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구근류 식물이 있다. 알뿌리가 있는 식물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히야신스도 그 중의 하나이다.
아내가 히야신스를 사왔다. 전에 없던 일이다. 거실에 녹색식물은 여러 종류 있지만 꽃은 거의 없다. 봄이 되어서일까 구근류 히야신스를 네 개 사왔다.
히야신스의 생장속도는 빠르다. 사온지 며칠만에 꽃대가 나왔다. 다음날 보니 “쑤욱” 올라와 있다. 성장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이다. 이제 꽃이 활짝 피었다. 꽃의 무게가 있어서 젓가락 등으로 받침을 해 주었다.
집안에 꽃이 있으니 화사하다. 또한 향기가 진하다. 히야신스향이 마치 라일락향 같다. 밀폐된 공간에 향이 풍기니 향이 지나쳐 거부감이 들정도이다.
뉴스 없는 삶이 열흘 되었다. 그날 이후 삶이 바뀌었다. 정치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어제 점심 때 순대국집에 들어 갔다가 나와버렸다. TV에서 평론가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지 않으니 소소한 것에 관심을 두게 된다. 식물에 대하여 관심 보이는 것도 그 중의 하나가 된다. 식물키우는 재미를 말한다. 식물이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도 행복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것을 소확행이라 할 것이다.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 유행한 말이다. 갓 구은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이라고 사전적 정의가 되어 있다.
정치는 거대한 담론이다. 또한 정치는 거대한 공론장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 몇 개월 정치에 깊이 빠져 있었다. 선거때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에 대한 행복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다.
무엇이든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다.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낙담하게 된다. 자식도 내뜻대로 되어야 하고, 아내도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돈도 내뜻대로 벌려야 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내뜻대로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내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내뜻대로 되지 않아 분노가 일어난다. 내뜻대로 되지 않아 번뇌가 생겨난다. 모든 번뇌의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다. 세상이 내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며 오온에 대하여 갈애와 자만과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 세상을 내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관찰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현상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하여 방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방관자가 아니라 관찰자가 되고자 한다. 어떤 관찰인가? 생멸현상에 대한 관찰이다. 결국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말 것을 세상사람들은 집착한다.
자신은 물론 가족, 그리고 공동체가 잘 되기를 바란다. 당연히 나라도 잘 되기를 바란다.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세상은 늘 바람대로 되지는 않는다. 세상이 잘못된 길로 가게 되면 바로잡아야 한다. 촛불을 들 때는 촛불을 드는 것이다.
지금은 뉴스를 보지 않아야 될 때이다. 상당히 오래 갈 것 같다. 뉴스를 보지 않고 열흘이 되니 살 만하다. 정치로 인한 번뇌가 없어진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의도적으로 피함으로써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사나운 코끼리를 피하고 사나운 말을 피하고 사나운 소를 피하고 사나운 개를 피하고 뱀, 말뚝, 가시덤불, 갱도, 절벽, 웅덩이, 늪지를 피한다. 그리고 총명한 길벗은 앉기에 적당하지 않은 자리에 앉고, 가기에 적당하지 않은 장소로 가고, 사귀기에 적당하지 않은 악한 친구와 사귀면 악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에, 성찰하여 그러한 적당하지 않은 자리, 그러한 적당하지 않은 장소, 그러한 악한 친구를 피한다. 수행승들이여, 피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피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을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라고 한다.”(M2)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일곱가지 방법으로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①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②수호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③수용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④인내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⑤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⑥제거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⑦수행에 의해서 사라지는 번뇌가 있다.”(M2)라고 했다.
번뇌를 끊는 일곱 가지 방법 중의 하나가 다섯 번째인 “⑤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 번뇌를 야기하는 대상을 피하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사귀기에 적당하지 않은 악한 친구”일 것이다.
사람으로 인한 번뇌가 크다. 그래서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그 사람 보기 싫어서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그 사람을 보았을 때 분노가 일어났다면 그 사람을 피하는 것이 좋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법우님은 봉사활동을 했는데 어떤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피해서 다른 요일에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런 것도 피함으로써 끊어지는 번뇌에 해당될 것이다.
뉴스를 보지 않는다. 그 좋아하던 유튜브도 보지 않는다. 정치관련 뉴스는 일체 보지 않는다.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조차 싫어서 식당을 나와 버렸을 정도이다. 이쯤 되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뉴스를 보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다. 이것도 ‘피함으로써 끊어지는 번뇌’에 해당될 것이다.
