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재미학자의 유물론적 연기관과 유물론적 윤회관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13. 15:10

재미학자의 유물론적 연기관과 유물론적 윤회관을 보고

 

 

잘 쓴 글은 글의 말미에 하고 싶은 말이 요약되어 있다. 이번에 페이스북에서 본 홍창성 선생의 글도 그렇다. 그는 글의 말미에 나는 이렇게 모였던 조건이 흩어져 다른 곳에서 다른 조건과 다시 모이고 또 흩어짐을 반복하는 과정이 윤회라고 생각한다.”라고 써 놓았다.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다. 불교에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한마디씩 한다. 그러나 그 말이 경전에 근거한 것인지, 체험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경전과 체험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빠알리어로 딧티(diṭṭhi), 한자어로 견해(見解)라고 한다.

 

유물론적 연기관

 

홍창성 선생은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이다. 종종 불교계 신문에 칼럼을 쓰기도 한다. 이번 법보신문에 쓴 것을 보면 매우 민감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윤회에 대한 것이다.

 

홍창성 선생이 생각한 윤회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와는 다르다. 경전에서도 볼 수 없는 윤회관이다. 이를 모였던 조건이 흩어져 다른 곳에서 다른 조건과 다시 모이고 또 흩어짐을 반복하는 과정이 윤회라고 했는데, 이는 윤회관이라기 보다는 사대의 흩어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과학자들은 합리적 사고를 한다. 인문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이론을 바탕으로 검증된 것만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럴진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육도윤회는 황당무계한 것이 틀림없다. 과학적으로도 검증되지 않고 눈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대가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것을 윤회로 보는 것은 유물론적 사고방식이다. 모든 것을 물질의 생멸로 보는 것이다. 그럼 정신은?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따라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단멸론이다.

 

유물론이 있다면 유심론도 있을 것이다. 오로지 정신만 있는 것으로 본다. 심지어 물질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식하지 않으면 없는 것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유물론도 부정했고 유심론도 부정했다. 부처님은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온에 대한 것이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정신과 물질에 대하여 설했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연기를 빠알리어로 빠띳짯사뭅빠다(paiccasamuppāda)라고 말한다. 이를 직역하면 조건발생법이다. 한자어로 표기하면 연기법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인연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빠알리 원문 빠띳짜(paicca)는 조건을 말하고, 사뭅빠다(samuppāda)는 함께 발생을 말하기 때문에, 빠띳짜사뭅빠다는 조건발생법이라고 한다. 이를 줄여서 조건법이라고 말한다.

 

연기법은 조건법이다. 연기법을 인연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약간 거리가 있다. 그런데 홍창성 선생은 칼럼에서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 대하여 “ ‘만물은 모이고 흩어지는 조건이다 (조건 그 자체다).’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라고 했다. 이런 제안은 유물론적 관점이다. 이를 유물론적 연기라고 할 수 있다.

 

유물론적 윤회관

 

모든 현상을 유물론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물질의 생성과 소멸에 대하여 사대작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처님 당시에도 오늘날 과학적 유물론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물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인가?

 

육사외도 스승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있다. 그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S24.5)라고 했다.

 

아지따는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의 근본 세계인 지, , , 풍 사대에 대하여 죽으면 모두 흩어지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아지따는 또한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감각능력이라는 것은 정신능력을 말한다. 정신도 흩어져 버림을 말한다. 정인은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물질도 정신도 남김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홍창성 선생은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 대하여 만물은 모이고 흩어지는 조건으로 보자고 했다. 이런 연기관은 결국 윤회관에도 영향을 준다. 그래서 홍창성 선생은 조건이 모이고 또 흩어짐을 반복하는 과정을 윤회라고 했다. 이를 이름 붙인다면 유물론적 윤회관이라고 볼 수 있다.

 

홍창성 선생이 처음이 아니다

 

홍창성 선생이 제안한 연기법의 이해와 윤회관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 의해서 주장해 왔던 것이다. 이판사판 화엄경의 저자 성법스님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이다.

 

오래 되었다. 블로그에서 검색해 보니 2013년 글에 성법스님의 윤회관이 있다. 스님은 자신의 홈페이지 사이트에서 윤회의 개념을 생명체의 연속성과 재생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아 육체를 화장하고, 화장 후 남은 재를 나무 밑에 뿌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되고, 새들도 먹게 되고....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 내 육체의 질량과 에너지 많큼은 우주에 윤회되는, 이런 윤회를 설명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성법스님,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 http://www.sejon.or.kr/ )라고 주장한 바 있다.

 

홍창성 선생은 칼럼에서 이웃집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에 대하여그분의 마음은 또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 왔기 때문에 이미 그들의 마음을 이루는 조건의 일부가 되어 자리 잡고 있다.”라고 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마도 문화적 유전자 밈(meme)을 말하는 것 같다.

 

한국에 한 수학자가 있다. 그는 교계 신문에 컬럼을 썼는데 윤회를 부정했다. 윤회가 있다면 생물학적 윤회와 문화적 윤회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생물학적 윤회는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물려 받은 것을 말하고, 문화적 윤회는 문화적 유산을 물려 받은 것을 말한다. 특히 후자에 대하여 문화적 유전자에 의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를 “여러 사상·종교·이념·예술·제도가 합쳐지고 가지를 치는 것은 문화유전자”라고 설명했다.

