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성(性) 정체성에 대하여
깨달은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32상으로 설명되어 있다. 외모로 표현된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은 사람은 성(性)이 있을까? 남성성이나 여성성과 같은 개념이 있는 것일까?
2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두 번째로 합송한 경이 있다. 이는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에서는 ‘여인의 여성성과 남성의 남성성을 뛰어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결박과 결박의 여읨에 대한 법문의 경(Saṃyogasutta)’(A7.51)라고 되어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명한 경
경에서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와 같은 경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명한 경이라고 했다. 초기경전에서만 볼 수 있는데 그것도 앙굿따라니까야에서만 볼 수 있는 경이라고 했다. 어떤 내용일까? 먼저 여성성에 대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인이 안으로 여인의 본성, 여인의 행동, 여인의 외관, 여인의 욕망, 여인의 소리, 여인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그녀는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한다. 그녀가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하여, 밖으로 남자의 본성, 남자의 행동, 남자의 외관, 남자의 교만, 남자의 욕망, 남자의 소리, 남자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그녀는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한다. 그녀는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하여, 밖으로 결박을 구한다. 그녀에게 결박을 조건으로 안락과 쾌락이 생겨나면, 그녀는 그것을 구한다. 수행승들이여, 여성성에 탐닉하는 뭇삶은 남자에게 결박된다. 이와 같은 여인은 여성성을 뛰어넘지 못한다.”(A7.51)
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있다. 이 문장은 남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인이나 여성성이라는 말 대신에 남자나 남성성이라는 말이 그대로 대입되어서 똑 같은 문장구조가 된다. 여인은 남자에게 향하고, 남자는 여인에게 향함을 말한다. 그로 인하여 서로 결박된다는 것이다.
여인은 왜 치장을 하는 것일까?
여인이 남자에게 결박되는 단계가 있다. 먼저 자신의 여성성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라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잡도리한다.”라고 번역했다. 이는 마나씨까라(manasikāra)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 ‘attention’ 또는 ‘mental advertence’의 뜻이다.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경에서는 “여인의 본성, 여인의 행동, 여인의 외관, 여인의 욕망, 여인의 소리, 여인의 치장”이라고 했다.
여인은 왜 치장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남에게 잘 보이게 하기 위한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화장을 하거나 옷을 잘 입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경을 보면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이를 여성성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여인의 본성, 여인의 행동, 여인의 외관, 여인의 욕망, 여인의 소리, 여인의 치장”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여인성은 여인의 상태(itthibhāva)를 의미하고, 여인의 행동은 여인의 행실 (itthikiriya)을 의미하고, 여인의 외관은 여인의 옷이나 드레스 (nivāsanapārupanadi)등을 말하고, 여인의 자만이란 여인의 자만과 교만 (mānavidha)을 말하고, 여인의 욕망이란 여인의 성향과 욕망(ajhasaya chanda)을 말하고, 여인의 치장은 장신구와 소유물을 말한다.”(Mrp.IV.32)
주석에서는 여섯 가지 여성성에 대하여 대상이 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여성성은 남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밖으로 남자의 본성, 남자의 행동, 남자의 외관, 남자의 교만, 남자의 욕망, 남자의 소리, 남자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A7.51)라고 했다. 정확하게 대극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여인이 화장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도 하는 것이긴 하지만 남성을 위해서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녀가 서로 끌리는 것은
여인은 남자에게 향하고, 남자는 여인에게 향하는 것은 본능이다. 욕계에서 양성이 있는 한 피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성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두 성이 결합해야만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수컷이 발정기가 되면 짝짓기가 이루어진다. 이는 본능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언제 어느 때나 짝짓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정기가 따로 없음을 말하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양성이 아무 때나 서로 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서로 끌리면 결박된다고 했다. 그래서 여인에 대하여“여성성에 탐닉하는 뭇삶은 남자에게 결박된다.”(A7.51)라고 했다. 반대로 남자에 대해서는 “남성성에 탐닉하는 뭇삶은 여인에게 결박된다.”(A7.51)라고 했다.
왜 남녀는 서로 끌리는 것일까? 여인의 경우 남성에 탐닉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여성성에 탐닉하기 때문이다. 이때 여인은 먼저 “여인의 본성, 여인의 행동, 여인의 외관, 여인의 욕망, 여인의 소리, 여인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느낌, 자각, 의식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정신활동이 일어납니다.”라고 설명했다. 안으로 정신활동을 기울인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성이 구별되었을까?
여자는 남자에게 끌리고 남자는 여자에게 끌린다. 이는 성이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이 구별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을 보면 “바쎗타여, 그 뭇삶들이 경작하지 않고서도 여무는 쌀을 먹으면서 그것을 먹거리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아 오랜 세월을 보낼수록, 바쎗타여, 그럴수록 더욱 더 그들의 몸은 거칠게 되어 아름답고 추한 것을 드러냈고, 여자에게는 여자의 특징이 나타나고 남자에게는 남자의 특징이 나타났다.”(D27.12)라고 했다.
여자와 남자의 특징이 나타난 것은 음식과 관련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음식에 대한 갈애를 드러내면 낼수록 몸이 갈수록 거칠어져서 여자의 특징과 남자의 특징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어땠을까?
