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는 내가 몇 살인지 잘 모르겠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2. 2. 20. 11:12

나는 내가 몇 살인지 잘 모르겠다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사람의 성향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사람이 됐다'든가 '개과천선 했다'는 말은 거짓일 수 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외관에 있어서 차이가 날 것이다. 그것은 신체적 기능 저하로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테리가타 암바빨리 장로니의 19연 게송 중에 첫번째를 보면 다음과 같다.

"
검은 색으로 말벌의 색깔 같은
나의 모발은 끝이 말려있었으나,
늙어서 대마의 껍질과 같으니.
진리를 말하는 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Thig.252)

신체 중에서 모발에 대한 것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된다'는 말과 같이 형편없이 늙었음을 말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연시에서는 머리털을 시작으로 눈썹, 두 눈, 유방, 귓볼, 이빨, 목소리 등 신체적 열화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암바빨리 장로니는 늙어서 신체기능이 쇠퇴되었다. 그것도 형편없이, 볼품없이 되었다. 이럴 때 단지 옛날만을 추억하는 삶을 산다면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된다.

장로니는 과거 기녀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부처님 교단에 들어와서 사람이 달라졌다. 이전의 기녀가 아니라 아라한이 된 것이다. 쇠퇴된 몸과 기능 저하에 대한 한탄을 했다면 범부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라한에게는 자아의식이 없다. 자아가 눈곱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할 것이다. 무아의 성자에게 있어서 신체의 변화는 내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 게송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이 집적의 몸은 이와 같아졌다.
노쇠했고, 많은 고통의 주처로서
회반죽이 떨어진 낡은 집과 같아졌으니,
진리를 말하는 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Thig.271)

진리를 말하는 님은 틀림이 없다고 했다. 몸은 고통의 주처이고 또한 낡은 집과 같다고 했다. 이런 몸이 내것일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해 본다. 분명히 신체적 변화가 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기능저하가 눈에 띈다. 좀더 지나면 가속화될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몸의 변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설명한다.

1)
유아적 십년(0-10)
여리고 불안정한 아이

2)
유희적 십년(11-20)
그는 많은 유희를 즐긴다.

3)
미모적 십년(21-30)
그에게 미모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4)
체력적 십년(31-40)
힘과 기력이 크게 생겨난다.

5)
지혜적 십년(41-50)
그에게 지혜가 잘 확립되는데,
선천적으로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도 이 시기에 지혜가 조금이나마 생긴다.

6)
퇴행적 십년(51-60)
그에게 유희, 미모, 체력, 지혜가 퇴행한다.

7)
경사적 십년(61-70)
그에게 신체가 앞으로 기울어진다.

8)
타배(
駝背)적 십년(71-80)
그에게 신체가 쟁기처럼 굽어버린다.

9)
노망적 십년(81-90)
그는 몽매하게 되어 하는 것마다 망각한다.

10)
와상적 십년(91-100)
백세를 먹은 자는 대부분 누워서 지낸다. (Vism.20.51)

인생 백세를 십년 단위로 본 것이다. 나는 어디에 해당될까? 일곱 번째 단계이다. 이는 경사적 십년(61-70)으로서 "그에게 신체가 앞으로 기울어진다."라고 했다. 초반이어서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옛날 5세기 붓다고사 당시에는 그랬을지 모른다.

인생 팔십 줄이 되면 노망이 든다고 했다. 어느 정도 현실과 일치하는 것 같다. 인생 구십 줄이 되면 와상이라 하여 누워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것도 현실적으로 맞는 것 같다. 대개 요양원에서 누워 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한다. 몸은 비록 형편없이 늙어 버렸지만 마음만큼은 청춘이라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성향이 바뀌지 않음을 말한다. 한번 타고난 성향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요즘 자타카를 보고 있다. 교정작업하다 보니 낱낱이 읽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산문과 게송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법구경 게송 인연담과 유사하다. 현재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게송으로 마무리하는 식이다.

자타카에서 빠짐없이 나오는 말이 있다. 어느 인연담에서나 예외 없이 "지금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그러했다."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 사람의 현재를 보면 과거도 알 수 있음을 말한다.

자타카에는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보살이 과거 전생에 갖가지 모습의 중생으로 삶을 살았을 때 본 것이 있는데 현생에서도 보게 됨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신통력에 따른 것이다. 숙명통이 있어서 과거 생에 있었던 사건을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기억해 내는 것이다.

현생에서 나는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생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자카카를 보면 과거생에도 현생과 비슷한 성향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몸만 바꾸어 재생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의 과거생이 어떠했을 것인가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전생에서 탐욕으로 산 자는 현생에서도 탐욕으로 살기 쉽다. 전생에서 악행을 저지른 자는 현생에서도 악행을 저지르기 쉽다. 한번 형성된 성향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윤회할 때마다 같은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청정도론에서 몸의 변화 십단계를 보면 지혜가 성장하는 시기도 있다. 이는 다섯 번째 '지혜적 십년(41-50)'에 해당된다. 이 시기가 되면 "그에게 지혜가 잘 확립되는데, 선천적으로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도 이 시기에 지혜가 조금이나마 생긴다."라고 했다.

