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 극복을 위하여, 식당순례 26 호남뷔페식당
오늘 점심 때 몹시 허기 졌다. 이른 아침 밤고구마 하나만 먹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제대로 먹으려면 군것질을 참아야 한다. 평소와 다르게 11시에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외식하기로 했다. 어디서 먹어야 할까? 유튜브에서 본 고독한 미식가 이노가시라 고라가처럼 홀로 식당을 찾아 나섰다.
고독한 미식가는 큰 데 들어 가지 않는다. 작고 허름한 식당이 타겟이다. 유튜브를 보면 대형식당이나 고급식당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골목에 있는 작고 허름하고 누추해 보이는 맛집에 들어 간다.
고독한 미식가처럼 이곳저곳 두리번두리번거려 보았다. 거리 간판을 스캔하다가 마침 한 식당 간판에 눈길이 멎었다. 호남뷔페식당이다.
호남이라는 글자가 눈에 꼽혔다. 많고 많은 식당 이름 중에서 왜 하필이면 호남이라고 했을까? 호남출신으로 강하게 마음이 끌렸다. 가격도 저렴하다. 한식부페가 6천원이다.
한식부페는 2층에 있다. 대부분 부페식당은 1층에 있지 않다. 지하나 2층에 있다. 규모가 크면 고층에도 있다. 오늘 발견한 한식부페는 이제까지 다녀 본 곳을 합하여 네 곳이 되었다. 가격은 5천짜리도 있고 6천원짜리도 있지만 5,500원짜리가 두 곳으로 가장 많다.
힌식부페는 서민적이다. 특히 사무실 부근 부페식당 세 곳은 테이블이 열 개가량 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식당이다. 대체 누가 이런 곳에 와서 먹을까? 수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가격경쟁력으로 본다. 전문식당의 경우 칠팔천원이 대부분이지만 부페식당은 오륙천원이 대부분이다. 일이천원 차이로 선택이 갈린다.
식당에 일찍 들어 갔다. 식당오픈 시간 11시 20분에 맞춰 들어간 것이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일까 식당은 텅텅 비어 있다. 동그란 식판에 반찬을 담았다. 밥과 국을 합해서 반찬은 열 가지나 되었다. 많이 담지 않았다. 먹을 만큼만 담았다.
원형식판을 보니 마치 절에서 밥 먹는 것 같다. 구획지어진 식판과는 또 다른 맛이다. 반찬을 보니 오늘의 메인은 생선까스임을 알 수 있었다.
호남식 반찬은 어떤 것일까? 여덟 가지 반찬 증에서 아마 김치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듬성듬성 썰은 무우반찬과 여기에 갓김치가 어우러져 있었다. 이것이 호남식일까? 다른 반찬을 보니 특색이 없다. 이름만 호남식당 아닐까? 식당주인이 호남식당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안양에는 호남사람들이 많이 산다. 그렇다고 압도적으로 많이 살지는 않는다. 전국 팔도 출신들이 고만고만하게 산다. 그 중에서 호남사람들이 약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선거 때가 되면 늘 업치락 뒤치락 한다. 시장선거를 하면 리턴매치가 벌어지기 일쑤이다. 그래서 안양을 민심동향의 표준집단으로 보고 있다.
식당주인은 안양에 사는 호남사람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것도 어쩌면 특화전략일 것이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승부수로 호남사람을 겨냥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값싸고 맛 있고 청결하면 식당간판과 무관하게 들어간다.
호남식당 간판을 보고서 지역차별 극복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간판에 지역색을 가미하면 수요가 한정되어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호남식당임을 강조한 것은 어쩌면 자신감의 발로일지 모른다. 이 또한 나만의 생각일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옛날과 비교하여 많이 나아진 것 같다는 느낌이다.
호남사람들은 일종의 호남콤플렉스가 있을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지역차별에 대한 것이다. 오랜 세월 지역차별에 시달려 온 것이 무의식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콤플렉스는 김대중이 대통령 되고 나서 상당히 완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응어리져서 남아 있다고 본다.
서울과 수도권에는 호남사람들이 많다. 타지역 사람들 보다 더 많다. 이렇게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고향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고향을 떠난 것이다. 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됨에 따라 이농이 본격화되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인 1969년에 서울에 왔다. 부모세대가 농촌에서 더이상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없어서 야간완행열차를 탄 것이다. 이농민들은 대개 서울 변두리 산동네 달동네에 자리 잡았다. 가진 것도 없고, 학력도 없고, 기술도 없는 사람들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삶을 살았다.
이농민들에게도 희망이 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가 있었을 때 기대가 있었다.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어쩌면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장충단공원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1971년 어느 봄날 부모님과 함께 장충단공원 유세현장에 갔었기 때문이다. 처음 접해 보는 엄청난 인파에 놀랐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호남사람들 잔치날 같았다.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지역차별은 길수록 심화되었다. 80년대까지는 지속되었던 것 같다. 지역차별은 지역감정이 되었다. 대부분 산업시설이 편중된 것도 큰 이유에 해당된다. 이는 신입사원 연수 받을 때 확인한 바 있다.
1985년 7월 29일 S그룹에 공채로 들어갔다. 무엇이든지 처음 경험한 것은 강렬하다. 날자를 기억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때 당시 24일동안 연수 받았는데 일주일가량 지방사업장 견학이 있었다.
그룹 지방사업장은 수원을 제외하고 모두 경상도에 공장이 있었다. 구미부터 시작하여 대구, 울산, 양산, 마산, 창원, 거제에 이르기까지 지방사업장 대부분은 경상도에 있었다. 호남에는 전주에 한개가 있었지만 거의 없다시피 했으므로 갈 필요가 없었다.
출신학교 차별도 심했다. 26기 4차 130명 중에서 전북은 1명, 전남은 2명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학교학생은 단연 경북대 출신이었다. 그때 당시 경북대에서는 전자공학을 중심으로한 특성화 공대가 있었다. 전국 전자공학과를 합한 숫자만큼이나 많았다. 이런 이유로 많이 뽑았을 것이다. 무려 30명이 넘었다. 휴식시간에 경상도 말만 들리는 것 같았다. 나머지 학교는 10명 안팍이었다.
서울에 있는 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들어간 것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때 당시 반도체열풍이 분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아마 1980년대가 지역차별의 절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지금도 지역차별이 있을까?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이 누구러진 것은 사실이다. 자신이 당당하게 호남사람임을 밝히는 사람도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호남사람들은 호남사람으로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5.18광주민중항쟁과 관련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민주주의 과실을 따먹고 있는 것은 호남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길 호남사람들은 전략적 선택을 한다고들 말한다. 이는 현대사에서 지역차별과 5.18광주민중항쟁 등을 통해서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호남사람들을 가장 개혁적이라고 말한다.
호남의 전략적 선택은 대통령 후보자의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 개혁적이면 어느 지방 출신이든지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영남출신 대통령이 계속 나오게 되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닐 것 같다. 이번 호남경선에서 호남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호남뷔페식당에서 음식을 남김없이 깨끗이 비웠다. 마음에 든 것은 일인용 식탁이 있다는 것이다. 창측에 창을 바라고 식사할 수 있도록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혼밥족에게는 이것보다 더 좋을 수 없다.
혼밥족을 위한 배려 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식당이름에 '호남'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아직도 호남콤플렉스가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현실에서 호남식당이라고 한 것에서 주인의 용기를 본다. 과연 우리나라는 언제나 지역주의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까?
2021-09-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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