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잠들기 전에 성찰하는 시간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1. 11. 10:49

잠들기 전에 성찰하는 시간을

 


새벽 세 시대에 눈이 떠진다. 더 잘수도 있지만 내 시간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새벽시간은 성찰하기 좋은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왜 새벽에 성찰하기 좋을까? 그것은 자신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일과가 시작되면 대상에 마음에 가 있게 되지만, 새벽에는 자신에게 마음이 향한다. 그래서 어제 일에 대해서 떠 올려 본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부끄럽고 창피한 행위가 성찰대상이 된다.

성찰과 유사한 말이 있다. 살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흔히 "자신의 행위를 살펴라."라고 말한다. 이때 살핌은 현재의 의미가 강하다.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행위를 보는 것이다. 사띠의 뜻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사띠와 살핌, 성찰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모두 자신의 행위와 관련이 있다. 사띠는 바로 전의 것을 기억하는 것이고, 살핌은 현재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이고, 성찰은 자신의 행위를 반조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미얀마에서 오랫동안 수행해 온 스님은 사띠를 주제로 법문했다. 놀랍게도 사띠라는 말 하나로 법문시간 내내 말한 것이다. 사띠로 시작해서 사띠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띠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함일 것이다.

빤냐완따 스님은 팔정도를 강조한다. 사띠도 좋지만 이제 사띠이상을 해야 함을 말한다. 사띠만 얘기하다 보면 "그래서 어쩌라구요?"라는 소리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의 목적은 사띠가 아니라 팔정도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최근 담마와나선원 까티나행사 때 빤냐완따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역시 팔정도를 강조했다. 이번에는 팔정도 중에서도 삼마상깝뽀(정사유)와 삼마와야모(정정진)에 대해서 집중으로 설명했다. 이 두 가지를 성찰과 관련해서 말했다.

빤냐완따 스님에 따르면, 바른 생각은 성찰하는 것과 의미가 같다고 했다. 이런 말은 처음 들어 본다. 아마도 스님이 직접 체험해 보았기 때문에 경험한 것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문자 받은 것이 있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몸과 마음의 현상을 매순간 '알아차림'으로 혹은 매순간 의식주 등을 '바른생각으로 성찰'하는 하는 것은 열반을 향해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사띠, 사띠, 알아차림만 강조하다 보면 자칫 바르게 생각(정사유 3가지)하는, 바르게 성찰하는, 바른게 인식하는 자세나 습관 노력을 경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 뿐만 아니라 바른 생각으로도 늘 성찰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팔정도를 통해 설하신 것입니다."

스님은 수행자의 길에서 사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사띠와 함께 성찰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성찰은 팔정도의 삼마상깝뽀(정사유) 세 가지와 관련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넥깜마상깝뽀, 아브야빠다상깝뽀, 아위힝사상깝뽀를 말한다. 각각 감각적 욕망을 여읜 사유, 분노를 여윈 사유, 폭력을 여윈 사유를 말한다.

정사유는 정견과 함께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정사유 세 가지가 왜 지혜일까? 이는 정사유가 단지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왜 그런가? 지혜는 몸으로 체득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체득되는가? 노력에 의해서 지혜가 생겨난다. 어떤 노력인가? 팔정도에서 말하는 네 가지 바른 노력을 말한다.

팔정도에서 삼마와야모(정정진)는 억제, 버림, 노력, 수호로 표현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은 억제하고, 이미 일어난 불선법은 버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은 일으키려고 노력하고, 이미 일어난 선법은 수호해야 함을 말한다. 이것이 바른 정진, 삼마와야모이다.

성찰하는 삶은 무엇인가? 팔정도에서 바른 생각과 바른 노력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띠하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되고 반드시 바른 노력이 따라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욕망과 분노와 폭력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바른 생각을 가졌다고 말한다.

매순간 사띠하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매일새벽 성찰하는 것이다. 새벽에는 마음이 자신에게 가 있기 때문에 성찰하기 좋은 시간이다.

성찰과 관련하여 초기경전에는 어떤 가르침이 있을까? 블로그에서 찾아 보았다. 블로그 검색창에서 성찰을 키워드로 하여 검색하니 과거에 써 놓은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다.

성찰에 대한 두 가지 글이 발견 되었다. 하나는 다섯 가지 성찰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열 가지 성찰에 대한 것이다.

다섯 가지 성찰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사실의 경(Ṭhānasutta)'(A5.57)이 그것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젊음의 교만

“나는 늙음에 종속되었으며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관찰한다.

2) 건강의 교만

“나는 질병에 종속되었으며 질병을 벗어날 수 없다. ”라고 관찰한다.

3) 삶의 교만

“나는 죽음에 종속되었으며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라고 관찰한다.

4) 사랑하는 것에 대한 탐욕

“나는 모든 사랑하는 것과 마음에 드는 것과 헤어지고 이별해야 한다.” 라고 관찰한다.

5)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인 악행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의 원인자이고 업의 친연자이고 업의 의지처이고 내가 선이나 악을 지으면 그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관찰한다.

