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근불가원정치

양비론자와 양시론자를 냉소하며

담마다사 이병욱 2022. 2. 15. 14:44

양비론자와 양시론자를 냉소하며


전자계측장비 중에 스펙트럼아날라이저가 있다. 이를 우리말로 주파수분석기라고 한다. 전자제품 개발할 때 필수장비에 해당된다. 가격도 매우 고가이다. 특히 RF상품을 개발할 때 사용된다.

스펙트럼아날라이저는 일시에 전주파수대역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레디오프리퀀시(RF) 채널이 대역마다 뜬다. 낮은 주파수대역부터 높은 주파수대역까지 모두 다 볼 수 있다. 사람의 사상 스펙트럼도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요즘 이념 스펙트럼이라는 말이 종종 사용된다. 극좌에서 극우까지 이념 스펙트럼이 있는데 나는 어디에 해당될까?

어떤 이는 인물에 대한 이념 스펙트럼을 만들었다. 그가 과거 했던 발언을 참고하여 이념지도를 만든 것이다. 태극기를 들었다면 극우로 분류할 것이다. 극좌는 어떤 것일까? 나는 양비론자라고 본다.

양비론자의 특징이 있다. 이것도 잘못되었고 저것도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이 당도 싫고 저 당도 싫다고 말한다. 당연히 이 후보도 싫고 저 후보도 싫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장 나쁜 후보와 좀 덜 나쁜 후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편은 조폭 같다고 말하고 또 한편은 양아치 같다고 말한다.

극좌파를 믿지 못한다. 언젠가부터 신뢰가 무너졌다. 양비론만 말할 뿐 실천이 없다. 많이 배운 지식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을 2019년 서초동 촛불에서도 보지 못했고 여의도 촛불에서도 보지 못했다.

양비론자들은 냉소적이다. 모두 잘못되었다고 하니 그렇게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한편 양시론적이다. 누가 되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기득권층이기 때문일 것이다.

등 따습고 배부른 자들은 누가 되든 상관없을 것이다. 누가 되든 사회 시스템은 큰 변화없이 유지될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견고한 힘을 믿는 것이다. 선출직은 왔다가 가는 객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대체로 비판적이다. 아는 것이 많은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실천은 따르지 않는 것 같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극좌 지식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양비론과 함께 양시론을 말하는 지식인들은 한마디로 무책임한 자들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진보스펙트럼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있다면 보수적 스펙트럼은 있을 것이다. 누가 더 좌에 치우쳤는지 누가 더 우에 치우쳤는지로 가르는 것 같다.

진정한 진보라면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좀 더 좌측 스펙트럼으로 영역을 넓혀 가고자 하는 그룹이 있다. 그들은 현실의 벽을 인정하면서도 나름대로 영역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양비론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시에 양시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

지식인들의 이중적 태도는 그들의 전매특허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소수파이기 때문에 다수파들에 대해서 늘 냉소적이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냉소적 시각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데올로기에 올인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정치 하나뿐인 것 같다. 지지율에 일희일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것인지 모른다.

혼돈의 시대에 불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중도가 요청된다. 정치도 중도가 있을까? 충분히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서 중도는 연기법을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대표적으로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을 들 수 있다. 유무중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S12.15)라고 말씀하시면서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라고 했다. 유무중도, 고락중도, 단상중도 등 수많은 중도가 있다. 혐오와 비혐오에 대한 중도도 없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면 극단적으로 된다. 전부 아니면 전무이기 쉽다. 이런 태도는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당연히 혐오와 비혐오라는 극단도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불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 원한 맺힌 자가 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는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이 좋다. 부처님은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된다.” (A5.161)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원한 맺힌 자를 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A5.161) 라는 가르침이다.

원한 맺힌 자를 대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아사띠(asati)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깜마(kamma)에 대한 것이다. 전자는 그 사람에 대해서 신경 끄는 것이다. 후자는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 잘 실천해도 험한 세상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된다.

정치에 대해서는 불가근불가원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지나치게 빠지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무관심 한 것도 아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켜보는 것이다. 그래서 촛불을 들 때는 촛불을 든다.

우리사회에서 비난받아야 할 자들은 양비론자들이다. 대개 지식인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체로 지나치게 좌로 치우친 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말 만 있지 실천이 없는 사람들이다. 서초동이나 여의도에서 촛불 한번 들어 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아무리 양비론을 주장하지만 냉소적이다.

양시론자들은 양비론자들 만큼이나 비겁한 자들이다. 대개 등 따습고 배 부른 기득권층에 많다. 누가 되든 자신들의 지위와 재산에는 문제없다고 보는 것이다. 고액연봉자, 고액임대사업자, 고액연금수령자 등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지식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양극단은 피해야 한다. 그렇다고 제3의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운데 길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연기법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조건발생으로 본다. 일어날만 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 조건에 따라 발생되는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느 것도 천년만년 가지 않는다. 사라질 때는 조건없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단지 행위을 남기고 사라진다.

행위를 업이라고 한다. 조건발생하여 사라졌지만 그 행위만큼은 업의 형태로 남아 있다. 언젠가 조건이 맞으면 과보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A5.161)라고 했다. 또한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A5.161)라고 했다.

뿌린대로 거둔다. 악행악과이고 선행선과이다. 이것이 연기법이고 이것이 정견이다. 양극단을 여읜 중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것도 정치중도에 해당될 것이다.

양비론자들과 양시론자들은 배운 자들로 대체로 냉소적이다. 그리고 매우 비겁하다. 실천은 없고 주장만 있다. 주변에서 이와 같은 양비론자들과 양시론자들을 종종본다. 어쩌면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 보다 최악이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자애를 베풀고 연민을 베풀 뿐, 사귀지 말아야 하고 친하지 말아야 하고 섬기지 말아야 한다.” (A3.26)

2022-02-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