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오늘 내가 지금 여기 있게 된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2. 17. 08:29

오늘 내가 지금 여기 있게 된 것은


자타카를 보고 있다. 1권은 사무실에서 보고 있고 2권은 집에서 보고 있다. 6권 중에 두 권을 교정보고 있다.

한달 이내에 다 보아야 한다. 그러나 2주 이내에 다 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보고 있다. 빨간 볼펜과 노랑 형광 메모리펜을 이용한다.

 


생각보다 오자와 탈자가 많다. 일차 교정을 마쳤음에도 종종 발견된다. 빨간 볼펜으로 표시하고 바른 글자를 써넣는다. 노랑 형광메모리펜을 활용하는 것은 오랜 습관이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에 칠을 해 둔다.

 


자타카는 이번에 최초로 완역된 것이다. 일본 남전대장경 것을 중역한 것이 있다고는 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류가 있는 체로 번역된 것도 있고 의미가 불분명한 것도 있다고 한다. 중역된 번역의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직역은 다르다.

빠알리 원문과 주석을 직역한 자타카를 접하고 있다. 번역자와 일차교정자에 이에 세 번째일 것이다. 보면 볼수록 참으로 놀라운 경전이다.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신심에 대한 것이 그렇다.

니까야를 근거로 하여 2006년 이후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시중에 번역되어 있는 모든 니까야를 구입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것과 초기불전연구원 것이 그것이다. 사부니까야는 두 곳에서 완역되었다. 율장 5권과 소부경전 다수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만 번역되어 있다.

주로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서를 근거로 하여 글쓰기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초기불전연구원 것을 더 참고하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아마 홍보가 잘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승단에서 승가대학 교재로 활용하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이러다 보니 유튜브 등에서 초기불전연구원 것을 인용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두 종류의 번역서를 모두 갖추어 놓았다. 글을 쓸 때 두 종류를 비교해 본다. 확실히 차이가 있다. 우리 속담에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안다."라고 했는데 딱 맞는 것 같다.

훌륭한 번역의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번역자의 자질과 역량에 달려 있다. 구체적으로 언어학적 소양과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여기에 수행력까지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절에 산다고 해서 다 도를 이루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근기를 타고 나야 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도 인정한 것이다.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하나의 게송이 있다.

"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S1.23)

이 게송은 청정도론 오프닝 테마곡과 같다. 청정도론 처음과 끝을 장식하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왜 이 게송을 중시했을까? 그것은 첫구절에 있는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는 말 때문이다. 여기서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지혜를 갖춘 사람은 빠알리어로 '나로 사빤냐(naro sapañña)’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빠알리어 사빤냐(sapañña)는 한역으로 유지혜자(
有智慧者) 또는 구유지혜자(具有智慧者)를 말한다. 지혜를 구족했다는 것은 다름 아닌생이지자(生而知者)’를 말한다. 타고날 때부터 지혜를 갖춘 자이다. 이런 자가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S1.23)라고 한 것이다.

지혜구족자가 이번 생에서도 계속 수행할 수 있다. 전생에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한 공덕으로 이번 생에서 유지혜자로 태어나 계속 수행의 길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구족자는 계행을 지키기도 쉽고 선정에 들기도 쉽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얼굴은 왜 각기 다를까? 또한 사람들의 성향은 다 제각각일까? 부모에게서 태어 났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귀하거나 천하게 태어나는 것, 그리고 유능력자로 태어나거나 무능력자로 태어나는 것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전생과 윤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부모에게 태어났으니 부모 탓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부모 탓만은 아닐 것이다. 알 수 없는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생에 살았던 것이 현생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타고난 자가 있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우월한 자는 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만 해도 축복받을 일이다. 그런데 무탐, 무진, 무치를 원인으로 해서 유구족지혜자로 태어났다면 전생에 한수행 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도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S1.23)라고 말씀했을 것이다.

번역자도 자질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언어학적 소양과 인문학적 소양을 말한다. 이런 점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전재성 선생의 번역은 탁월하다.

전재성 선생은 7개 국어가 가능하다. 번역할 때 7개 국어로 된 경전을 일일이 대조하며 한줄한줄 번역한다고 했다. 7개 국어는 무엇일까? 한국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 티벳어, 빠알리어, 산스크리트어라고 본다.

