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현실 도피할 것인가 현실 직시할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 23. 09:06

현실 도피할 것인가 현실 직시할 것인가?


시인은 답답해한다. 노시인에게서 불만과 불안을 본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걱정한다고 걱정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애만 탈 뿐이다. 낫에 잘린 갈대처럼 시들어 가는 것 같다.

때로 현실을 피하고 싶다.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자연인처럼 숨어 사는 것이다. 심산유곡에서 자급자족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있으면 헛일이다. 저자거리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현실도피하는 또하나 방법이다.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방법이 가장 유효하다. 멀리 도망갈 필요가 없다. 감각을 즐기는 순간 현실을 잊어버린다. 영화를 즐길 수도 있고 음악을 즐길 수도 있다. 먹는 것을 즐길 수도 있고 마시는 것을 즐길 수도 있다. 독서를 하는 등 지적행위를 즐길 수도 있다. 여행을 즐길수도 있다.

감각을 즐기면 현실을 잊어버린다. 가장 즉효약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근심걱정을 잊어버린다. 현실도피하는데 있어서 술 만한 것이 없다.

이 세상에 술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대혼란에 빠질지 모른다. 세상은 폭력이 난무하고 미친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다. 술이 있기에 어느 정도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아닐까?

알콜은 순기능도 있고 역기능도 있다. 알콜은 현실을 잊어버리는데 도움을 준다. 반면에 사람을 타락으로 이끈다. 왜 그런가? 술은 만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술 때문에 생겨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상당수 사람들은 술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오는 사람들 상당수 역시 술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에서는 술을 오계로 금하고 있다. 그래서 빠알리 오계를 보면 불음주계에 대해서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빠알리불음주계는 "술마시지말라"라는 정언명령이 아니다. 절대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삼간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불음주계를 지키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학습계율이라고 한다.

흔히 하는 말중에 학습효과라는 말이 있다. 학습에 의해서 하지 않게 됨을 말한다. 불음주계도 학습효과에 따른 것이다. 술을 마셨을 때 그 폐해에 대해서 절감했다면 학습효과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또 마시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학습계율(sikkhapada)은 평생에 걸쳐서 완성된다.

방송에서 이런 얘기 들은 적 있다.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오래 산 사람 못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것 같다. 주변에서 술로 사는 사람이 장수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술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사실이다. 술로 인해 오계를 어길 수 있음을 말한다.

술로 인해 살생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술로 인해 도둑질할 수 있다. 술기운으로 담을 넘어갈 수 있음을 말한다. 술로 인해 음행할 수 있다. 술기운에 여인을 겁탈할 수 있는 것이다. 술로 인해 거짓말할 수 있다. 이성이 마비됐을 때 양심불량이 될 수 있다.

술로 인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만다. 그래서 술은 만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경에서는 "방일의 근본이 되는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빠알리 오계에서 불음주계에 대하여 "수라 메라야 맛자 빠마닷타나 베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니(Sur
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방일의 근원'이라는 말은 빠마닷타나(pamādaṭṭhānā)를 말한다.

빠마다는 방일이고 압빠마다는 불방일이다. 압빠마다는 사띠와 동의어이다. 이렇게 본다면 술 마시는 행위는 사띠를 놓친 것이 된다. 사띠는 가르침에 대한 기억의 뜻이 있기 때문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빠마다는 술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방일의 근본이 되는 것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
디가자누여, 이와 같이 갖춘 재산에 네 가지 손실의 출구가 있습니다. 여자에 탐닉하는 것, 술에 취하는 것, 도박에 빠지는 것, 악한 벗을 사귀고 악한 친구를 사귀고 악한 동료를 사귀는 것입니다. 디가자누여, 커다란 호수에 네 입수구가 있고 네 배수구가 있는데, 사람이 입수구를 닫고 배수구를 열어 놓았고, 하늘이 소나기를 내린다면, 디가자누여, 그 커다란 호수는 반드시 낮아지고 높아지지 않습니다. 디가자누여, 이와 같이 갖춘 재산에 네 가지 손실의 출구가 입구가 있습니다.”(A8.54)

 


방일의 근본이 되는 것 네 가지는 여자, , 도박, 악우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는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술이 만악의 근원이다.

