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권 담마의 거울 2013 IV
현재를 떠나서는 역사는 성립될 수 없다. 현재 기록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역사가 있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매일매일 기록하는 것도 역사가 될 것이다. 블로그에 매일매일 쓴 것도 역사가 될 수 있을까?
마흔아홉 번째 책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목차를 만들고 편집을 끝내 놓은 상태이다. 서문만 쓰면 된다. 지금 쓰는 것은 마흔아홉 번째 책의 서문이다. 책의 서문 역시 현재에 대한 기록이다.
책은 2013년에 있었던 일이다. 2013년 8월 15일부터 12월 27일까지 약 4개월 동안의 기록에 대한 것이다. 담마에 대해서 썼다. 초기불교 경전과 주석서에 근거한 글쓰기를 말한다. 모두 29개의 글로 434페이지 분량이다. 이를 ‘49 담마의 거울 2013 IV’로 정했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지금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어도
2. 시대의 사명을 다한 반야심경
3. 별똥별을 목격하고
4. 생각에 어떻게 실체성이 부여되는가?
5. 하루를 사나 백년을 사나
6. 나는 타오르는 불꽃 한 송이
7. 가짜열반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의 다섯 가지 유형
8.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9. 반복구문 뻬이얄라, 이대로 생략해도 좋은가?
10. 여인은 성냄으로 힘을 삼고
11. 정법(正法)만나기 어려운 이유
12. 사띠(sati) 간화선 보조 수단?
13. 부끄러운 자화상 호국불교
14. 팔경법(八敬法)이 성립한 이유
15.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 사자후(獅子吼)
16. 모두 전생에 지은 업보 때문이라고?
17. 여덟 가지 세간의 법과 여덟 가지 출세간의 법
18. 108번뇌와 108느낌은 어떻게 다른가
19. 쥐가 고양이를 먹었나, 고양이가 쥐를 먹었나?
20. 삼박자가 갖추어진 이 시대 최고의 법문
21. 순일스님의 법문을 듣고
22. 누구나 스님이 될 수 있어도 아무나 빅쿠가 될 수 없다
23. 재가자와 심출가(心出家)
24. 코끼리와 장님들
25. 대승불교의 깨달음과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어떻게 다른가?
26. 비난과 비방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27. 우주에서 안전지대는 어디인기?
28. 둑카(괴로움)를 기반으로 한 사성제
29. 음욕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목차의 글을 보면 교학과 교리에 대한 것이다. 블로그에 여러 카테고리가 있는데 담마의 거울이라 하여 별도의 분류체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교학과 교리에 대한 것을 한데 모아 놓았다.
목차 18번항을 보면 “쥐가 고양이를 먹었나, 고양이가 쥐를 먹었나?”(https://blog.daum.net/bolee591/16155709 , 2013-10-19)’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 글은 상윳따니까야 ‘고양이의 경’(S20.10)을 읽고서 느낌을 쓴 것이다.
부처님 당시 어느 수행승이 있었다. 어느 날 탁발 나갔는데 사띠를 하지 않아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한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S20.10)라고 표현되어 있다.
수행은 여인의 모습을 보자 번뇌에 휩싸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S20.10)라고 표현되어 있다. 어느 정도의 괴로움일까?
경에서는 고양이와 쥐의 비유를 들었다. 이는 “옛날에 한 고양이가 어린 쥐 한마리를 쫓아 하수도의 쓰레기 더미 위에 서서 ‘이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오면 그때 내가 그를 잡아먹어야지’ 라고 생각했다.”(S20.10)라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S20.10)라고 표현되어 있다.
고양이가 쥐를 뜯어먹은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쥐가 고양이를 뜯어먹을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에서는 한국빠알리성접협회(KPTS) 번역서와 정반대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를 보면 고양이와 쥐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다. 고양이 뱃속에 들어간 쥐가 고양이의 창자를 물어 뜯어서 고양이가 죽을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는 식으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상반된 번역을 보고서 블로그 글의 제목을 “쥐가 고양이를 먹었나, 고양이가 쥐를 먹었나?”라고 정한 것이다.