남녀가 성을 갈리기 전에는 무성이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D30.5)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색계천상의 존재를 말한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들이다. 선정의 기쁨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당연히 내장기관도 없고 생식기도 없게 된다. 무성 또는 중성의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색계의 존재가 복과 수명이 다하면 아래 세계에 떨어진다. 경에 따르면 땅조각을 맛보면서 맛에 대한 갈애가 생겨났다고 한다. 맛에 대한 갈애는 결국 여자와 남자라는 존재의 특징을 만들어내게 된다.
여자의 특징과 남자의 특징이 생겨 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경에서는 “그러자 여자는 남자에게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었고 남자는 여자에게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었다.”(D27.12)라고 했다. 이 문장을 보면 앞서 언급된 앙굿따라니까야 ‘결박과 결박의 여읨에 대한 법문의 경(Saṃyogasutta)’(A7.51)을 보충설명해 주는 것 같다.
여자는 남자에게 몰두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몰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는“그들은 서로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탐애가 생겨났고 몸이 달아올랐다. 그들은 몸이 달아올라 성적교섭을 했다.”(D30.12)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성성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여성성을 추구한 결과 외부의 남성성에 속박된 것과 같다. 남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종착지는 성적교섭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성은 여성답게 남성은 남성답게?
부처님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반드시 대안을 제시한다. 여인이 지나치게 내부의 여성성을 강조했을 때 이는 대상이 남성에게 향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남성성에 속박되는 것이라고 했다.
여인은 여성성에도 남성성에도 속박되지 말아야 하다. 그래서“여성성에 탐닉하지 않는 뭇삶은 남자에게 결박되지 않는다.”(A7.51)라고 했다. 남자에 대해서는 “남성성에 탐닉하지 않는 뭇삶은 여인에게 결박되지 않는다.”(A7.51)라고 했다.
요즘 TV를 보면 경쟁적으로 아름다워지기 위한 경쟁을 조장하는 것 같다. 여인은 여성답게, 남성은 남성답게라는 구호를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사회에서도 각종 미용강좌가 열리는가 하면 헬스클럽에 다니는 것도 유행이다. 여성은 더욱 여성답게 만드는 것이고, 남성은 더욱 남성답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서로 상대 성에 대하여 열렬히 구애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 결과 상대방의 성에 결박된다고 했다.
깨달은 자의 성(性) 정체성은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S6.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흐름을 거슬러간다는 말은 ‘빠띠소따가미(paṭisotagāmī)’를 말하는데 한자어로 역류도(逆流道)라고 한다. 세상사람들이 세상의 흐름대로 탐, 진, 치로 사는 것에 대하여 이와는 달리 거꾸로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역류도는 여성성과 남성성에도 드러난다. 세상사람들이 여성은 여성답게 살고자 하고, 남성은 남성답게 살고자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여성성성이나 남성성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될까? 아마 여성과 남성의 성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독일의 어느 수도자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의 구별이 없을 때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답게 살면 남성성을 추구하는 것이 되고, 반대로 남성답게 살면 여성성을 추구하게 된다. 보통 세상사람들이 살아 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여성수행자가 화장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하는 등 미용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음을 말한다. 남성수행자라면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 같은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수행자들은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관세음보살을 예로 들었다.
관세음보살은 남성일까 여성일까? 겉으로 보아서는 남성처럼 보이나 보관을 쓰고 귀거리를 하고 속이 비치는 사리를 걸친 것으로 보아 여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무성 또는 중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부처님의 음마장상(陰馬藏相)
부처님의 성은 남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깨달은 자의 성에는 성의 구별이 없는 것과 같다. 전재성선생은 이에 대하여 “깨닫게 되면 남성성과 여성성이 없어져 버립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말한 근거는 무엇일까? 전재성 선생이 대담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 있다. 이는 ‘불교와 섹슈얼리티’라는 책을 말한다. 이 책에서 전재성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동정을 지키게 되면 남성도 성을 초월하고 여성도 성을 초월하는데,음마장은 오랫동안 성적행위를 멀리하면 남성과 여성을 초월한 존재의 특징으로 보인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음마장이란 남성의 성기를 의미하기 보다는 어떤 경지에 이르면 성을 초월하는 사람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불교와 섹슈얼리티 130-131쪽)
전재성 선생은 음마장상(陰馬藏相)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여기서 음마장은 부처님의 32가지 신체적 특징 중의 하나이다. 디가니까야 ‘위대한 사람의 특징의 경’(D30)을 보면 "위대한 사람들은 몸속에 감추어진 성기를 갖고 있다.(Puna ca paraṃ bhikkhave mahāpuriso kosohitavatthaguyho hoti.)”(D30) 라고 한다. 이를 음마장상이라고 한다;
음마장상은 말의 성기가 몸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위대한 사람들의 특징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그래서 깨닫게 되면 남성성도 여성성도 없게 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역류도의 길을 가는 수행자라면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류도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라고 했다.
역류도의 길을 가는 수행자라면 여성성에도 탐닉하지 말아야 하고 남성성에도 탐닉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여성은 여성답게”라든가, “남성은 남성답게”라는 말은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여성수행자는 여성성을 뛰어넘어야 하고, 남성수행자는 남성성을 뛰어 넘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자는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중성 또는 무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22-03-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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