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윤회속의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27. 08:05

윤회속의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

 


잠들 시기를 놓쳤다. 잠은 달아 났다. 잠은 잠이 와야 자는 것이다. 잠을 청한다고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은 내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음명상 다섯 게송을 암송했다. 그제 다 외운 것이다. 이제 암송하는 즐거움만 남았다. 마치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후에 그 즐거움을 나무를 옮겨 가며 누리는 것과 같다. 도저히 외워지지 않을 것 같은 빠알리 게송도 노력 앞에 무력하다. 외우고 또 외우다 보면 입에서 술술 나온다.

보이차를 마셨다. 잠이 안온다고 술을 마신다거나 수면제를 먹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지도록 차를 마신다. 자리는 뜨뜻하다. 극세사 전기장판을 가장 낮은 1로 해 놓으니 안락하다. 수면유도 음악을 들었다. 유튜브에 있는 것이다. 십분이면 잠 잘 것이라고 쓰여 있다.

수면유도음악을 들으니 귀가 청정해지는 것 같다. 이럴 때 육근청정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눈과 귀, 코 등 여섯 감각기관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육근에는 의근도 들어 있다. 마움의 문도 청정하게 해야 함을 말한다.

법당에 가면 육근이 청정해지는 것 같다. 왜 그럴까? 너무나 당연한 것 같다. 눈으로는 부처님을 본다. 귀로는 법문을 듣는다. 코로는 향을 맡는다. 혀로는 차를 마신다. 몸으로는 바닥의 감촉을 느낀다. 마음으로는 좋았던 생각이 떠오른다.

법당에 앉아 있으면 육근이 청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보살이 "법당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라고 말 했을 것이다. 집에 있으면 심란하지만 법당에 오면 마음이 펀안한 것은 부처님 세계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청정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육근청정도 있지만 칠청정도 있다. 청정도론에 있는 계청정, 심청정 등 일곱 청정을 말한다.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청정이다.

청정은 청정한 삶으로 완성된다. 청정한 삶은 계정혜 삼학으로 완성된다. 계청정, 심청정, 혜청정이 이루어져야 승리자가 된다. 어떤 승리인가? 윤회의 삶에 대한 승리이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삶을 말한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누구나 한번쯤 의문을 갖는다. 어느 스님은 이 의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다. 아직도 의문하고 있다고 한다. 출가한지 50년 되었음에도 "나는 누구일까?"라며 의문한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이렇게 의문하면 어리석다. 왜 그런가? 그런 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2번경 '모든 번뇌의 경'(M2)에서는 '나는 누구일까?'라든가, '나는 어디서 왔을까?'등 열 가지 이상 삼세에 대해 의문하는 것은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없다. 있다면 인습적 나만 있을 뿐이다.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부르는 나, 너, 사람, 중생 등과 같은 개념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견해가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칠청정에서 세번째 청정에 해당되는 견청정을 말한다. 왜 견해를 청정하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아뜨만이 있다는 망상을 깨기 위해 견청정을 닦아야 한다.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나는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1단계로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라고 말한다.

나는 없다. 이 말은 아뜨만은 없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있다면 '명색(nama-rupa)'만 있을 뿐이다.

나는 정신-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오온이다. 나는 오온인 것이다. 나는 영원불변한 아뜨만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무상하게 변하는 오온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간다'가 아니라 '오온이 간다'라고 해야 한다.

부처닙은 무아를 설하셨다. 이는 우리 몸과 마음을 색, 수, 상, 행, 식 오온으로 설한 것과 같다. 조건발생하는 오온에 대해 설한 것이다. 조건발생은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연기를 뜻하는 빠띳짜사뭅빠다(paticcasamuppada)는 '조건하여 함께 발생함'을 뜻한다. 그래서 연기법을 '조건법'이라고도 말한다.