이 세상에 술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미친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술은 어느정도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에 기여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적당히 마셨을 때이다. 밥 먹을 때 반주로 한두잔 마시는 정도가 될 것이다.

술을 음식으로 마시면 문제없을 것이다. 문제는 절제하지 못했을 때이다. 술을 취하기 위해 마셨을 때 문제가 된다. 만악의 근원이 되는 순간이다. 방일의 근원이 되는 순간이다.

술은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현실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알콜에 의지한다. 취함으로 잊어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 도피처에 지나지 않는다. 술이 깼을 때는 더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또 현실에서 도망가고자 마신다. 그래서 알콜중독자가 된다.

술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더 센 것을 찾을지 모른다. 마약과 같은 약물을 말한다.

유튜브에서 마약도시를 보았다. 미국 켄싱톤에 있는 어느 거리는 마약자의 천국이 되었다. 그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놀랍게도 좀비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넋이 나간 자세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습이이다. 그런 자세로 가만 있는 것이다. 좀비영화의 모티브로 보인다.

언젠가 이런 글을 본적이 있다.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으로 죽은 자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정신이상자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평생 흐리멍덩하게 산 과보일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참으로 가혹한 과보로 생각된다. 그런 한편 이해되기도 한다. 방일하게 산 과보로 보는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 법문에서 들은 것이 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음주에 대한 것이다. 술을 마시면 집중에 방해된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술 마시는 것에 대해서 만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또한 술 마시는 것에 대해서 방일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술 마시는 것이 집중하는데 방해가 된다니! 참으로 놀랍고 신선한 말이다.

술 마신 상태에서는 집중할 수 없다. 취한 상태에서 좌선할 수 없는 것이다. 취한 상태에서 공부할 수 없다. 맥주 마시고 수학문제 풀 수 있을까? 술 마신 상태에서 일 할 수 없다. 점심 때 낮술 마시고 서류작업하면 집중이 될까?

언젠가 직장 다닐 때 낮술 마셨던 때가 있었다. 동료들과 반주로 마신 것이 과해서 취기가 돌았다. 오후 일과는 어떻게 됐을까? 취기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불음주계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려야할 것 같다. 음주가 방일의 근원이고 만악의 근원인 것은 맞다. 그러나 나에게는 집중을 방해하는 것이 된다. 취기가 있는 상태에서는 좌선도 할 수 없고 글을 쓸 수 없다. 당연히 업무하는데 집중되지 않는다. 육체노동하는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답답한 현실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근심걱정에 애만 탈 뿐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현실도피한다. 자연인처럼 숨어 버린다. 현실을 잊기 위해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에 몰두한다. 그 중에 하나가 술이다.

사람들은 술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도 매일 소주 한병씩 마신다. 술의 힘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친구에게 숱은 좋은 친구와도 같다. 그렇게 술로 일생을 보냈을 때 남는 것은 무었일까?

누군가 물었다. "왜 사십니까?"라고. 이에 "죽지못해 삽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죽지못해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하루하루 소주로 사는 사람도 해당될 것이다. 늘 취해 있을 때 현실도피가 될 것이다. 그런 상태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는다고 끝은 아니다. 이쪽방에서 문을 열고 저쪽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평생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살았을 때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다. 경에서는 "그 원리가 작용되는 대로"라고 표현되어 있다.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현실은 늘 불만이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현실도피해 보지만 또다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도망갈 데가 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떻게 직시해야 하는가? 부처님의 현실직시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수많은 현실직시의 가르침이 있다. 그 중에서 마음을 평정을 유지해 주는 가르침도 있다. 업의 가르침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임을 아는 것이다.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나는 내가 지은 업의 상속자이다. 그래서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누구도 예외 없다. 이렇게 업자성정견을 가지면 마음이 편해진다. 지금 악업을 짓는 사람을 보면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뿐이다. 그 업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미워할 필요가 없다.

사무량심에서 평정은 업자성정견에 대한 것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라고 반조했을 때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있다. 부처님의 현실직시 가르침이다.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정말 좋겠다. 그러나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인이 되거나 술을 마신다고 도망갈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부처님의 현실직시의 가르침을 접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현실 도피할 것인가 현실 직시할 것인가?

2022-01-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