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그대여, 그대는 나에게 감사하라!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30. 07:04

그대여, 그대는 나에게 감사하라!


"
그대 태양이여, 그대는 나에게 감사하라!" 단톡방에 올려진 일출사진을 보고 써 본 것이다.

매일 아침 일출사진을 올리는 K선생이 있다. K선생은 약수역 부근 매봉산 정자에서 동한강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는다. 마치 첨탑처럼 생긴 거대한 롯데타워가 보인다. 금빛으로 빛나는 서울의 일출은 장관이다.

 


일출사진을 보고서 누군가 글을 올렸다. 그 사람은 "태양아 광명을 뽐내지 마라. 교주님이 너를 발견하기 전까지 너는 발 없는 신발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이 말에 자극받아 "테양이여, 그대는 나에게 감사하라. 그대 위대한 태양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라고 글을 올렸다.

올린 글은 내글이다. 그러나 저작권은 따로 있다. 니체가 쓴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소설 제1장 제1절은 "차라투스트라는 서른이 되었을 때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십년의 세월을 지치지도 않고 정신과 고독을 즐기며 살았다. 하지만 마침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날 아침 동이 트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양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태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라고 시작된다. 이어지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대 위대한 별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 지난 십 년 동안 그대는 여기 나의 동굴로 떠올랐다. 그러나 나와 나의 독수리와 나의 뱀이 없었다면 그대는 자신의 빛과 그 빛의 길이 싫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침마다 그대를 기다렸고 그대의 넘치는 빛을 흠뻑 취했으니, 그대를 축복했던 것이다. 보라! 이제 나는 지나치게 많은 양의 꿀을 모은 꿀벌처럼 나의 지혜에 싫증이 났다. 이제 나에게는 손을 뻗쳐 나의 지혜를 나누어 줄 대상이 필요하다. 현명한 사람들이 그들의 어리석음을,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부(
)를 기뻐할 때까지 나의 지혜를 나누어 주고 싶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를 읽은 적이 없다. 필요한 부분만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누구나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을 제목이다.

소설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때이다. 그때 사촌형이 가지고 있는 책에서 본 것이다. 제목에 마음이 끌렸다. 호기심에 열어 보았다. 그러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횡설수설하는 것 같았다. 넋두리하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소설 같아서 조금 읽다가 그만 두었다.

중학교 때 기억이 평생가는 것 같다. 그때 접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긴 제목의 책을 늘 기억했다. 한번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지만 무언가 심오한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어떤 것일까?

요즘 인문학시대이다. 공학도 출신에게도 인문학은 강렬하게 끌린다. 어느 해인가 EBS에서 니체에 대한 인문학 강좌가 있었다. 포항공대 이진우 철학과 교수가 니체사상에 대하여 시리즈로 강연한 것이다. 이를 녹취하여 후기를 남겼다. 그중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있다. 니체의 사상이 무르익은 후기에 쓰인 것으로, 위버멘쉬(초인), 권력에의 의지, 영겁회귀 등 니체의 중심 사상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라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실존한 배화교 창시자 차라투스트라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그대 위대한 별이여! 나에게 감사하라!”니체와 차라투스트라, 2015-07-22)

블로그를 검색해 보니 2015년에 쓴 글이다. 글에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니체가 불교에 영향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모두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제행무상의 진리 등 일부만 수용한 것으로 본다. 가장 핵심사상인 무아사상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니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에 대한 것이다. 독일어로 위버멘쉬라고 한다. 왜 초인인가? 그것은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을 뒤엎었기 때문이다.

중세적 세계관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중심의 세계관이다. 신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신중심의 세계관에서는 변화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변함없는 어떤 이상적인 것이 진리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같은 것이다.

기독교가 이데아사상과 결합했을 때 강력해졌다. 일개 부족신앙이 날개를 단 것이다. 그리고 유럽 중세 천년을 지배했다. 그런데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나면서 신중심의 사상에 반기를 든 사상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니체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니체는 초인을 들고 나왔다. 그런 초인은 어떤 것인가? 신을 능가하는 초인이다. 마침내 신을 죽여 버렸다. 소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장 제1절에서 "그대 태양이여, 나에게 감사하라."라는 취지로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어느 날 세상에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은 무엇일까?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은 나 이전에도 있었고 나 이후에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은 이렇게 있다.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나의 머리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신의 뜻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무엇이든지 신에게 미루면 그만이다. 마치 부모탓을 하는 것과 같다. 이래가지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발상의 전환을 해야한다.

이진우교수에 따르면, 니체 이전에는 존재가 진리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는 말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신이 이세상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신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 존재자체가 진리라는 것이다. 반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은 진리가 아닐 것이다. 이에 니체는 사고를 완전히 바꾸어 생각했다.

니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세상은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상을 보고서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본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따른 것과 같다. 그래서 니체는진리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불교 삼법인 중의 제행무상과 같다.

니체는 중세 기독교철학을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 “존재는 진리이고 변화는 가상이다.”라는 개념에 대하여 거꾸로존재는 가상이고 변화는 진리이다.”로 바꾼 것이다.

니체는어느 날 갑자기 깨달았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만 살았던 니체가 어느 날 휴양지 호수가를 거닐다가주를레이바위 앞에서,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야!”라고 말하며 깨달았다는 것이다. 마치 선사들에게서 보는 깨달음의 기연같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니체의 영겁회귀사상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가 만든 초인이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제1장 제1절에 "그대 별빛이여, 그대는 내게 감사하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니체철학이 담긴 말이다. 그것은 1)위버멘쉬(초인), 2)권력에의 의지, 3)영겁회귀 등 니체의 중심 사상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발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어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우주론으로 확대할 수 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그럼에도 생명체가 존재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존재가 있을 때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기적이다. 이에 우주원리로 설명하는 과학자도 있다.

우주원리는 무엇일까? 와인버그라고 하는 물리학자가 있다. 그는 우주상수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한 것이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이다. 어떤 것인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지적생명체가 출현하기 딱 좋은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적생명체인 인간이 이 우주에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신이 창조해서 존재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에게 미루는 것이다. 물리학자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있어서 우주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류원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 입을 빌어 "그대 별빛이여"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는 초기불교에서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불교적 세계관이 있다. 어떤 것인가? 이는 인식하는 세계관을 말한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인식했을 때 세상이 발생함을 말한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S35.107)라고

부처님은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에 대하여 접촉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시각접촉, 청각접촉 등 여섯 감역에서 접촉을 말한다. 이런 발상은 획기적이다. 니체가 "그대 별빛이여"라고 말하기 전에 말했고, 와인버그가 인류원리로 설명하기 전에 이미 말한 것이다. 그것도 이천오백년전에 말한 것이다.

부처님의 삼사화합촉에 따른 세상의 발생에 대한 가르침은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왜 그럴까? 이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수행승들이여, 누군가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공허한 말일 뿐이다. 만약 질문을 받으면 그는 대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곤혹스러움에 쩔쩔맬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그의 감역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S35.23)라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대뜸 이렇게 외친다. "그대 태양이여, 나에게 감사하라."라고. 내가 존재하기에 태양이 있는 것이지 태양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발상의 전환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을 보며 외쳤다. "그대 위대한 별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라고.

물리학자는 우주원리로 존재이유를 설명했다.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적생명체인 인간이 이 우주에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부처님은 여섯 감역으로 일체를 설명했다. "시각과 시각대상과 시각의식의 삼사화합촉에 따라 세상이 생겨난다."라고.

오늘도 태양이 떠오른다. 저 태양은 나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태양을 태양이라고 인식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매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그대여, 나에게 감사하라!

 


2021-10-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