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매일 아침 거울을 보는 이유는
두세 달 전 큰스님과 갈등했다. 그 스님에게 시비를 건 것이 발단이 되었다. 스님의 글에 모두 모두 “네, 네”하거나, “합장합니다.”라며 칭송하기에 바빴지만 약간 까칠하게 군 것이다.
마침내 스님은 폭발했다. 그 동안 참고 참아 왔던 것 같다. 댓글을 다는 족족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해탈하는데 신경 더 쓰세요.”라는 말이었다.
스님은 왜 해탈을 말했을까? 그것은 승가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승가에 허물이 있어도 승가에는 자정작용이 있기 때문에 승가에 내버려 두라는 말이다. 이는 “네 할 일이나 잘해!”하는 말과 같다. 또한 이론만 세우지 말고 실천하라는 말과 같다.
스님과 더 이상 소통하지 않는다. 스님이 차단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서는 보기 싫으면 차단한다. 메신저를 보내는 등 자꾸 귀찮게 해도 차단한다. 글을 너무 많이 올려도 차단하는 것 같다. 긴 글을 볼 시간도 없을뿐더러 잘난 체하는 것이 보기 싫은 이유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큰스님과 갈등을 겪은 후에 글에 변화가 생겼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유튜브 동영상을 본 것이다. 고미숙 선생과 최진석 선생은 공통적으로 질문하는 삶을 가지라고 했다. 어떤 질문인가? 자아와 세계에 대하여 항상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답에는 익숙하다. 묻는 말에 대답은 잘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서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이상은 알지 못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질문해야 한다.
요즘 글을 쓰면 성찰하는 내용이 많다. “나는 왜 이런 것일까?”라며 스스로 물어보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다.
어제 질문하는 삶과 관련하여 기억하고 싶을 만한 경을 발견했다. 책장 가득 되는 방대한 초기경전에서 마치 진주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다. 어떤 것인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나는 자주 탐욕스러운가, 자주 탐욕스럽지 않는가? 나는 자주 성내는가, 나는 자주 성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는가, 자주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지 않는가? 나는 자주 흥분하는가, 나는 자주 흥분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회의적 의심을 하는가, 자주 회의적 의심을 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분노하는가, 자주 분노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는가,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격정적으로 마음을 내는가, 자주 격정적으로 마음을 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게으른가, 자주 열심히 정진하는가? 나는 자주 집중에 들지 못하는가, 자주 집중에 드는가?”(A10.51)
어제 올린 글을 다시 인용한 것이다. 두고두고 새겨야 할 가르침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성찰하는데 이만한 문구가 없다. 이와 같은 문구를 발견한 것은 행운이다.
경의 제목은 ‘자기마음의 경(sacittasutta)’(A10.51)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열 번째 모음에 있다. 열 번째 모음은 법수(法數)가 열이라는 뜻이다. 경을 보면 탐욕, 성냄, 해태와 혼침, 흥분, 회의적 의심, 분노, 오염된 마음, 격정적 마음, 게으름, 집중이라는 열 가지 법수가 있다.
부처님은 열 가지 법수에 대하여 항상 ‘성찰(paccavekkhana)’하라고 했다. 어떻게 성찰하는가? 이는 “거울이나 맑은 물의 대야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면”(A10.51)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라는 것이다.
매일 거울을 본다. 매일 거울을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머리 모양이 잘 되어 있는지, 얼굴 여드름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는지, 옷에 때가 묻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거울이 없으면 대야에 물을 떠 놓고 얼굴을 비추어 볼 것이다. 옛날에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잔잔한 호수 사진을 보면 산과 하늘이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다. 호수에 바람이 일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잔잔한 호수를 보면 호수 바닥에 자갈도 보이고 물고기도 보일 것이다. 호수가 바람이 불어 흙탕물이 되면 볼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똑 같다.
마음이 흥분되어 있으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마치 흙탕물이 이는 것 같아서 자신의 깨끗한 마음을 볼 수 없다. 그래서 탐욕의 마음은 호수에 오색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다고 했고, 분노의 마음은 마치 부글부글 끓는 물주전자와 같다고 했다. 이런 마음으로는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현상을 제대로 있는 그대로 보려면 마음을 정화해야 한다. 마치 흙탕물이 가라앉아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호수 바닥에 있는 자갈도 보이고 물고기가 다니는 것도 보인다.
거울이나 대야에 자신의 얼굴을 보면 있는 그대로 보인다. 이를 액면(額面) 그대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더하고 뺄 것도 없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으면 있는 그대로 보인다. 얼굴에 때가 묻었다면 그대로 보일 것이다. 마치 업경대 같은 것이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을 때 더러운 것을 보지 못하거나 때가 묻은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나에게 다행한 일이다. 나는 깨끗하다.”(A10.51)라며 만족할 것이다.
거울이나 대야에 비친 나의 모습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얼굴 모습이 액면 그대로 비추었을 때 흠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만족할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다면 속으로 자신이 미인임을 확인할 것이다.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다. 얼굴에 흠결이 생기면 마치 세상이 끝날 것처럼 괴로워한다. 지나친 집착이다. 얼굴이 삶의 전부인 사람에게 얼굴에 여드름이나 주근깨, 검버섯이 생겨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얼굴 가꾸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거울은 얼굴을 액면 그대로 비추어 준다. 만약 그가 탐욕의 얼굴이라면 아귀와 같이 보일 것이다. 만일 그가 분노의 얼굴이라면 아수라와 같이 보일 것이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기 때문에 업경대와도 같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과보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나의 얼굴에 심술이 가득하다면 심술의 과보가 나타난 것이다. 두려움에 떠는 얼굴이라면 두려움의 과보가 나타난 것이다. 얼굴에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다면 잘 산 것에 대한 과보가 나타난 것이다.
거울은 나의 현재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의 행위가 결과로서 나타난 과보의 얼굴이다. 그러나 얼굴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얼굴에 때가 묻었다면 지우면 될 것이다. 분노의 얼굴이라면 평화의 얼굴로 바꾸면 된다.
거울에는 얼굴을 비추어 보는 거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거울도 있다. 이를 부처님은 담마다사라고 했다. 담마의 거울, 가르침의 거울, 진리의 거울, 법의 거울을 말한다.
담마다사로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면 마음의 때를 알 수 있다. 얼굴에 때가 묻으면 닦아 내야 하듯이, 마음에 때가 있으면 역시 닦아 내야 한다. 어떻게 닦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은 착하고 건전한 것에 비추어”(A10.51)라고 했다.
마음의 거울, 진리의 거울, 가르침의 거울, 법의 거울, 담마다사는 ‘착하고 건전한 법(kusala dhamma)’이다. 꾸살라담마가 마음의 거울 또는 진리의 거울, 가르침의 거울인 것이다.
얼굴에 때가 묻으면 때를 지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마음에 때가 있으면 지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아 불선법이면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탐욕스러운가, 자주 탐욕스럽지 않는가?”등으로 항상 성찰하라고 했다. 매일 마음의 거울을 보아야 한다.
2021-08-2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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