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네 가지 분석적인 앎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2. 2. 24. 12:09

네 가지 분석적인 앎에 대하여

 

 

부처님의 담마는 심오하다. 담마가 쉬워 보이는 것도 있지만 고도로 사유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아마도 분석적인 앎(paisambhidā)’에 대한 것이라고 본다.

 

금요니까야 2월 첫번째 모임에서 합송한 네 번째의 경이 있다. 교재에는 분석적인 앎을 성취하기 위한 명상수행의 토대는 무엇인가?’라고 제목이 붙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분석적인 앎의 경1(Pahamapaisambhidāsutta)’(A7.38)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일곱 가지 원리를 갖추면, 수행승은 머지않아 네 가지 분석적인 앎을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할 것이다.”(A7.38)라고 했다. 먼저 일곱 가지 원리가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일곱 가지 원리란 무엇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자신의 마음이 위축되면 자신의 마음이 위축되었다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자신의 마음이 안으로 고착되면 자신의 마음이 안으로 고착되었다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자신의 마음이 밖으로 산란되면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이 밖으로 산란되었다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그에게는 느낌이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유지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지고, 지각이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유지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지고, 사유가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유지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지고, 그는 적당하거나 적당하지 않거나 열등하거나 수승하거나 어둡거나 밝은 대조적 측면에서 그 인상을 잘 파악하여 잘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잘 성찰하여 지혜로써 꿰뚫는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원리를 갖추면, 수행승은 머지않아 네 가지 분석적인 앎을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할 것이다.”(A7.38)

 

 

일곱 가지 조건은 위축, 고착, 산란, 느낌, 지각, 사유, 인상에 대한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위축은 마음이 활발하게 통찰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고착과 산란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고착은 해태와 혼침을 말하고, 산란은 오욕락에 의해서 흩어짐을 말한다.

 

느낌과 지각과 사유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유지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지고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식의 토대인 감관과 대상을 철저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파악해야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음을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지각도 그렇고 사유도 그렇다. 그렇게 했을 경우 대상에 대한 쾌불쾌와 호불호의 갈애가 일어나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는 항상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느낌이 생겨나면 생겨난다고 알아야 하고, 느낌이 유지되면 유지된다고 알아야 하고, 느낌이 사라지면 사라진다고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비디따(viditā)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전재성 선생은 비디따에 대하여 일어남과 동시에 자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느낌에 대한 것을 보면 “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 gacchanti”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느낌이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유지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지고라고 번역되어 있다. 일어남과 유지, 사라짐 앞에 모두 비디따가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느낌이 일어남과 동시에 자각할 수 있을까? 아마도 고도로 수행한 사람이 아니면 보기 힘들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고도의 집중력에 해당된다. 순간포착하여 그것이 일어나고 유지되고 사라짐을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일어남과 앎이 거의 동시적인 것이라고 했다. 발생과 동시에 파악하고, 유지와 동시에 파악하고, 소멸과 동시에 파악한다면 지혜를 통찰할 수 있다고 했다.

 

경에서는 일곱 가지 원리를 갖추면 네 가지 분석적인 앎을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할 것이다.”(A7.38)라고 했다. 여기서 분석적인 앎은 어떤 것일까? 경에서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다만 각주에 ‘A4.173’의 주해를 보라고 했다.

 

각주에서 지시한대로 따라가 보았다. 따라가 보니 앙굿따라니까야 분석적인 앎에 대한 경’(A4.173)이 그것이다. 경의 주석을 보니 네 가지 분석적인 앎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의미에 대한 분석적 앎: 결과에 대한 분석적인 앎

2)원리에 대한 분석적 앎: 원인에 대한 분석적인 앎

3)언어에 대한 분석적 앎: 의미와 원리를 서술하는 분석적인 앎

4)지식에 대한 분석적 앎: 앞의 세 가지 분석적인 앎의 지식에 대한 분석적인 앎

 

네 가지 분석적인 앎은 청정도론에 근거한 것이다. 청정도론 440페이지에 실려 있는 것이다. 찾아보니 제1421절부터 32절까지 6페이지에 걸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네 가지 분석적인 앎은 1번 의미에 대한 분석적 앎과 2번 원리에 대한 분석적 앎이 핵심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사성제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괴로움에 관한 앎은 의미에 대한 분석적 앎이다. 괴로움의 발생에 관한 앎은 원리에 대한 분석적 앎이다.”(Vism.14.24)

 

 

사성제에서 고성제와 집성제에 대한 것이다. 고성제에 대해서는 의미라고 했고, 집성제에 대해서는 원인이라고 했다. 집성제가 원인은 것은 이해가 간다. 고성제에 대해서는 왜 의미에 대한 것이라고 했을까?

 

사성제를 알면 진리를 꿰뚫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고성제에 대해서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성제가 결과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사성제에서 고성제와 집성제는 항상 쌍으로 같이 거론된다. 왜 그럴까?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기본적인 이지(二支) 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집성제는 원인이고, 고성제는 결과가 된다.