갈 길이 멀다. 나이는 육십이 넘었다. 정치와 같은 이야기에 분노하고 걱정할 시간이 없다. 촛불을 들어야 할 때는 들고 한표를 행사할 때는 행사해야 하지만 뉴스 기사에 빠졌을 때 번뇌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일방적 주의나 주장에 따라가다 보면 시간이 빼앗겨 버린다.
“오늘이야말로 나는 출가하겠다.
내일 죽을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까마귀처럼 어리석게
애욕의 손아귀에 놓이지 않으리.”(Jat.529)
자타카 529번 쏘나까의 전생이야기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보살이 전생에 왕으로 살았을 때 왕위를 그만 두고 출가하고자 할 때 게송으로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구절은 “내일 죽을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말이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이는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음을 말한다. 그가 젊을 때 죽을 수도 있고 늙었을 때 죽을 수도 있다. 왜 그런가? 업대로 살기 때문이다. 이전에 행한 업이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 죽을지 누가 알겠는가?(ko jañña maraṇaṃ suve)”(Jat.529)라고 했을 것이다.
내일 죽을 수 있다면 마음이 급해진다. 오늘밖에 시간이 없는 것이다. 오늘만 있다면 오늘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진실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살은 이를 출가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을 것이다.
누구든지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새내기 수행승은 “때는 지나가고 세월은 지나친다. 젊음의 시절은 우리를 버린다.”(Jat.509)라고 했다. 이 게송은 상윳따니까야에서 부처님이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S1.4)와 빠알리 원문이 같다. 후자의 번역이 정서적으로 훨씬 더 와 닿는다.
어찌 하다 보니 육십이 넘었다. 거울을 보아도 노년의 얼굴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속화될 것이다. 이런 때 정치와 관련된 것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다. 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요즘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하고 없으면 해야 할 일을 한다. 글쓰기는 기본에 해당된다. 매일 쓰는 것이기 때문에 일상이다.
요즘 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이전에 써 놓은 글에 대하여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글이 7천개 가까이 되다 보니 백권이 넘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 한달에 다섯 권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책 만드는 것도 일이다. 목차를 만들고 편집하고 서문을 쓰는 것도 일이다. 책 만드는 곳에 PDF를 보내서 인쇄와 제본을 의뢰하면 책이 완성된다. 이런 것도 삶의 낙일 것이다.
요즘 경 외우기를 하고 있다. 새벽에 한 게송 외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전에 외운 게송을 확인하고 새로운 게송 외우기에 들어간다. 이렇게 하다 보면 꽤 긴 길이의 경을 매일 외우게 된다. 잠시 시간 날 때 이전에 외운 게송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외운다. 매일 새로운 게송을 외우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외우다 보면 늘 가르침과 함께 하게 된다. 글쓰기 보다 더 짜릿한 행복이다.
요즘에는 자타카 교정작업을 하고 있다. 교정본 1권과 2권은 보아서 보냈고 현재 3권과 4권을 교정작업 중에 있다. 이번 주말에 완료된다. 다음주 월요일에는 택배로 발송될 것이다. 날자를 정해 놓고 교정하다 보니 밤낮으로 읽게 된다. 이는 절박감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경전을 읽을 때 이런 심정으로 읽으면 진도가 잘 나갈 것 같다. 이런 것도 행복일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많다. 뉴스를 보고서 분노하고 걱정하고 근심할 여유가 없다. 분노할 사람은 분노하고 걱정할 사람은 걱정해야 한다. 그 대신 촛불을 들 때는 촛불을 들 것이다. 현재는 피함으로 인하여 번뇌를 줄여야 한다. 무엇보다 시간이 아쉽다. 게송에서와 같이 “내일 죽을지 누가 알겠는가?”(Jat.529)라는 말이 와 닿는다.
오늘 밖에 시간이 없다면 마음이 급해진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한이 될 것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는데 죽음이 찾아왔다면 난감할 것 같다. 그래서 “저는 죽을 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출가하겠습니다.”(Jat.509)라고 했을 것이다.
하루가 빨리 지나간다.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다. 즐기는데 마음을 빼앗기면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간다. 뉴스를 보아서 번뇌가 일어났다면 허무한 것이다. 번뇌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뉴스를 보지 않아야 한다. 피함으로써 번뇌가 끊어지는 것이다.
2022-03-1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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