어느 것 하나 조건 없이 발생될 수 없다. 이 말은 어느 것도 홀로 생겨날 수 없음을 말한다. 자신이 원인이 되고 자신이 조건이 되어 발생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개념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언어적 개념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토끼뿔'도 만들 수 있고 '거북털'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창조주' 개념도 만들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망상이다. 나는 없다. 나는 생각 속에서만 있다. 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견해이다. 불교에서 견해는 사견을 말한다. 삿된 견해이다. 정견과 반대되는 것이다. 여기서 정견은 사성제를 말한다. 사실상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견이다. 부처님 가르침 아닌 것은 사견이 된다.

정견과 사견의 구분은 연기법에 달려 있다. 연기법에 기반하면 정견이 되고 연기법에서 벗어나면 사견이 된다. 법사가 법문할 때 연기법에 기반한 법문을 하면 정견이기 때문에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변치 않는 것이 있어서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윤회한다고 말하면 사견이 된다. 왜 그런가? 연기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사견이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대표적이다. 연기의 소멸을 관찰하면 영원주의는 성립되지 않고, 연기의 발생을 관찰하면 허무주의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가 연기법적으로 말하는지로 파악할 수 있다.

청정도론에 크게 의지한다. 니까야가 있지만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청정도론을 보아야 한다. 청정도론을 보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평생 '나는 누구인가?'라거나,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며 의문해 보지만 답은 없다. 왜 그런가?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언어적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나는 있을 수 없기 따문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에 대해 미혹한 자가 모든 경우에 '존재의 다발의 파괴가 죽음이다.'라고 죽음을 파악하지 않고, '중생이 죽는다 중생이 다른 몸으로 이행한다.'라는 등으로 망상한다."(Vism.17.113)

증생은 개념이다.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토끼뿔 같은 망상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없지만 오온은 있다.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오온은 실제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의 생멸을 관찰해야 한다. 조건발생하는 생멸을 말한다.

윤회에 대해 무지한 자는 내가 윤회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윤회한다고 믿으면 힌두교식 윤회가 된다. 영혼과 같은 아뜨만이 윤회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에 따르면 영혼은 성립되지 않는다. 조건발생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회에 미혹한 자는 '존재의 다발, 세계, 감역이 단절되지 않고 연속해서 일어나는 것이 윤회이다.'라고 이와같이 설한 것을 그와같이 파악하지 않고, '이 중생이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간다.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온다.'라는 등으로 망상한다."(Vism.17.113)

중생은 윤회하지 않는다. 조건이 윤회한다. 이는 연기함을 말한다. 윤회도 연기의 범주안에 있는 것이다. 조건발생하는 것이 윤회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을 '조건으로 식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여기서 식은 재생연결식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윤회한다. 그래서 "존재의 다발, 세계, 감역이 단절되지 않고 연속해서 일어나는 것이 윤회이다."(Vism.17.113)라고 하는 것이다.

무지하기 때문에 윤회한다. 알면 윤회하지 않을 것이다. 알려 주는 사람이 없어서 윤회한다. 마치 맹인이 길을 가는 것 같다. 그 길은 길일 수도 있고 길이 아닐 수도 있다. 고지대일수도 있고 저지대일 수도 있다. 평탄한 길일 수도 있고 울퉁불퉁한 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태어나면서 맹인인 자는
남이 인도하지 않으면,
어떤 때는 길로 가고
어떤 때는 길 아닌 곳으로 간다.

윤회속에서 유전하는 어리석은 자는
인도해 줄 자가 없는 것처럼
어떤 때는 공덕을 짓고
어떤 때는 악덕을 짓는다.

그가 가르침을 알고
진리를 관찰하면
그때는 무명이 그친 까닭에
적정에 들어 살게 되리라." (Vism.17.119)

잠이 오지 않아 글을 썼다. 엄지 가는대로 쳐봤다. 시간은 자정이 지나고 2시가 되었다. 평소 같으면 잠에서 깰 시간이다. 이제 잠 잘 시간이다. 잠은 잠이 와야 자는 것이다.

잠이 오지 않으면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 "잠이 오면 잠을 자지"라고 마음 먹어야 한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자가 잠만 자면 될까? 윤회속의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2021-10-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