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혈육일 것이다. 자신의 자식에 대하여 내아들 또는 내딸이라고 하는 것은 자식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런 자식이 사라졌다면 어떤 마음이 들어 갈까?
2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세 번째로 합송한 경은 난다마따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난다마따라는 재가의 여인이 아들을 잃었을 때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교재에서는 ‘재가의 여신도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난다마따의 경(Nandamātāsutta)’(A7.53)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 당시에 암송되었던 숫따니빠따
난다마따의 경은 꽤 긴 길이의 경이다. 경의 초반부에 하나의 경을 암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재가의 여자 신도인 벨루깐다끼야 난다마따가 날이 밝자 일어나 피안으로 가는 길을 암송하고 있었다.”(A7.53)라는 것을 말한다. 피안으로 가는 길은 숫따니빠따 제 5품에 해당된다.
숫따니빠따는 고층 경전에 속한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서도 재가나 출가에서 암송되었다고 한다. 특히 제4품 여덟 게송의 품과 제5품 피안가는 길의 품이 고층에 속해서 암송되었는데 사리뿟따 존자는‘닛데사’라는 주석까지 남겼다고 한다.
숫따니빠따 제5품 피안가는 길의 품은 매우 긴 길이의 품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것을 보니 무려 48페이지에 달한다. 모두 18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긴 길이의 경을 난다마따는 암송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에서 암송과 관련된 빠알리어는 ‘sarena bhāsati’이다. 여기서 ‘sara’는 ‘a sound’의 뜻이고, ‘bhāsati’는 ‘says; speaks’의 뜻이다. 그래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암송’의 뜻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독송’으로 번역했다.
암송(暗誦)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보지 않고 그대로 외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기 하기 전에 대단한 결심을 해야 한다. 실제로 경을 암송해 보아서 아는 것이다.
도저히 폭류를 건널 수 없을 때
파안가는 품은 16명의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학인 우빠씨바는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크나큰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없습니다.”(Stn.1069)라고 말했다.
우빠씨바는 폭류를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에 부처님은 “새김을 확립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을 자각하면서 나아가, ‘없다’에 의지해서 거센 흐름을 건너십시오.”(Stn.1070)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왜 ‘없다’에 의지해서 거센 흐름을 건너라고 했을까? 본문만 읽어 보아서는 알 수 없다. 이럴 때는 주석을 보아야 한다. 주석에 따르면 바라문은 무소유처정을 성취한 자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몰랐다. 이에 부처님은 무소유처정의 경지에서 더 나아가 무상(無常)을 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새김을 확립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을 자각하면서 나아가, ‘없다’에 의지해서 거센 흐름을 건너십시오.”(Stn.107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
학인 깝빠가 노사에 대하여 질문했다. 깝빠는 부처님에게 “거센 흐름이 크나큰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바다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 늙음과 죽음의 짓눌려 있는 자들에게 존자여, 섬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Stn.1092)라고 말했다.
깝바는 노사에 대하여 두려워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떠한 것도 없고, 집착 없는 것, 이것이 다름 아닌 피난처입니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노쇠와 죽음의 소멸인 것입니다.”(Stn.1094)라고 말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학인 깝빠가 노사의 공포에 대하여 질문했을 때 자신을 ‘섬(島)’으로 만들라고 했다. 그 섬은 다른 아닌 열반이다. 왜 그럴까?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섬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어떠한 것도 없어야 된다고 했다. 특히 집착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나함의 경지의 난다마따
난다마따는 재가의 여자 신도이지만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숫따니빠따 제5품 피안가는 품을 암송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암송에 그쳤던 것은 아니다. 실천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경에서 난다마따가 “저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낮은 단계의 결박이 있는데, 저는 그들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제 안에서 끊어버리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A7.5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난다마따는 아나함이었던 것이다.
아나함은 어떤 경지일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불환자의 경지라고 하는데 재가자로서는 올라 갈 수 있는 최상의 경지이다. 이 경지가 되면 출가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다음 단계는 아라한이기 때문이다.
아나함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푼 존재이다. 가장 핵심은 유신견이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는 견해가 타파된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난다마따가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어머니?