다섯 가지 관찰은 세 가지 교만과 애착, 그리고 행위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성찰이 없다면 자만이 생겨날 것이다. 젊음의 자만, 건강의 자만, 삶의 자만을 말한다.

부처님은 항상 성찰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 젊음은 늙음을 이기지 못하고, 이 건강은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이 삶은 죽음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성찰해야 함을 말한다.

사람들은 세월을 한탄한다. 나이 먹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형편없이 늙어 버린 것이 현실이다. 몸도 예전 같지 않다. 날마다 상태가 다르다. 오늘 컨디션 좋아도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젊었을 때는 이 젊음이 천년, 만년 갈 것처럼 생각한다. 늙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늙음에 대한 젊음의 교만이다.

건강한 자는 이 상태가 천년, 만년 갈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고 만다. 질병에 대한 건강의 교만이다. 삶은 어떠한가? 주변에 죽는 사람이 있어도 나만은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삶의 교만이다.

사람들은 자만에 가득찬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찰해야 할까? 삶의 교만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무슨 이유로 ‘나는 죽음에 종속되었으며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자주 관찰해야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살아있는 시절에 삶의 교만이 있는데, 그 교만에 빠져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그가 그 사실을 관찰하면, 살아 있는 시절의 삶의 교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버려지거나 약해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런 이유로 ‘나는 죽음에 종속되었으며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자주 관찰해야 한다.”(A5.57)

부처님은 삶의 교만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이는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그가 그 사실을 관찰한다."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관찰은 성찰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신, 구, 의 삼업에 대한 성찰은 세 가지 교만에 모두 적용된다. 결국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악행에 대한 성찰이 된다. 그래서 다섯 번째 항처럼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의 원인자이고 업의 친연자이고 업의 의지처이고 내가 선이나 악을 지으면 그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성찰해야 함을 말한다.

열 가지 성찰은 무엇일까?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열 가지 원리의 경(Dasadhamma sutta)'(A10.48)에 실려있다. 비록 출가자에 대한 경책이기는 하지만 재가자에게도 해당된다. 왜 그런가? 재가자는 미래 출가자이기 때문이다. 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출가자는 ‘나는 계급을 여의었다.’라고 자주 성찰해야 한다.

2) ) 출가자는 ‘나의 생계는 타인에 의존한다.’라고 자주 성찰해야 한다

3) 출가자는 ‘나는 달리 처신해야 한다.’라고 자주 성찰해야 한다.

4) 출가자는 ‘나는 스스로 나의 계행 때문에 가책을 하지는 않는가?’라고 자주 성찰해야 한다.

5) 출가자는 ‘양식있는 동료수행자들이 나를 계행 때문에 비난하지는 않는가?’라고 자주 성찰해야 한다.

6) 출가자는 ‘나는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모든 것과 헤어져야 하고 떠나야 한다.’라고 자주 성찰해야 한다.

7) 출가자는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을 모태로 삼는 자이고,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고,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내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업을 상속받을 것이다.’라고 자주 성찰해야 한다.

8) 출가자는 ‘나는 어떻게 낮과 밤을 보내야 할까?’라고 자주 성찰해야 한다.

9) 출가자는 ‘나는 과연 이 빈 처소에서 기쁨을 발견하는가?’라고 자주 성찰해야 한다.

10) 출가자는 ‘나는 훗날에 동료수행자들이 물으면, 부끄러워하지 않을, 인간의 상태를 초월하여 고귀한 분이 갖추어야 할, 지극히 탁월한 앎과 봄에 도달하였는가?’라고 자주 성찰해야 한다.

다섯 가지 성찰과 열 가지 성찰에서 공통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업자성정견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업자성정견이야말로 성찰할 것 중의 성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난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면 어제 잘 산 것이다. 몸과 마음이 불편하면 잘못 산 것이다.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따라 오늘 컨디션이 결정된다. 오늘 소화가 안되고 속이 쓰리다면 어제 행위를 반성해야 한다.

하루일과를 끝내고 잠자리 들 때 성찰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잠자리에 혼란된 마음으로 드는 것 같다. 잠의 질도 좋지 않고 꿈자리도 좋지 않을 것이다.

한번도 잠자리 들기 전에 성찰해 보지 않았다. 새벽에 일찍 일어 났을 때 비로서 어제 행위를 떠 올려 본다. 몸과 마음이 불편 하다면 불선업 지은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찰하는 것이 새벽에 성찰하는 것 보다 더 좋을 것 같다. 방법은 경전에서와 같이 다섯 가지 성찰과 열 가지 성찰에 대한 것이다. 특히 출가자라면 잠들기 전에 열 가지 성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부분 성찰하지 않는다. 성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감각에 의존하여 감각을 즐기며 살아간다. 감각적인 삶을 사는 한 향상이 있을 수 없다. 허무주의에 빠져 막행막식하기 쉽다.

성찰하는 삶을 살기 쉽지 않다. 가장 쉬운 방법은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를 사띠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좋은 것은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는 것이다. 잠 들 때 하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을 모태로 삼는 자이고,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고,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내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업을 상속받을 것이다."라고.

2021-11-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