 

홍창성 선생이 주장하는 연기법과 윤회론은 자신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회자되었던 것이다. 다만 조건발생적 연기법에 대하여 만물이 조건과는 별도로도 존재할 수 있는 무엇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을 우려하여 유물론적 연기관 유물론적 윤회관을 주장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홍창성 선생의 칼럼을 읽어 보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은 부정된다. 이는 조건과는 별도로도 존재할 수 있는 무엇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을 언급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마치 힌두교의 아뜨만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은 무아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무아연기를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시키는 것은 가르침과 맞지 않다.

 

그 사람의 지위나 권위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견해가 진실인지 진리인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사람의 지위나 권위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학식이 있는 자, 많이 배운 자의 권위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가 말한 것이 반드시 맞는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깔라마의 경에서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라고 했다. 또한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오.”(A3.65)라고 했다.

 

그가 제아무리 권위 있는 학자라고 해도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라면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데 정말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을까?”라며 경전을 열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D16.98)라고 말씀하셨다.

 

홍창성 선생이 새롭게 제시한 연기와 윤회에 대한 견해는 신선하다. 그러나 지난 15년 동안 6천개가량 글을 써 오면서 오래 전부터 보아 왔던 것이다. 공통적으로 유물론적 견해에 해당된다. 우리 몸과 마음은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적 견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부처님은 유물론을 비판했다. 당연히 단멸론은 사견이 된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으로 무아윤회에 대한 것이다. 이는 경장과 논장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에게 권위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경전을 열어서 확인해 보아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과학의 시대는 물질만능의 시대와 동의어이다. 모든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본래 자연과학은 물질을 탐구하는 과학이다. 그런데 인문과학 역시 물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왜 그런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윤회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 결과 죽으면 몸은 사대로 흩어져서 어느 존재로 유전되고, 정신은 누군가의 기억에 의해서 문화유전이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를 편의상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홍창성 선생은 철학자로서 해야 할 말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나 사후에 대한 것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연기에 대하여 만물은 모이고 흩어지는 조건이다 (조건 그 자체다).”라고 이해하고, 또한 윤회에 대해서는 모였던 조건이 흩어져 다른 곳에서 다른 조건과 다시 모이고 또 흩어짐을 반복하는 과정이 윤회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도 이미 이천오백년 전에 이와 유사한 말을 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부처님들의 부처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말씀하셨다.

 

선정의 경지에 들어가 보지 못한 자가 선정의 경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말하고자 한다면 선정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진리, 중생, 결생, 조건의 유형의 네 가지 사실은 보기도 어렵고 설하기도 극히 어렵다.”(Vism.17.25)라고 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범부가 극히 보기 어려운 것 네 가지는 진리(sacca), 중생(satta), 결생(paisandhi), 조건(paccaya)이라고 했다. 여기서 결생은 죽음에 대한 것이고, 조건은 연기에 대한 것이다. 이 네 가지는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성전을 통달한 자가 아니면 연기의 해석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Vism.17.25)라고 했다.

 

삼장에 통달한 자나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가 아니면 진리, 뭇삶, 결생, 조건에 대하여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연기에 대하여 만물은 모이고 흩어지는 조건이다 (조건 그 자체다).”라고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더구나 윤회에 대하여 모였던 조건이 흩어져 다른 곳에서 다른 조건과 다시 모이고 또 흩어짐을 반복하는 과정이 윤회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학자의 말보다는 경전에 있는 말씀이 더

 

학자의 권위는 인정한다. 그러나 학자의 말이라고 해서 모두 진실일 수 없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는 눈에 보이는 것,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만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물질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다. 정신을 연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유물론자들은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유물론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를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학적 유물론에 따르면 내세나 윤회는 인정되지 않는다. 물질을 탐구하는 영역에서는 연기도 윤회도 물질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그러다 보니 연기에 대하여 사대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으로 보고, 윤회에 대하여 역시 모임과 흩어짐으로 본다. 이는 다름아닌 과학적 유물론에 대한 것이다.

 

과학적 유물론은 불교가 아니다. 과학적 유물론은 어쩌면 부처님 당시 외도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유물론과 유사한 면이 있다. 아지따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라고 했고, 또한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S24.5)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홍창성 선생의 글은 탁월하다. 그러나 불교인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을 하고 있다. 체험에 보지 않은 입장에서 무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경전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가르침과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마치 유물론자가 주장하는 듯하다. 지위와 명성과 권위 있는 학자의 말보다는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의 말이 나에게는 더 다가온다.

 

 

죄악을 나는 정화시키지 못하고

무수한 생의 윤회를 유전했다.

그러한 고통을 나는 겪었으나

이제 고통의 다발은 모두 사라졌다.”(Thag.78)

 

내가 지은 업은 작건 크건

어떠한 것이든 그 모두가

완전히 멸진되었으니,

이제 결코 다시 태어남은 없다.”(Thag.80)

 

예전의 다른 생을 살다가

어떤 악이든 행했다면,

이 생에서 과보를 겪어야만 하리.

달리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Thag.81)

 

 

2021-09-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