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2. 2. 11. 09:09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나는 근본주의자일까? 확실히 그런 것 같다. 불교근본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불교근본주의는 나쁜 것일까?

근본주의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불교근주의는 부처님 원음에 충실하는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가르침, 변질되지 않은 가르침을 말한다. 그래서 '근본불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는 부정적이기 쉽다.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말이 연상된다. 더 센 것은 이슬람 원리주의이다.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을 특징으로 한다. 그럼 불교근본주의는?

아소까 비문이 있다. 비문에 "부처님의 담마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가져온다."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아소까 대왕은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천명했다. 전세계 각지에 담마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고자 했다. 그런 노력이 있어서인지 불교가 전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소까가 천명한 담마비자야(Dhammavijaya), 즉 담마에 의한 정복은 불교근본주의에 대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칼과 몽둥이에 의한 정복이 아니다. 담마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강조하면 할수록 평화와 행복이 따른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평화의 행복의 가르침이고, 불교는 평화의 행복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불교가 평화와 행복의 종교일까?

유튜브에서 '조현이 만난 사람들'을 보았다. 한겨레신문 조현 기자가 명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모아 놓은 것이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 이름 있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그들의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 중에 홍성남 신부가 있다.

홍성남 신부가 이런 말을 했다. 바이블에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이 있는데 생략된 문구가 있다고 했다. 어떤 문구일까? 그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홍성남 신부의 해석은 기독교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 니까야에 이미 실려 있는 내용이다. 예수보다 오백년 이상 앞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꼬살라상윳따에서 발견된다.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와 왕비 말리까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왕은 대뜸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S3.8)라고 물었다. 이에 지혜로운 왕비 말리까는대왕이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없습니다.”(S3.8)라고 말했다.

왕비는 왜 동문서답식으로 말했을까? 이는 너무도 당연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그 만큼 남도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왕비는 왕을 사랑한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되었다.

자신을 사랑하면 남도 사랑하게 되어 있다. 더 나아가 원한맺힌 자에게도 자애와 연민으로 대할 수 있다. 이것이 바이블에 있다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의 태도는 어떠할까? 자신에게 대했던 것처럼 남들에게도 그렇게 대할 것이다. 오계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오계에 불살생계가 있다. 이는 비폭력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살생하지 말라!"라는 말은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라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누가 폭력을 행사하는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가 남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마구 대한 것처럼 남에게도 꼭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 되면 자신도 수호되지 않고 남도 수호되지 않는다.

왜 오계를 지켜야 할까? 근본적 질문을 던져 본다. 단지 지켜야 할 것이기에 지켜야 하는 것일까? 법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 같다.

법을 지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지키는 것이 된다. 오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계를 지킨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것도 되지만 남도 지키는 것이 된다.

법을 어기면 처벌받는다. 법을 지키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것도 된다. 오계를 어기면 어떻게 될까? 법처럼 강제집행은 없다. 도덕적인 규범이기 때문이다. 그대신 양심의 가책은 있을 것이다. 또한 알려지면 창피함이 따를 것이다.

오계를 어기면 자신이 수호되지 않는다. 오계를 어긴 자는 남을 해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해치는 것이 된다. 법을 어기면 처벌받는 것과 같다. 오계를 어기면 자타가 수호되지 않는다.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자기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귀중한 존재로 여겼을 때 남도 귀중한 존재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곡예사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곡예사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대나무 곡예봉에 올라 나의 어깨 위에 서라.”(S47.19)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서는 "그대는 나를 수호하라. 나는 그대를 수호할 것이다.”(S47.19)라고 말했다. 이에 현명한 제자는 반론을 제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
스승님,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스승께서는 자신을 수호하십시오. 저는 저 자신을 수호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수호하면서, 곡예를 보여주고 관람료를 걷고, 안전하게 곡예봉에서 내려와야 합니다.”(S47.19)

 


제자는 스승과 반대로 말했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곡예에서 먼저 자신을 지키라는 것이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상대를 지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곡예 스승과 제자의 대화는 왕과 왕비의 대화와 같은 것이다. 왕이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라고 물었을 때, 왕비가 "대왕이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수행승들이여, ‘나는 나 자신을 수호할 것이다.’라며 새김의 토대를 닦아야 하고, ‘나는 남을 수호할 것이다.’라며 새김의 토대를 닦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을 수호하고 남을 수호함으로써 자신을 수호한다.”(S47.19)

수행을 하면 자신이 수호된다. 사띠를 하여 감각의 문이 수호되어서 나도 수호되고 동시에 남도 수호된다. 계율을 지키면 나도 수호되고 남도 수호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도 수호된다. (att
āna rakkhanto para rakkhati)”(S47.19)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자신이 잘 되고 보아야 한다. 자신의 수양이 있어야 남의 인격도 수호된다. 자신을 사랑한만큼 남도 사랑할 수 있다. 결국 자신을 지키는 것이 남도 지키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믿음을 갖추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알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창피함을 알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정진을 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지혜를 갖추는 한,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수행승에 대하여 이제 근심이 없다. 그 수행승은 자신의 수호자로서 더 이상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A5.7)

부처님은 '자신의 수호자'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빠알리어 '앗따굿따(attagutta)’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는 ‘self-guarded’이다. 자기자신은 자신이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수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계를 지켜야 한다. 좀더 근본적으로는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경에서는 다섯 가지를 말했다. 그것은 1)믿음(saddh
ā), 2)부끄러움(hiri), 3)창피함(ottappa), 4)정진(vīriya), 5)지혜(paññā)를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자들은 자신을 지키는 자들이다. 자신을 지킬 줄 알기에 남도 지킬 줄 안다. 자신을 사랑하기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남도 사랑할 줄 안다. 그래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2022-02-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