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어머니 불공(佛供)의 힘으로 살아난 사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2. 4. 10:29

어머니 불공(佛供)의 힘으로 살아난 사람

 

 

그가 돌아왔다. 그가 쓰러진지 5개월만이다. 모습은 예전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약간의 변화는 보였다. 예전보다는 더 겸손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순수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이웃 사무실 사람이다. 일종의 사회친구라고 볼 수 있다. 나이는 한두살 아래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만난 사람은 나이는 문제되지 않는다. 자주 만나면 지인의 단계가 되는데 역시 나이는 문제는 되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정도라면 사회친구라 해야 할 것이다. 사회친구는 능력에 따라 일곱살까지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나의 고객이다. 그도 역시 일인사업자이다. 직원이 없으니 일인사장이다. 업무로 해서 만나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는 키워드 광고를 보고 접촉을 했다. 이것이 인연의 시작이다. 그때 당시 그는 군포 오피스텔에 사무실이 있었다.

 

그가 같은 사무실 층으로 이사 온 것은 6년전의 일이다. 임대료와 관리비가 싼 맛에 왔을 것이다. 집이 인덕원이기 때문에 까까이 있어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어제 왔을 때 이야기 나누다 보니 그는 6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나는 이 사무실에 현재 14년째 있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사계절을 맞다 보니 세월이 그렇게 흘러 버린 것이다. 그때 당시 사십대 후반이었는데 지금은 육십대 초반이 되었다.

 

 

그는 사무실을 내놓았다고 했다. 집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파트 베란다에다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왜 이렇게 한 것일까? 그것은 혼자 있으면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7월에 발생한 사건의 영향이 크다.

 

그가 쓰러진 사건에 대해서 블로그에 글을 올린 바 있다. 그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 놀랐다. 이는 평소 보기에도 멀쩡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라며 충격 받은 것이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는 어제 수정작업을 의뢰하기 위해서 왔을 때 그 동안 벌어졌었던 일을 말했다.

 

그는 그날 밤 11시경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가슴통증이 왔다고 한다.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 아내를 시켜서 엠브란스를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첫번째 행운이다. 주변에 사람이 있었고 스스로 감지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응급실에 도착하자 마자 심정지가 되었다고 한다. 심장박동이 멈춘 것이다. 이에 간호사가 응급처치를 했는데 무려 40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그날 주말 당직의사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두번째 행운이다.

 

그가 심정지가 된 것은 혈관이 막혔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 담배로 보고 있다. 그는 40동안 담배를 피웠기 때문이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담배로 보고 있다. 일하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피우고 또한 습관적으로 피우다 보니 심장정지라는 사태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적절한 때에 응급처치가 되어서 살아 남았다. 만약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뇌졸중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아내가 있을 때 엠블런스를 부른 것도 그렇고, 응급실에서 심정지가 온 것도 그렇고, 응급실에서 곧바로 처치 받은 것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응급처치 받을 때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도 큰 행운이라고 했다. 이것에 그에게 있어서 세번째 행운이다. 그는 심장수술을 받았다. 목에 관을 박아 영양분을 섭취했다고 한다. 몸 여기저기에 관이 달린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이렇게 행운과 행운이 겹쳐서 그는 한달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5개월만에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마주 대하게 되었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는 죽음의 문터까지 갔다고 되돌아왔다. 일련의 과정을 들어보니 기적이 일어난 것 같다. 마치 그를 살리기 위하여 일련의 과정이 미리 준비된 듯 보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의 어머니가 불공드리는지 물어보았다. 전에 대화하다가 들어 본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을 줄 때마다 사무실로 찾아왔다. 일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세상 돌아 가는 이야기, 불교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의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신자인 것도 알았다. 그래서 평소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는지 물어본 것이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그의 어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불공드린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살아 남게 된 것에 대하여 어머니의 불공의 힘으로 돌렸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기도라는 말보다는 불공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불교에서 종종 기도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바른 말이 아니다.

 

기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기도라는 말은 유일신교에서 쓰는 말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 불교 고유의 용어인 불공(佛供)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렇게 본다면 관음기도 대신에 관음불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입시기도가 아니라 입시불공이 되어야 한다.

 

불공은 부처님전에 공양올린다는 말이다. 어떤 공양인가? 육법공양이라 하여 쌀, 초 등을 말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공양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공양일 것이다. 어떻게 따르는가? 그것은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D16.108)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최상의 공양(parama pūjā)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물질적 공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이고 최상의 공양임을 말한다.

 

공양을 뜻하는 뿌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물질적 공양(āmisa pūjā)이고 또 하나는 법공양(dhamma pūjā)이다. 이 중에서 법공양이 더 수승하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예배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정신적 예배가 더 수승하다.”(A2.159)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물질적 공양도 훌륭하지만 더 훌륭한 것은 법공양이다. 이는 가르침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주석에서는 최상의 공양에 대하여 자양을 여읜 공양(nirāmisa pūjā)’이라고 했다. 이는 자양을 여읜 공양이 나의 가르침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Smv.579)라고 설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물질적 공양만 있고 법공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축복경에서는 존경할 만한 님을 공경하니”(stn.259)라고 했다. 여기서 공경은 뿌자를 번역한 말이다. 지혜로운 자를 섬기고 존경하고 공양을 올리는 것이야말로 더없는축복임을 말한다.

 

초기경전에는 수많은 뿌자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한결같이 법공양의 중요성을 말한다. 물질적 공양을 하여 과보를 기대할 수도 있지만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야 가르침이 오래 전승될 것이다. 그래서 최상의 공양에 대하여 사부대중이 나를 공양하는 한, 나의 가르침은 천공에 있는보름달처럼 빛날 것이다.”(Smv.579)라고 했다.

 

기도보다는 공양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최상의 공양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일반 불교인들에게는 부처님의 힘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를 타력신앙으로 말할지 모르지만 부처님의 위신력이 자신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자야망갈라가타를 들 수 있다.

 

자야망갈라가타는 초기경전에 실려 있지 않다. 마치 천수경처럼 좋은 문구를 모아 놓은 것이다. 자야망갈라가타는 부처님의 여덟 가지 승리와 축복에 대한 게송을 모아 놓은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와서 오늘에 이르렀다.

 

자야망갈라가타는 오늘날 테라와다불교에서 수호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생일, 이사, 개업 등 특별한 날에 암송된다. 그것은 아마도 부처님의 위신력이 자신에게 임하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타인에게도 임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땅 떼자사 바와뚜 자야 망갈라니라는 후렴구가 게송마다 붙는다. 이는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와 행운이 그대에게 임하길 바라옵니다.”라는 뜻이다.

 

그는 살아서 돌아왔다. 5개월만에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어머니의 불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를 살려낸 것은 어쩌면 어머니의 불공의 힘었는지 모른다. 이를 네번째 행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는 매일 부처님의 위대한 힘으로 승리와 행운이 아들에게 임하길 바라옵니다.”라며 불공드렸는지 모른다.

 

 

2021-12-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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