와 수자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표현되어 있다. 작자와 수자가 같은 것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는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작자와 수자가 동일하다면 영원주의가 되어 버림을 알 수 있다.

작자와 수자가 다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는 허무주의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행위의 작자와 업보의 수자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는 작자와 수자가 연기적 관계임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S12.17)라며 연기법을 설했다.

아직도 일플러스일은 이라고 믿고 있는 공학도 출신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수학적 관계에서나 성립된다. 하루종일 실험실에서 계측기를 이용하여 데이터를 산출하는 연구개발자에게는 일플러스일은 이가 된다는 것은 진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실험실 밖으로 나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세상은 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닌 세상이다. 반드시 일플러스일은 이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제로가 될 수도 있고 백이 될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특히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 되는 것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정치한다고 하여 반드시 정치인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집안에서도 정치할 수 있고 모임에서도 정치할 수 있다. 이럴 때 불일불이의 사상을 적용해야 한다. 작자와 수자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연기법적 관계를 말한다.

행위에 대한 행위자와 행위에 대한 업보를 받는 수자가 같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다른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는 그 행위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죄는 밉지만 죄인을 그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존재한다면 그는 단지 연기법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단지 사회통념상 인습적으로 불리우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검사출신과 기자출신 정치인의 행태를 보면 편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미워해야지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 그들은 관념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업이 그 사람의 주인이고, 그 사람은 업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견이다. 팔정도가 출세간적 정견이라고 한다면, '업이 주인(kammassakat
ā)'임을 반조하는 것은 세속적 정견이 된다. 그래서 죄는 미워하지만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다만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 보라고 했다.

아침에 일터에 가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오피스텔 경비원들과 미화원들이다. 이들에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하는 것부터 하루일과가 시작한다. 이들이 고마워서 작년과 올해 과일 한박스씩 선물한 적이 있다.

직업에 귀천이 있을 수 없다. 사회통념상 귀천은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을 하는 자가 된다. 청소부가 거리를 쓸 때 세상을 깨끗이 하기 위해 쓴다고 생각한다면 고귀한 일이 된다.

고귀한 행위를 하면 고귀한 자가 된다. 나는 고귀한 일을 하고 있을까? 아직까지 일플러스일은 이라고 믿고 있는 공학도 출신이다. 검사나 기자출신 정치인 행태를 보면 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닌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연기법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보면 천박해 보인다.

천박한 행위를 하면 천박한 자가 된다. 고귀한 행위를 하면 고귀한 자가 된다. 팔정도는 성스럽고 고귀한 팔정도이다. 팔정도를 닦으면 누구나 성스러운 자가 되고 고귀한 자가 된다.

팔정도 항목 중에 정어가 있다. 거짓말이나 이간질, 욕설, 꾸며대는 말에 대한 것이다. 검사출신과 기자출신에게서 이런 것을 본다. 정어를 지키지 않는 자는 천박한 자이다. 정어를 지키면 고귀한 자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낮은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야말로 고귀한 삶을 사는 자이다. 팔정도의 가르침대로 사는 자를 말한다.

팔정도경을 암송하고 있다. 팔정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팔정도의 삶을 살면 고귀한 자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잘 실천되지 않는다. 검사나 기자출신 정치인 행태를 보면 죄를 미워하기 보다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1-10-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