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똑 같은 실수가 반복될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3. 3. 12:04

똑 같은 실수가 반복될 때

 

 

똑 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 마치 같은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는 것 같다. 왜 이런 실수가 반복되는 것일까? 아니 실수라기 보다는 습관이 맞을 듯하다. 못된 버릇을 말한다. 알코올중독과 같은 악습이 대표적이다.

 

금요니까야시간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2월 두 번째 모임 때 전재성 선생은 어느 알코올중독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에 말한 것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상윳따니까야가 출간되고 몇 해 지나지 않았을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알코올중독자였다. 알코올중독을 고쳐 보기 위해서 치료도 받아 보고 심지어 정신과 병원에 입원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고 한다.

 

알코올중독자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그는 상윳따니까야을 읽고 나서 술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고 한다. 그것은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라는 구절을 말한다.

 

한마디 말에 인생이 180도 바뀌는 경우가 있다. 부처님의 말씀도 그렇다. 부처님의 말씀 한마디에 인격적 변화가 일어나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경전에서 자주 목격된다. 범부에서 흐름에 든 성자가 되는 경우를 말한다.

 

알코올중독자는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에 실려 있는 경을 읽고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알코올 중독의 원인을 알 수 없었으나 경전을 통해서 전생에 기인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로 산 것은 이번 생만이 아님을 말한다.

 

지금 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자타카를 보면 하나의 정형구가 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지금 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그는 OOO이었다.”라는 정형구를 말한다. 그가 알코올중독자라면 그는 지금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알코올중독자였다.”가 될 것이다.

 

알코올중독자는 알코올중독이 현생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과거생에서도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도둑놈 기질을 가진 자는 과거생에 도둑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높고, 사기꾼은 전생에 사기꾼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알코올중독자는 결정적으로 어떻게 술을 끊을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1)라는 정형구를 들었다.

 

알코올중독자는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읽고서 알코올중독에서 해방되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 같지만 경전문구 하나에 인생이 180도 바뀐 것이다. 만약 상윳따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알코올에 빠져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중독에는 알코올만 있는 것일까?

 

20222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

 

20222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합송된 경이 있다.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에서는 수행자의 청정한 삶은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가?’라고 제목이 달려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성적교섭에 대한 경(Methunasutta)’(A7.50)을 말한다.

 

수행자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청정한 삶을 뜻하는 브라흐마짜리야 (brahmacariya)는 청정범행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라문 인생사주기에 있어서 범행기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범행기는 공부하는 학인의 시기이기도 해서 학습기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브라흐마짜리야는 학습기가 일생동안 연장된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번역서에서는 청정한 삶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청정한 삶은 순결한 삶과 의미가 같다는 것이다.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는 수행자라면 무소유와 무욕으로 살아야 하는데 성적행위는 방해되는 요소에 해당된다.

 

성접교섭을 하면 괴로움과 절망으로

 

경에서는 부처님과 바라문 자눗소니가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자눗소니는 성적교섭 없이 무려 48년 동안 청정한 삶을 살았다. 범행기가 일생동안 연장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청정한 삶을 산 자눗소니는 세존이신 수행자 고따마께서는 청정한 삶을 사는 자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A7.50)라며 따지듯이 물었다.

 

자눗소니는 일생동안 성적교섭 없이 살았다. 이에 반하여 부처님은 출가전에 세 개의 왕궁에서 무희들과 향락을 즐기면서 살았다. 자눗소니는 이런 사실을 들어서 부처님이 청정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바라문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가 완전히 청정한 삶을 선언하였음에도 여인과 함께 서로 교합할 뿐만 아니라 여인의 맛사지, 지압, 세욕, 안마를 즐기면, 그는 그것에 유혹되고 그것을 욕망하고 마침내 쾌락에 빠집니다.”(A7.50)

 

 

출가자는 청정한 삶을 선언한 자이다. 이는 이백 가지가 넘는 비구계나 비구니계를 보면 알 수 있다. 구족계를 받으면 그 순간부터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적행위를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이 파괴되고 균열되고 잡되고 더럽혀지고 때묻는 것입니다.”(A7.50)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계행의 파괴에 해당된다.