블로그 글에서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의 편을 들어서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에 오류가 있음을 증명하는 글을 썼다. 빠알리 원문까지 인용해 가며 고양이가 쥐를 먹은 것으로 쓴 것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했을 때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든지 기록해 둔다. 언젠가 어느 블로그 법우님으로부터 댓글을 받았다. 필명 진흙속의연꽃이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머리말에 나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통합본 상윳따가 있어서 열어 보았다. 전재성 선생의 머리말을 보니 놀랍게도 필명 진흙속의연꽃이 언급되어 있었다. 머리말에는 “그리고 이번에 통합개정판에서는 ‘진흙속의 연꽃 님’의 지적 ‘고양이의 경’의 우화에서 생쥐와 고양이의 위치가 역전되지 않았나 하는 점에 대해 검토한 결과 역자가 생물학적 관점을 정당화하려고 성급하게 번역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화적인 논리의 관점을 복원하고, 이전의 번역은 – 사실상 이전 번역은 오늘날 보면, 생물학적으로 더욱 명증적이기 때문에 – 빠알리어로 환원하여 퇴현 판본을 만들어 주석에 집어넣어서 이전의 번역도 함께 고려하도록 실었습니다.” (전집해제 32p, 통합본 상윳따니까야)라고 쓰여 있었다.
전재성 선생은 오역을 인정했다. 놀랍게도 내가 쓴 글을 보고서 오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고양이와 쥐의 관계에 대하여 생물학적 해석을 한 결과 고양이가 쥐를 먹은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빠알리원문을 보면 정반대로 쥐가 고양이를 먹은 것으로 되어 있다. 경에서는 신화적으로 설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번역자에게도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번역자의 판단에 따라 번역이 180도 바뀔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면식도 없는 블로그의 글을, 그것도 필명을 머리말에 언급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고서 “가문의 영광인가?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에 실린 ‘진흙속의연꽃’”(https://blog.daum.net/bolee591/16156246 , 2015-03-13)이라는 글을 남겼다.
일터에서 매일 글만 쓰는 블로그의 글도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으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일을 계기로 하여 전재성 선생을 찾아 뵈었다. 이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방문하고”(https://blog.daum.net/bolee591/16156895, 2016-03-20)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방문하던 그해 2016년 8월부터 니까야모임에 참석했다. 다음해인 2017년 2월부터 남양주 정혜사 주지 도현스님과 신도들과 함께 ‘금요니까야모임’이 만들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니까야독송모임에 참여한 이래 교정작업에도 참여했다. 2016년 가을 테라가타 교정을 시작으로 하여 테리가타, 통합본 앙굿따라니까야, 청정도론, 율장부기 교정작업에 참여했다. 지금은 자타카 교정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고양이의 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수행승이 사띠를 놓치면 죽을 정도의 괴로움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여인, 몸매가 드러나는 여인을 보고 욕정이 일어났을 때를 말한다. 이를 경에서는 쥐가 고양이 배속에 들어가 창자 등을 갉아먹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인에게 잘못이 있는 것일까?
경전을 근거로 하다 보니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예전에는 욕정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여인의 옷차림이나 몸매로 보았었다. 그러나 최근 접한 경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되어 있다. 이는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 (S1.34)라는 짤막한 게송으로 알 수 있다.
게송에서는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다”고 했다. 여인이 미니스커트를 입었다고 해서 욕정이 생겨났다고 말한다면 이는 상대방에게 잘못을 돌리는 것이 된다. 여인을 보고서 욕정이 일어난 것은 자신의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경에서는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다”라고 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난다. 의도가 있기 때문에 신체적 행위, 언어적 행위, 정신적 행위가 일어나는 것이다. 여인을 섹스의 대상으로 보았다면 정신이 오염된 것이다. 이전에 경험했던 기억이 결합하여 탐욕의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니까야에는 놀라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니까야를 접하면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기에 충분하다. 고양이의 경에서 탁발수행승은 여인을 보고 죽을 정도의 고통을 느꼈는데 이는 여인의 책임이 아니라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욕망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원인인가? 수행승들이여, 접촉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원인이다.”(A6.63)라고 했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접촉이 있어서 세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감각적 접촉이 없으면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염된 마음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S1.34)라고 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접촉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원인이다.”(A6.63)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여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오늘도 긴 길이의 서문을 썼다. 그런데 서문도 하나의 역사라는 것이다. 역사는 늘 현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나의 마흔아홉 번째 책의 서문이다.
2022-02-16
담마다사 이병욱
'책만들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권 진흙속의연꽃 2013 I (0) | 2022.03.23 |
---|---|
50권 불교명상음악 07-08 I (0) | 2022.02.23 |
48권 담마의 거울 2013 III (0) | 2022.02.11 |
47권 담마의 거울 2013 II (0) | 2022.02.10 |
46권 담마의 거울 2013 I (0) | 2022.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