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슬픔은 있어도 슬퍼하는 자는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1. 23. 08:45

슬픔은 있어도 슬퍼하는 자는

 


조락의 계절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거리 곳곳 바닥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본다.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지난 십년 이상 관찰해 본 바에 따르면, 정확히 11월 20일을 전후하여 낙엽이 진다. 지금 그 한가운데 있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는 없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파리가 맥없이 툭 떨어진다. 어떤 이는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깨달았다는 기연도 있다. 보통사람이 보기에도 바닥에 뒹구는 낙엽을 보면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상이다.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각자와 범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무상을 느낀다는 데 있어서는 같을 것이다. 계절무상, 자연무상, 인생무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무상에서 고와 무아를 보는 것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범부는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우수에 젖는다. 반면 각자는 낙엽이 지면 낙엽이 지는 줄 안다. 어떤 차이일까? 범부는 자아에 기반한 무상이고, 각자는 무아에 기반한 무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부는 슬퍼도 내가 슬픈 것이다. 각자는 슬퍼도 슬퍼할 자아가 없기 때문에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
그것만이 올바른 봄이다.”(Vism.19.20)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행위와 이숙, 그리고 행위자와 이숙자에 대한 것이다. 이는 행위와 업보가 같은 것이 아님을 말한다. 마치 한역 아함경 제일공경에서 보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와 유사하다. 이 말은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라는 말이다. 행위의 주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이를 업보라고 한다. 그런데 업보는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과보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시간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숙이라고 한다.

이숙은 행위(업)가 달리 익음을 말한다. 그것이 조건에 따라 즉각적 과보를 받을 수 있고 시간이 흘러 한참 후에 과보로 나타날 수 있다. 심지어 다음생에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의 행위자는 있으나 이숙의 향수자는 없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는 연기법적으로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게송에서는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Vism.19.20)라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조건발생하는 연기를 말한다. 행위의 행위자는 사라지고 없지만 행위가 상속됨을 말한다. 이를 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 행위는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여기 살인자가 있다. 그가 계획적으로 살인을 했든 우발적으로 했든 살인이라는 사건이 일어 났다. 인과법에 따르면 과보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Vism.19.20)라고 했다. 살인행위는 있어도 살인자는 없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고 살인행위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살인행위가 상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삼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다.”(A10.216)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는다. 업과 업보의 관계에 대하여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동시에 자신은 업의 상속자임을 말한다. 이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Vism.19.20)라고 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바른 견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행위는 있으나 향수자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행위자가 향수자가 다른 것도 아니다. 또한 같은 것도 아니다. 이는 사건발생으로 보기 때문이다. 사건과 사건이 연속해서 조건발생한다고 보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만약 행위와 행위자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행위자와 이숙자가 같다고 보는 것과 행위자와 이숙자가 다르다고 보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을 당한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흔히 '내탓' '네탓'을 말한다. 행위자와 향수자가 동일하다면 내탓이 될 것이다. 슬퍼도 내가 슬픈 것이다. 이는 자아에 기반한다. 자아에 기반하여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서 센티멘탈한 마음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나는 없다고 했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나를 존재론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연기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보면 자아에 기반하게 된다. 행위자와 향수자를 동일하게 보면 영원주의자가 되고, 다르게 보면 허무주의자가 된다. 특히 후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유물론에 기반한 단멸론자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둘 다 자아에 기반한 양극단이다. 이는 존재론에 기반한다. 존재론은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영원주의나 허무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싸빠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 (S12.17)라며 십이연기를 설하셨다.

양극단은 모두 연기법으로 논파 된다. 발생을 관찰하면 허무주의가 부서지고, 소멸을 관찰하면 영원주의가 부서진다. 영원주의라는 극단과 허무주의라는 극단은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영원주의자는 지금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에 대하여 “내 탓이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맞지 않는다. 연기법은 사건에 대한 것이고 그것도 조건발생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자와 향수자가 다른 것이 된다. 그렇다고 전혀 다른 것도 아니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멸론자가 "네 탓이야!”라고 해도 맞지 않는 것이다.

내탓도 아니고 네탓도 아니다. 그래서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 그것만이 올바른 봄이다.”(Vism.19.20)라고 했다.

조락의 계절이 되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센티멘탈하게 된다. 우수에 찬 표정으로 계절무상, 자연무상, 인생무상을 생각하게 된다. 존재에 기반한 자아론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도 떨어지는 낙엽에 무상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감상적으로 되지는 않는다. 같은 계절무상, 자연무상, 인생무상이라 해도 무아에 기반하면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 이는 오온을 존재가 아니라 사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슬픔은 있어도 슬퍼하는 자는 없다.

 


2021-11-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