 

수행자의 성적교섭은 청정한 삶의 파괴일 뿐만 아니라 계행의 파괴에 해당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혹한 과보가 뒤따른다. 이는 부처님이그러한 삶을 통해서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불만,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A7.50)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수행자가 성접교섭을 하면 괴로움과 절망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했다. 경에 따르면, 여인으로 부터 맛사지, 지압, 세욕, 안마를 즐기는 것도 성적교섭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일곱 가지 성적교섭이 있는데

 

성적교섭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여인과 함께 서로 교합하는 것 (mātugāmena saddhi dvayadvayasamāpatti)”이라고 했다. 어떤 교합이 있을까? 경에서는 일곱 가지 교합을 설명해 놓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여인의 맛사지, 지압, 세욕, 안마를 즐기는 것

2) 여인과 함께 농담하고, 희롱하고, 유희하는 것

3) 여인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응시하는 것

4) 담장 너머나 성벽 너머 들려오는, 웃거나 이야기하거나 노래하거나 우는 여인의 소리를 듣는 것

5) 예전에 여인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유희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6)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갖추고 구비하고 즐기는 것

7) 어떤 신들의 무리가 되는 것을 서원하여 이러한 규범이나 금기나 고행이나 청정한 삶을 통해서 신이나 천상계의 한 존재가 되겠다.’라고 청정한 삶을 사는 것

 

일곱 가지 교합을 보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맛사지 받는 것도 성적교합에 해당된다는 것이 놀랍다. 더 놀라운 것은 여인과 농담하고 여인과 노는 것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소리를 듣는 것도 해당되고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척 놀라운 것은 신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청정한 삶을 사는 것도 성적교섭 중의 하나로 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수행자의 타락으로 보았다.

 

수행자는 성적접촉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 청정한 삶을 살아 천상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이는 수행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성적환상은 천상세계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천상세계에 태어나기를 서원하는 것은 성적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는 동기가 된다고 했다.

 

성적교섭에 빠진 수행자는 반승반속이나 다름없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시물은 가치가 없다. 여러 해 쌓인 분뇨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 화장터의 타다 남은 장작처럼 출가와 재가의 양자에서 소외된다.”(Vism.1.154)라고 했다.

 

반승반속은 출가도 아니고 재가도 아니다. 그래서 양자에서 소외된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이띠붓따까에서는 이와 같은 사람은 재가자로서의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수행의 목적도 성취할 수 없다.”(It.89-90)라고 했다.

 

차라리 독사뱀의 아가리에

 

청정도론에서는 일곱 가지 성적교섭의 굴레를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 ‘불더미의 비유에 대한 법문에서 설한 괴로움을 받는 자와 같다.”(Vism.1.154)라고 했다.

 

불더미의 비유에 대한 법문을 찾아보았다. 찾아보니 저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커다란 불더미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과,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족을 지닌 왕족의 소녀나 바라문의 소녀나 장자의 소녀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가?”(A7.72)라며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이는 감각적 욕망의 재난에 대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으로 여인과 접촉했을 때 죽을 정도의 고통을 맛볼 것이라고 했다. 더 괴로운 것은 몸이 파괴되어 죽을 때 악처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족을 지닌 왕족의 소녀나 바라문의 소녀나 장자의 소녀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보다, 저 연소하고 저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커다란 불더미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이 더 낫다.”(A7.72)라고 했다. 심지어 율장에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히려 맹독을 지닌 독사뱀의 아가리에 그대의 성기를 집어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집어넣지 말라.”(Vin.I,20)라고 했다.

 

부처님은 바라문 자눗소니의 질문에 일곱 가지 성적교섭에 대한 가르침으로 교화했다. 부처님이 출가전에 비록 세 개의 궁전에서 무희들과 감각적 쾌락의 삶을 살았지만 출가해서는 일체 성적교섭 없이 살았음을 말했다. 바라문처럼 청정한 삶을 산 것이다.

 

부처님은 청정한 삶이 완성되었을 때 자신이 완전하게 청정하게 되었음을 선언했다. 일곱 가지 성적교섭의 굴레가 자신 안에서 끊어버려진 것을 보았을 때 아라한선언을 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한번 맛보면

 

무엇이든지 중독되면 끊기가 힘들다. 알코올도 중독되면 자신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과거에도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생에 알코올 중독자로 산 자는 현생에서도 알코올 중독자로 살 가능성이 높다. 성적교섭에 대한 중독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한마디 말에 인생이 바뀌는 수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렇다. 어느 알코올 중독자는 상윳따니까야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구절을 보고 180도 인식 전환이 일어났다고 한다. 성적교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거 경험했던 것을 현생에도 경험한다. 이는 맛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디가니까야 27번 경을 보면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다.”(D27.7)라고 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혀 끝에 놓인 것만으로 칠천 개의 미각신경이 퍼져 나가 마음에 드는 상태가 되어 갈애가 생겨났다.”(Smv.865)라고 해설해 놓았다.

 

무엇이든지 한번 맛보면 빠져 들기 쉽다. 과거생에서 맛보았던 것이다. 알코올도 마찬가지이고 성적접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살아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자에게는 끊어야 할 것들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2022-03-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