나이가 41-50세가 되면 지혜의 시기가 된다고 했다.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어떤 지혜일까? 아마도 삶의 지혜이기 쉽다. 몸으로 체득된 지혜를 말한다.

삶의 과정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면 어느 정도 지혜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지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설령 그가 무상함을 느꼈을지라도 자아에 기반한 무상이라면 작은 지혜에 대한 것이다.

인생 십단계를 보면 41-50세가 절정이다. 이후부터는 쇠퇴기 해당된다. 6단계 '퇴행적 십년(51-60)'에 대해서는 "그에게 유희, 미모, 체력, 지혜가 퇴행한다."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퇴행적 십년을 지나 일곱 번째 단계인 '경사적 십년(61-70)'에 들어섰다. 이 단계에 대해서는 "그에게 신체가 앞으로 기울어진다."라고 했다.

나는 신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는가? 나는 아니라고 부정할지 모르지만 남들이 볼 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몸이 전성기 때와 같지 않은 것이다. 신체가 위축되었을 때 앞으로 구부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은 앞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지혜도 쇠퇴한다. 지혜가 얕다면 다음 생은 기대할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한평생 감각적 욕망으로 살았다면 다음 생에서도 그렇게 살아 갈 것이다. 욕계 중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욕계를 떠나라고 했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염오, 이욕, 해탈을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 대해서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그렇다고 염세주의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병아리가 알 껍질를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

부처님을 최상자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보살이 태어 났을 때 이렇게 선언했다.

"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M123)

보살은 왜 이렇게 선언했을까? 앙굿따라니까야베란자의 경’(A8.11)을 보면 답이 나와 있다.

베란자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병아리 부화의 비유를 들고 있다. 어미 닭이 여러 개의 알을 낳아서 품지만 가장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손위라는 것이다. 그래서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나는 무명에 빠진 계란의 존재와 같은 뭇삶들을 위하여, 둘러싸인 무명의 껍질을 깨고 홀로 세상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고 원만히 깨달았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참으로 손위고 세상의 최상자입니다.”(A8.11) 라고 했다.

부처님이 최상자인 것은 최초로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도 똑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는 부처님의 병아리 부화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기 때문이다.

알을 낳는 데는 순서가 있다. 그러나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데는 순서가 없다.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온 것이 최상자가 된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이 최상자가 된다. 백세가 넘은 바라문이 있었지만 나이 어린 부처님이 최상자라고 선언한 것은 깨달음에 있어서는 최고의 어른이라는 것이다.

육체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지혜가 없으면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사미일지라도 깨달았다면 그를 장로라고 말 할 수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한번 형성된 성격은 평생간다. 그가 개과천선했다고는 하지만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언제 옛날로 되돌아 갈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의 성향은 전생에도 그랬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생에서도 비슷한 성향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생활의 지혜, 삶의 지혜는 작은 것이다. 설령 그가 노년에 이르러 인생무상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자아에 기반한 것이라면 작은 지혜에 지나지 않는다. 큰 지혜를 얻으려거든 자아를 내려 놓아야 한다.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netam mama, nesohamasmi, na meso attati.)"라고 해야 한다. 이것을 전재성 선생은 마법의 주문이라고 했다. 초기경전 도처에 실려 있는 부처님 말씀이다.

암바빨리 장로니는 자신의 늙은 몸을 바라보았다. 보통 늙은이라면 젊은 시절, 빛나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리워할지 모른다. 그러나 장로니는 거부했다. 장로니는 자신의 형편 없는 몸을 보면서 "진리를 말하는 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Thig.252)라고 했다. 무아의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본 것이다.

같은 인생무상이라 해도 자아로 보는 것과 무아로 보는 것은 다르다. 자아에 기반한 인생무상은 작은 지혜에 대한 것이고, 무아에 기반한 인생무상은 큰 지혜에 대한 것이다. 전자는 집착이 있어서 재생의 원인이 되고, 후자는 집착이 없어서 윤회가 끊어지는 원인이 된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 앞으로 구부러질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정신적인 나이는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겉모습만 늙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몇 살인지 잘 모르겠다. 청소년 시기인지 청년시기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마음은 젊다는 사실이다.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다. 머리는 백발인데 마음만큼은 청춘인 것이다. 이는 마음의 성장이 멈춘 것이나 다름없다. 청소년기 때 생각했던 것을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나이 먹은 것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어른이 될려면 아직 멀은 것 같다.


2022-02-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