 

사성제에서 왜 고성제가 앞에 나왔을까? 인과로 따진다면 원인인 집성제가 먼저 나오고 결과인 고성제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사성제에서는 반대로 되어 있다. 고성제가 먼저 나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성제에서 고성제가 먼저 나온 것은 먼저 괴로움에 대하여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S56.11)을 보면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고성제를 앞세웠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사고와 팔고를 설했다.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괴로움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고 하여, 이것을 괴로움이라고 했다.

 

괴로움은 원인과 결과에 있어서 결과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고성제를 먼저 설한 것은 우리가 괴로운 존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른다면 인생은 즐거운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는 결과를 뜻하는 의미에 대한 분석적 앎과 원인을 뜻하는 원리에 대한 분석적 앎에 대하여 좀더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어떠한 사실이 태어나고 생겨나고 발생하고 생성하고 성립하고 현현하는 것들 것 있다면, 그러한 것들에 대한 앎이 의미에 대한 분석적 앎이다. 어떠한 사실에서 그러한 사실이 태어나고 생겨나고 발생하고 생성하고 성립하고 현현하는 것들 것 있다면, 그러한 것들에 대한 앎이 원리에 대한 분석적 앎이다.”(Vism.14.24)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이는 십이연기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조건 발생하여 결과로 나타났을 때 이는 의미에 대한 분석적인 앎으로 파악해야 하고, 결과의 원인에 대한 것은 원리에 대한 분석적인 앎으로 파악해야 한다.

 

사성제는 가장 간단한 이지연기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원인과 결과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고성제와 집성제의 관계에서는 고성제가 결과가 되고 집성제는 원인이 된다. 멸성제와 도성제의 관계에서는 멸성제가 결과가 되고 도성제가 원인이 된다.

 

괴로움이 발생했을 때 먼저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을 먼저 파악하는 것보다 먼저 괴로움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할 때 결과에 해당되는 고성제를 먼저 설한 것은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Ida dukkha ariyasaccanti)”(S56.11)라 하여 괴로움을 절절히 알라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에 대해서 철저하게 알았을 때 그 다음 단계는 괴로움이 왜 발생되었는지 아는 것이다. 이것이 집성제로서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 Ida dukkhasamudayo ariyasaccanti)”(S56.11)라고 아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사성제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철견 하면 나머지 것들 도 관통된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벗들이여, 저는 그것에 대해 이와 같이

벗들이여,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S56.30)라고 했다. 고성제를 철견 하면 나머지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도 관통할 수 있음을 말한다. 집성제를 철견 하면 나머지 것들도 관통된다. 멸성제와 도성제도 마찬가지이다.

 

네 가지 분석적인 앎은 여러 가지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경전을 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청정도론에서는 경전 보는 것에 대하여 의미에 대한 분석적인 앎과 원리에 대한 분석적인 앎으로 설명해 놓았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 수행승이 경-응송-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전생담-미중유법-교리문답과 같은 가르침을 안다면, 이것을 원리에 대한 분석적인 앎이라고 한다. 그가 이러이러하게 설한 것의 의미를 이것이 그 설한 것의 의미이다. 이것이 그 설한 것의 의미이다.’라고 알면, 그것은 의미에 대한 분석적인 앎의 지혜라고 한다.”(Vism.14.24)

 

 

경전을 볼 때 단지 이해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는 원리만 아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를 원리에 대한 분석적인 앎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설한 것에 대한 의미를 안다면 이를 의미에 대한 분석적인 앎의 지혜라고 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할 때 가장 먼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고성제를 먼저 설했다. 원인과 결과에 있어서 결과를 먼저 설한 것이다. 이는 의미의 분석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전을 읽을 때 단지 읽고 그친다든가 이해하는 차원에 그친다면 이는 원리만 아는 것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가르침을 아는 것은 원리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원리에 대한 분석적인 앎이라고 한다. 원리를 알았다면 그 다음은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의미를 파악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조건발생한 사실을 알았다는 말과 같다. 이에 대하여 의미에 대한 분석적인 앎이라고 했다.

 

원리에 대한 분석적인 앎과 의미에 대한 분석적인 앎은 모두 언어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를 언어에 대한 분석적인 앎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여법한 언어를 다루는 문법에 맞는 언어와 예외가 없는 관행적 언표가 있다.”(Vism.14.2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문법에 맞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또한 문법에 맞는 표현이 아닌 것을 알아함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지식에 대한 분석적인 앎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앎들에 대한 앎”(Vism.14.26)이라고 표현했다. 이에 대하여 앞의 세 가지 분석적인 앎의 지식에 대한 분석적인 앎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한편 매우 심오한 가르침도 있다. 이런 가르침은 전승된 경전과 주석서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설령 보았다고 하더라도 내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단지 읽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 두고 싶은 문구가 있으면 새겨 두어야 한다.

 

요즘 경 외우기를 하고 있다. 현재 빠다나경을 외우고 있는 중이다. 모두 25개 게송 중에 10개를 외웠다. 빠알리 게송을 한구절 한구절 음미하며 외운다. 이는 뜻도 모르고 다라니를 외우는 것과 다르다. 단어와 구절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고 외우면 외우는 맛이 난다. 이런 것도 의미에 대한 분석적인 앎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22-02-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