난다마따는 아들을 잃었다. 그것도 비극적으로 잃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저에게는 난다라는 하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왕들이 그를 어떤 원인인지 몰라도 끌고 가서 폭력으로 목숨을 빼앗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아들이 죽었을 때 난다마따는 어땠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들이 붙잡힐 때나 붙잡혀 있을 때나 포박되었을 때나 상처받을 때나 살해될 때나 살해되었을 때 저는 저의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A7.53)라고 되어 있다.
난다마따는 요즘말로 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어머니와 같다. 아들이 억울하게 죽었어도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를 알아 버린 난다마따는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뻭카사띠빠리숫디(upekkhāsatipārisuddhi: 捨念淸淨)
난다마따가 아들을 읽은 것에도 마음의 동요가 없고 죽은 남편이 야차가 되어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도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싸리뿟따 존자가 “그대는 일어난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습니다.”(A7.5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면 아들의 죽음도 남편의 죽음에도 초연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난다마따는 자신이 네 번째 선정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이 단계는 “원하는 대로 행복과 고통이 버려지고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번째 선정에 듭니다.”(A7.53)라고 설명된다.
네 번째 선정 단계의 핵심은 ‘평정하고 새김이 있는 청정함’이다. 이를 우뻭카사띠빠리숫디(upekkhāsatipārisuddhi)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이다. 늘 깨어 있고 청정해서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번뇌가 일어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아들이 죽었을 때나 남편이 야차가 되어서 나타났을 때 “저는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괴로움은 집착을 원인으로 해서
난다마따는 놀라운 사람이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 존자는 놀라운 일이고 예전에 없던 일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난다마따의 이런 평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경에 따르면 부처님 가르침을 암송하고 학습계율을 지키고 네 번째 선정의 단계에 도달한 아나함의 경지의 성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계, 정, 혜 삼학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숫따니빠따 제5품 피안가는 품을 암송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피안가는 품에 학인 멧따구가 질문한 것이 있다. 멧따꾸는 “이 세상에 있는 갖가지 괴로움이 있는데,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입니까?”라며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그것들은 집착을 원인으로 해서 일어납니다.”(Stn.1050)라고 답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것이 집착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한다. 여기서 집착은 우빠디(upādhi)를 말한다. 우빠디는 ‘존재의 토대(substratum of existence)’ 또는 '재생의 토대(substratum of re-birth)'라고 사전적 정의가 되어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집착’으로 번역했는데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네 가지로 종류로 설명된다. 그것은 오온(khandha), 감각적 욕망(kāma), 정신적 오염(kilesa), 업(kamma)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괴로움은 ‘집착을 원인으로 해서(upadhinidāna)’ 일어난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집착했을 때 괴로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은
숫따니빠따 ‘학인 멧따구의 질문에 경’(Sn.5.5)에서 부처님은 집착을 인연으로 해서 괴로움이 발생된다고 했다. 좀더 보충해 주는 설명이 ‘두 가지 관찰의 경’(Sn.3.12)에서 발견된다. 경에 따르면 우빠디니다나(upadhinidāna)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세상에서 갖가지 형태를 지닌 어떠한 괴로움이라도 집착을 원인으로 생겨난다. 참으로 알지 못하고 집착을 만들어 내는 어리석은 자는 되풀이해서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집착의 생성과 발생을 관찰하여 분명히 알아 집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Stn.728)
모든 괴로움은 집착 때문에 발생된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은 집착으로 살기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움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사람은 집착을 생멸을 본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집착의 생멸을 관찰할 수 있을까? 이는 수행으로 가능하다.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서 정신과 물질의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생겨난 것은 생겨날 만해서 생겨난 것이다. 두 손바닥을 부딪쳤을 때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라질 때는 조건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소리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슬픔이나 분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자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슬픔이나 분노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대상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럼에도 집착하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이는 슬픔이나 분노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슬픔이나 분노를 자아와 동일시했을 때 나의 슬픔, 나의 분노가 된다. 이렇게 슬픔이나 분노에 집착했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슬퍼한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분노한다고 해서 분노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Sn.3.8)을 보면 “비탄해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Stn.583)라고 했다.
이런 말이 있다. 이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겠네.”라는 말이다. 슬픔도 분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자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이는 슬픔에 집착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난다의 어머니 난다마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2022-03-1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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