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새벽 고요를 즐기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2. 12. 07:53
새벽 고요를 즐기며

지금 시각은 새벽 4시 12분, 편한자세로 스마트폰을 친다. 샘 솟는 생각을 흘려 보낼 수 없어서 붙잡고자 한다.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한다. 엄지 가는대로 쳐 보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성찰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타인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두 가지를 물어 본다. 이렇게 하니 질문하는 삶이 된다.

흔히 질문하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 대답 잘하는 삶보다 질문 잘하는 삶이 더 수승하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발전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요한 새벽이다. 왕복8차선 대로가 바로 옆에 있지만 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파트 이중유리창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홀로 깨어 있는 시간은 소중하다. 사람에게 치이다 보면 절절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 부처님은 팔고를 이야기 했다. 나에게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따른 괴로움(appiyehi sampayogo dukkha: 怨憎會苦)'(S56.11)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 같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람일수도 있고 사건일수도 있다. 또한 불선법일수도 있다.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일 때 괴롭다. 반복의 주기가 짧으면 더 괴롭다. 틈을 주지 않을 정도라면 지옥고가 될 것이다.

적멸위락이라는 말이 있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일어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고요한 새벽같은 상태 아닐까?

새벽은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다. 모두 잠들어 있을 때 홀로 깨어 고요를 즐긴다. 책도 보지 않는다. TV도 인터넷도 보지 않는다. 접촉하면 괴로움이 일어난다.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고요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만 지켜 본다. 거기에 지혜가 있다.

고요의 즐거움은 괴로움을 겪어 보아야 알 수 있다. 무간의 괴로움을 겪고 있을 때 잠시 휴지기가 있다. 비록 찰나지간일지라도 그 짦은 순간 고요를 맛보았다면 절절할 것이다. 그 간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물며 이렇게 새벽고요를 계속 즐긴다면 가히 적멸위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멸위락, 이 말은 무상게에서 마지막 구절에 해당되는 말이다. 빠알리어 "에상 뷰빠사모 수코( esaṃ vūpasamo sukho)"를 번역한 한자 사자성어이다. 여기서 핵심어는 뷰빠사모이다. 이 말은 뷰빠사마(vūpasama)의 형태로서 'relief; clamness; cessation'의 뜻이다. 안심, 고요, 멈춤의 뜻이다. 생멸을 멈추는 것이다. 오온의 생멸을 멈추는 것이다.

오온의 생멸이 일어나지 않을 때 이를 적멸(vūpasama)이라고 한다. 적멸의 상태는 다름아닌 열반의 상태를 말한다. 아라한에게 있어서 살아 있다면 유여열반이 되고, 죽는다면 무여열반이 될 것이다.

아라한에게도 오온의 생멸은 일어난다. 예를 들어 좋거나 싫은 느낌이 일어남을 말한다. 범부와 차이가 있다면 느낌이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 갈애는 무엇일까? 십이연기분석경을 보면 명백하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갈애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 즉 형상에 대한 갈애,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사실에 대한 갈애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갈애라고 한다."(S12.2)

육처에서 일어나는 것을 갈애라고 했다. 여기서 육처는 세상이 된다. 자신이 만든 감각의 세상이다.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괴로움을 겪는다. 갈애는 결국 괴로움을 유발하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이 있어서 괴롭다. 이 세상을 떠나면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만든 감각의 세상이다. 여섯 감역의 세상이다. 눈으로 형상을 인식했을 때도 세상이 발생되고, 귀로 소리를 들었을 때도 세상이 발생된다.

보기 싫은 것도 봐야 하고 듣기 싫은 것도 들어야 한다.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할 것이다. 유튜브에서는 알고리즘이 안내한다.

새벽에는 보기 싫은 것을 보지 않아서 좋다. 듣기 싫은 것을 듣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지 않는다. 잠이 깬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마음의 문을 제외한 다섯 가지 감각의 문을 닫아 놓았을 때 고요의 즐거움이 있다.

새벽에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 없다. 새벽에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사유하는 것이 더 낫다. 이렇게 엄지가는대로 치다보면 생각이 정리된다. 좋은 생각을 흘려 보내지 않고 붙잡아 두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수많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지만 보기 싫은 것도 접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여기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골로 간다.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격렬한 하루가 될 것이다. 저녁이 되면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신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언젠가 이길 날도 있을 것이다.

매번 패배하는 삶이다. 감각적 욕망에 굴복하는 삶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맞닥뜨렸을 때 괴롭다. 그럼에도 참고 견디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욕이다.

삶은 인욕바라밀과도 같다. 특히 재가의 삶이 그렇다. 싫다고 하여 훌쩍 떠날 수 없다. 출가자는 어느날 말없이 훌쩍 떠날 수 없지만 재가자는 감내해야 한다. 참고 견디는 삶이다. 재가의 삶은 인욕바라밀하는 것과 같다.

이제 6시가 다가 온다. 적멸을 즐기는 시간도 끝나간다. 오늘 하루도 격랑의 파도에 휩쓸릴 것이다. 접촉하는 순간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에스엔에스와 유튜브를 접했을 때도 파도를 탄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대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 하기 때문이다.”(Thag.501)

2021-12-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