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유발자들을 보면
뉴스를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얼핏 보인다. 어느 보수 종이신문 1면을 우연히 보았다. 주먹 만한 활자만 본 것이다.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제목을 뽑아낸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신문은 분노유발자 같다. 보수신문이건 진보신문이건 분노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보수신문을 보지 않았으나 요즘에는 진보신문 마저 보지 않는다.
신문은 물론 TV뉴스도 보지 않는다. 유튜브도 보지 않는다. 분노를 유발하는 것들을 일체 보지 않는다. 그러나 카톡이나 페이스북 같은 에스엔에스까지 보지 않을 수 없다.
카톡방이 시끄럽다. 어떤 이가 리스트를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 패배 요인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 같다. 수십명 된다. 다 보지 않았다. 이에 어떤 이가 자제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쓴 칼럼을 링크시켰다. 칼럼 제목은 혐오와 배제에 대한 것이다. 역시 읽어 보지 않았다.
왜 분노를 하는 것일까? 아마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썼을 때 분노가 일어나는데 그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대게 에스엔에스 같은 담벼락이 되기 쉽다. 부당하고 불의한 것에 대해서 참을 수 없어서 고함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또 다른 이유는 카타르시스라고 본다. 욕하고 나면 시원한 이치와 같다. 그렇게 한다고 하여 분노가 해소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더 크게 분노해야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분노를 끊어서 편안히 잠자고
분노를 끊어서 슬프지 않다.
참으로 하늘사람들이여,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 죽이면 고귀한 님들은 가상히 여기니,
그것을 끊으면 슬픔을 여의기 때문이다.”(S1.71)
상윳따니까야에 있는 게송이다. 분노와 관련된 핵심구절은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이다. 이는 분노의 가학성(加虐性)을 말한다.
가학성이란 무엇일까? 사디스트를 떠올리면 된다. 채찍을 들고 때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때리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상대방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분노와 쾌감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경에서는 분노에 대하여 "꼭지의 꿀"과도 같다고 했다. 분노하면 꿀처럼 달콤한 쾌감이 동반됨을 말한다. 그런데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쾌감은 더욱 증대된다는 사실이다
상가집에서 우는 여인이 있다. 처음에는 "아이고, 아이고"하며 작은 소리로 곡한다. 나중에는 큰 소리로 곡한다. 슬프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곡한다고 슬픔이 가시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큰 소리로 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슬픔을 즐기는 것인지 모른다. 분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노는 분노를 유발한다. 분노하게 되면 시원하다. 어쩌면 이런 맛에 분노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분노는 꿀과 같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분노는 한번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노가 분노를 유발하여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마치 상가집에서 곡소리하는 것과 같다.
분노에는 가학적 면이 있다고 했다. 분노의 증폭을 말한다. 그래서 욕먹은 이를 욕하고, 맞은 사람을 또 때리는 식이 된다. 마치 사디스트적 가학과 같다. 그런데 분노는 불선법이라는 사실이다. 악하고 해로운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뿌리에는 독"이라고 했다.
게송에 따르면 분노에는 양면성이 있다. 그것은 쾌감과 독이다. 이를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S1.71)라고 했다. 분노하면 독이 발산됨을 말한다. 분노하면 독이 퍼져 자신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화병으로 죽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카톡방에서 대선 패배의 요인을 제공한 수십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들을 추방하자는 것이다. 왜 이런 명단을 올려 놓았을까?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먼저 함께 분노하자는 의미로 올려 놓았을 것이다. 알면 좋지만 몰라도 되는 것이다. 분노의 마음을 공유하기 위해 올려 놓았을 것이다. 다음으로 희생양이 필요했을 것이다.
개혁이나 혁명이 실패할 때 분노가 일어난다. 문제는 분노가 내부로 향하는 것이다. 선거에 패배했을 때 상대방 진영에게 분노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진영 내부로 분노가 향하기도 한다. 내부의 누군가를 타겟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혐오하고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카톡방의 리스트는 그런 용도로 본다.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읨의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
법구경에 실려 있는 진리의 말씀이다. 핵심은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분노가 분노로서 풀리지 않는 것과 같다.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지 않음과 같다.
승리자가 있으면 패배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승리는 원망을 낳고 패한 자는 잠을 못 이루네."(S3.14)라는 게송이 있다. 패배자는 반드시 복수하고자 한다. 원한의 복수가 될 것이다. 서로 간에 반복적 원한을 쌓기 쉽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너는 길게도 짧게도 보지 말라.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
(율장대품, 10장 꼬삼비의 다발, 디가부이야기)
율장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디가부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아버지가 모함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아버지는 오히려 원한을 내려 놓으라고 말한다. 반복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언급된 분노나 원한에 대한 가르침은 출세간적이다. 그럼에도 세간에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불선법에 따른 악업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분노를 표출하면 당장은 시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독이 발생된다. 분노하면 할수록 독은 점점 더 퍼질 것이다.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온몸에 퍼진 독으로 인하여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S1.71)라고 했을 것이다. 분노의 가학성이다.
뉴스를 보지 않는다. 인터넷뉴스와 TV뉴스를 보지 않는다. 뉴스를 보면 분노를 유하게 한다. 동시에 독도 발생하는 것 같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쓰여진 기사나 주의주장을 배격한다. 분노유발자로 본다. 분노로 인하여 번뇌가 발생하는 것이다.
번뇌는 피함으로써 생겨나지 않을 수 있다. 의도가 실린 기사나 주의 또는 주장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분노를 여의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처럼 좋은 것이 없다. 그래서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원한은 "원한의 여읨의 그치나니"라고 했다. 그래서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라고 했다. 내가 뉴스를 보지 않는 이유에 해당된다.
2022-04-0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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