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시절 바람만 잔뜩 들었는데
나에게도 공적이익 추구 욕망이 있을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회사 다닐 때는 물론 지금도 공적이익을 생각하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큰회사에 들어 갔다. 80년대는 성장의 시대이기 때문에 원서만 내면 들어가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5대 1의 경쟁율을 뚫었다. 시험 없이 면접으로만 뽑았다.
신입사원 연수받을 때의 일이다. 바람을 엄청나게 불어넣었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했다. 철책선에서 총 들고 지키는 것만 애국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물건을 만들어 달러를 벌어들이는 것도 애국이라고 했다. 이런 말에 자극받았다.
회사 다니면서 바람이 잔뜩 들었다. 마치 애국전사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개발자가 되었을 때는 수출전선의 최일선에 선 전사와도 같았다. 내가 개발한 제품이 양산되어서 외화를 벌어들인다면 바로 이것이 애국이라고 생각되었다.
애국전사가 되자 다른 것은 하찮게 보였다. 수출해서 먹고 사는 나라에서 수출에 기여한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애국하는 일이다.”라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수출회사가 아닌 회사를 우습게 여기게 되었다. 수출이 아닌 내수를 타겟으로 하는 회사는 회사도 아닌 것으로 보였다.
수출로 벌어먹고 사는 나라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것이 하찮게 보였다. 이런 생각이 들자 판사나 검사 등 고위 공무원들도 우습게 보였다. 그들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그래 보았자 우리가 너희 들을 먹여 살린다.”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수출전사로서 프라이드는 하늘을 찔렀다. 내 손 끝에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개발한 제품이 잘 팔려서 달러가 들어 온다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밤낮없이 주말없이 휴가없이 일해도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것도 일종의 공적이익추구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신입사원시절부터 바람이 잔뜩 들었다. 어디를 가든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소비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것을 하찮게 여겼다. 이를 우월적 자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직업에 대한 자만도 해당된다. 일을 해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고, 생산적인 일을 해도 달러를 벌어들이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신입사원시절 연수원에서 바람 넣은 것이 평생 가는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사업자로 변신했을 때도 의무감은 있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생각이 글쓰기로 이어진 것 같다. 글쓰기를 통해서 세상에 도움이 되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일종의 공적이익 추구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신입사원 연수시절 앨범을 열어 본다. 1985년 7월 29일부터 8월 21일까지 24일동안 교육받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의 일이다. 바람을 잔뜩 불어 놓은 교육이다. 사진을 보니 20대 중후반 풋풋한 모습이다. 이렇게 지난 앨범을 열어 보니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2021-08-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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