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매일매일 절망의 나날인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7. 07:18

매일매일 절망의 나날인데


종종 길거리에서 무개차를 볼 수 있다. 거의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운전한다. 그들을 볼 때 먼저 '싸가지'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들은 차선을 쉽게 바꾸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때로 요란한 자동차 소리도 낸다.

시니어들은 인생의 단맛과 쓴맛, 신맛을 본 사람들이다. 주니어들이 날 뛸 때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웃었다가도 잠시후에 울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그럼에도 이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이 건강이 계속될 것처럼 경거망동한다. 반드시 인생의 쓴 맛을 보리라고 확신한다.

조금만 불편해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반복적으로 말하면 짜증내는 사람이 있다. 한번 말해서 안들었을 때, 두 번 세 번 이야기해도 멈추지 않았을 때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신경질적인 사람이다. 그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났을 때 일시적인 것이라면 문제없을 것이다. 평생 간다면 어떻게 될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팔고 중에 가장 괴로운 것은 원증회고로 본다. 생노병사는 과정이기 때문에 잘 눈치 채지 못한다. 애별리고나 구부득고는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오취온고는 있는 줄조차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일시적인 것도 있고 평생가는 것도 있다. 시간 지나면 해결되는 것도 있고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은 것도 있다. 늙어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살아갈 수 있다.

자만에 가득찬 철없는 젊은이에게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태생적 자만을 가진 자, 배움의 자만을 가진 자, 부자의 자만을 가진 자 역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삶은 사건의 연속이다. 사건이 없다면 삶도 없을 것이다. 행복한 것도 있고 불행한 것도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래서 행운을 바라는 것인지 모른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 가면서 자신의 실력보다는 운이 월등히 크게 작용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부자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편승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하필 그 때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행운이 따른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자만해서는 안된다.

부를 축적한 것에 대하여 자신의 실력으로 본다면 자만이 될 것이다. 큰 부자는 시대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부를 형성할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부는 어느 한사람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구성원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그래서일까 세계적인 부호는 겸손하다. 빌 게이츠같은 이는 "운이 좋았습니다."라고 말한다.

누구나 불행을 바라지 않고 행복을 바란다. 지금 괴로운 자는 행복을 바라고,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행복에도 조건이 있다. 행운이 찾아오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어떤 조건인가? 아마도 부처님 가르침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 테라와다 삼경을 들 수 있다. 라따나경, 멧따경, 망갈라경을 말한다.

라따나경은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에 대한 가르침이다. 붓다와 담마와 상가를 보석처럼 보기 때문에 보배경(Sn.2.1)이라고 한다.

멧따경은 자애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자애경(Sn.1.8)이라고 한다.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이라고 바라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서 원한 맺힌 자에 이르기까지 자애의 마음을 가득 낸다면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망갈라경은 행운에 대한 것이다. 불행은 오지말고 행운을 바라거든 망갈라경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축복경(Sn.2.4) 또는 길상경이라고 한다. 수십가지 길상의 조건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어리석은 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와 사귀는 것이야 말로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시초이기 때문이다.

초발심자경문이 있다. 스님들이 공부하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초발심자경문에서도 가장 처음 나오는 것이 어리석은 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망갈라경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다. 아마 초기경전에서 교훈이 될 만한 가르침을 모아 놓았을 것이다.

행운을 바라거든 망갈라경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어리석은 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 기술을 익히는 등 수십가지 행복의 조건이 있다. 이러한 조건이 만족되면 행운이 찾아올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축복이다.

축복은 지금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길상에 대한 것이다. 어리석은 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을 때 이는 행복이고 또한 미래의 행복이기도 하다.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만족하는 말이 축복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망갈라숫따에 대하여 축복경(Sn.2.4)이라고 번역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망갈라경 가르침대로만 산다면 틀림없이 행운이 찾아올 것이다. 운칠기삼인 것이다. 행복의 조건을 갖추어 놓으면 아무래도 불행보다 행운이 월등히 높을 것이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과거에 지은 업이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다. 늘 사띠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운에 달렸다. 그래서 부처님도 망갈라경에서 "에땅 망갈라 뭇따망(eta
magalamuttama.)"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는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라는 뜻이다. 망갈라경 각 게송마다 후렴구로 있는 것이다. 행운을 바라는 것이다.

어제 페이스북에서 어느 페친의 글을 보았다. 그는 산막에서 장성한 두 아들과 살고 있다. 가난하게 살고 있음에도 행복하다고 했다. 소욕지족의 삶이다. 그는 글의 말미에 "그럼 됐다."로 끝맺음 한다. 소욕지족이 행복의 조건인 것이다. 숲속의 경에 있는 사람 같다.

숲속의 경

1.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어떤 하늘사람이 한 쪽에 서서 세존의 앞에서 이처럼 시를 읊었다.

2.
[
하늘사람] “한적한 숲속에서 살면서
고요하고 청정한 수행자는
하루 한 끼만 들면서도
어떻게 얼굴빛이 맑고 깨끗해지랴?”

3.
[
세존]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

4.
지나간 일을 슬퍼하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시든다네.
낫에 잘린 푸른 갈대처럼.”(S1.10)

 


나는 행복한가? 행복의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면 안심일 것이다. 행운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다. 일시적인 것이라면 문제되지 않지만 평생 안고 가는 것이라면 절망이다.

사람들은 모두 절망의 열차에 탑승해 있다. 왜 절망의 열차인가? 태어남은 죽음이라는 절망으로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성제와 십이연기 정형구에서도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사야(sokaparidevadukkhadomanass
ūpāyāsā)"라고 했다. 이 빠알리 복합어는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의 뜻이다. 그래서 고성제와 십이연기에서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56.11, S12.2)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은 피할 수 없다.

매일매일 절망의 나날이다. 세상의 흐름대로 산다면 절망의 나날이 될 수밖에 없다. "결론은 버킹검"이라는 광고문구가 있듯이, 삶의 결론은 절망이다.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불사를 설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름아닌 절망으로 부터 탈출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내가 불교를 종교로 가진 이유에 해당된다.


2022-04-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