전재성 선생은 특히 독일어에 강하다. 젊은 시절 독일에서 유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고 쓰기 말하기가 가능하다. 그런데 독일은 니까야 번역이 가장 활발한 곳이라고 한다. 이미 백년전에 니까야가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세계적인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쓴 데미안이 있다. 데미안을 보면 '병아리 부화 비유'가 있다. 이는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구절을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구절은 맛지마니까야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M16)을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니까야를 읽은 것이 도움되었을 것이다. 작가가 청년시절 동양학자인 삼촌 집을 방문 했을 때 서가에 꼽혀 있는 불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맛지마니까야가 독역된 것은 1902년의 일이다. 칼 오이겐 노이만이 번역한 것이다. 데미안은 1916년에 출간되었다. 이처럼 독일은 니까야 번역에 있어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 선생은 타언어 번역서보다 독일어 번역서를 더 중시하는 것 같다.

번역자의 자질과 소양에 따라 번역에 차이가 난다. 단지 기존 번역을 그대로 중역한 것이라면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나 여러 언어로 된 판본을 한구절 한구절 대조하며 빠알리 원문을 직역했다면 번역이 살아 있는 것 같다. 전재성 선생의 번역에서 그런 맛을 느낄 수 있다.

니까야를 본지 10년 넘었다.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소부의 여러 경전도 대부분 읽어 보았다. 특히 교정작업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읽어 보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위해서도 읽어 본다. 읽을 때마다 중요부위는 형광메모리칠을 하거나 포스트잇을 붙여 놓는다. 그러다 보니 10년 된 것은 너덜너덜할 정도가 되었다.

니까야를 볼 때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기 때문에 비교해 가며 읽는다. 확실히 차이를 느낀다. 번역자의 자질과 역량이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언어학적 소양과 인문학적 소양이 결정적이다. 이는 게송 번역을 비교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

현재 자타카 교정 작업 중에 있다. 이제까지 접했던 니까야와는 다른 맛이다. 그것은 신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1권에서 수메다 존자가 디빵까라 부처님 발 아래 엎드려 서원하는 장면은 대서사시를 보는 것 같고 위대한 영웅담을 보는 것 같다.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서원을 한 이래 4아승지하고도 10만겁 동안 10바라밀을 닦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라밀을 보면 최상의 승의적 바라밀은 목숨까지 내던진다는 것이다.

보살은 여러 생에 걸쳐서 인간이나 천신, 축생 등 다양한 존재로 태어났다. 모두 보살도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데 어떤 존재로 태어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다시 재생하기 때문이다. 죽으면 다시 어떤 존재로든지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하나의 보살도를 이루기 위한 바라밀공덕 수행과정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토끼로 태어 났을 때는 불구덩이 뛰어 들어 스스로 먹이가 되는 것이 가능한 이유라고 본다.

자타카는 놀라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아직까지 한번도 접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와 같이 불교가 국교나 다름없는 나라에서는 여러 경전이 있지만 자타카가 가장 인기 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반불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인기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미안마에서 사는 어느 한국스님은 미얀마 말을 배워서 자타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불사를 발원했다. 어느 해인가 스님이 나의 블로그 댓글에 남긴 것으로 안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몇 달 지나면 자타카가 출간될 것이다. 한국불자들도 미얀마 불자들처럼 자타카를 읽고 신심이 충만될 지 모른다.

자타카에는 정형화된 반복적 표현이 있다. 예를 들어서 "수행승들이여, 이 자는 지금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사기꾼이었다."(236. 두루미의 전생이야기)와 같은 표현이다. 이 말은 어떤 뜻일까? 과거의 패턴이 현생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나의 행태는 미래생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각 에피소드마다 공통적으로 "업보에 따라 세상을 떠났다."라는 표현이 있다.

오늘 내가 지금 여기 있게 된 것은 과거 나의 업보에 따른 것이다. 알 수 없는 과거생에서 행위가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다. 과거 생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현재 생에서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에 있는 오프닝 테마 게송에 실려 있는 "나로 사빤냐(유구족지혜자)"도 그런 것이라고 본다.


2022-02-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