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세상이 나를 실망시켜도

담마다사 이병욱 2022. 2. 10. 07:56

세상이 나를 실망시켜도


고요한 새벽이다. 에스엔에스도 보지 않고 유튜브도 보지 않는다.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흘러 간다. 과거 쓰라렸던 기억도 흘러 간다. 모두 지난 일이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면 주가지수 등락에 희비 할 수 있을까? 내일 죽음을 맞이하는 자에게 보유한 주식이 10% 올랐다고 해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엇이 중요할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S4.9)

머리에 불 난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머리털에 불 나면 어떻게 될까? 당장 꺼야 할 것이다. 독화살을 맞은 것과 같다. 마치 시한부 인생과 같다.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음에도 욕망으로 분노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욕망에 매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욕망은 괴로움을 잊게 만든다. 그래서 악마는 "수행승이여,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걸식하십시오.”(S1.20)라며 유혹한다. 젊었을 때는 즐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수행은 늙어서 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이다.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다. 나만큼은 오래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험회사에서 말하는 기대수명 이상 살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만사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지금 집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부처님은 머리에 불난것처럼 살라고 했다. 불이 났으면 불을 꺼야 할 것이다. 탐욕의 불, 분노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불타고 있다. 세상은 탐욕의 불, 분노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온통 불타고 있다. 불타고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털에 불이 났으면 당장 꺼야 할 것이다. 세상에 불이 났으면 피해야 할 것이다. 마음의 불은 어떠할까?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그래서 니까야를 열어 보아야 한다.

니까야를 보고 수많은 글을 썼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 블로그에 저장해 둔 것이다. 요즘은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과거에 쓴 글은 데이터베이스 역할을 하고 있다. 스마트폰에서도 검색이 가능하다. 블로그 검색창에 키워드를 집어넣으면 경전 문구를 가져 올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위안을 얻는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해법을 찾는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경전을 펼치면 놀랍게도 해법이 들어 있다. 이것이 경전의 힘이다. 경전 하나만 있으면 형벌같은 삶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삶을 형벌같다고 본다. 왜 그런가? 삶이 괴롭기 때문이다. 물론 즐거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뿐이다. 즐거움은 언제 괴로움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아기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하는 것과 같다. 끊임없이 조건이 바뀌기 때문이다.

지금 즐겁다가도 전화 한통에 사색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을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괴로운 것이 맞다. 늙는 것도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다. 태어날 때 기억은 없고 죽음은 아직 닥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을 보면 알 수 있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나도 언젠가 최후를 맞이할 날이 있을 것이다.

시험 볼 때 후회하는 것이 있다. "내가 좀더 공부했더라면, 나에게 좀더 시간이 주어졌더라면"이라고 후회한다. 실제로 예비고사 볼 때 그런 후회의 마음이 간절하게 일어났었다. 일년만 더 재수하면 틀림없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시험 성적표는 자신에 대한 성적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생의 성적표는 어떠할까? 인생 육십을 살았다면 인생성적표가 있을 것이다. 나는 잘 산 것일까?

인생을 잘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즐기며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감각을 즐기며 살면 잘못 산 것이다. 욕망으로 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은퇴한 자에게 "이제 남은 여생 즐기며 사십시오."라고 말한다.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을 먹기도 하는 등 즐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이다.

이제까지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계속 감각을 즐기며 살라고 하는 것은 가혹하다. 왜 그런가? 감각을 즐기는 삶은 불선업 지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원을 해 주려거든 "오래오래 공덕지으며 사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살아왔다. 중죄를 지은 것이다. 왜 중죄인가? 천수경을 근거로 한다. 십악참회게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탐, , 치로 사는 것이 중죄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끊임없이 탐, , 치로 사는 것이 중죄임을 일깨워 준다. 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십악행에 대한 것이다. 마음으로 짓는 행위도 중죄가 되는 것이다.

인생의 대차대조표가 있다면 나의 인생은 어떠할까? , , 치로 산 세월이 많기 때문에 적자인생이기 쉽다. 공덕 지은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은 미미하다. 이대로 가면 악처에 떨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바람부는 대로 살아야 할까?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야 할까? 인생은 끊임없는 반복이다. 조금도 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욕망의 틀, 분노의 틀, 어리석음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아야 한다. 세상사람들이 탐, , 치로 살 때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한다. 그 전에 먼저 보시공덕, 지계공덕을 쌓아야 한다.

오늘 임종을 맞이한다면 후회스러운 일이 많을 것 같다. 마치 시험 보는 자가 후회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때 왜 좀더 베풀지 않았을까?"라며 후회할지 모른다. "그때 왜 잘해주지 못했을까?"라며 후회할지 모른다. 시간이 더 있다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느 세계에서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죽음이 두려운 자는 인생을 잘못 산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한평생 감각만 즐기며 산 자는 죽음이 두려울지 모른다. 해 놓은 것이 없는 것이다. 통장이 텅텅 빈 것과 같다. 마이너스 통장일수도 있다. 어떤 생각이 들까? 죽기 싫을 것이다.

죽기가 죽기보다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이너스 인생을 산 사람들이다. 세상의 흐름대로 탐, , 치로 산 사람들이다. 누가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감각대로 산 사람들이다. 바람부는 대로 인생을 산 사람들이다. 이득과 손실,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에 일희일비하며 산 사람들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안 것은 행운이다. 부처님의 담마를 몰랐다면 나도 지금까지 세상 흐름대로, 바람부는 대로 살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사십대 중반에 부처님 법을 만나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수많은 글을 썼다. 그리고 부처님의 수행법을 실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근기가 약해서인지 여의치 않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해 볼 생각이다. 이 생에서 못하면 다음 생을 위한 발판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어떤 일이든지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계적으로 성취된다. 마음공부도 이와 다르지 않다.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며 차츰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오늘도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세상이 나를 실망시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세상사에 휘말리지 않아야 한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라고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선업이든 악업이든 자신이 과보를 받는 것이다.


2022-02-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