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달린다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 한다. 어디론가 향해 가는 것이 인생이다. 정처없이 흘러간다면 방랑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각자 나름대로 인생길이 있다. 어느 페친(페이스북 친구)은 호주 대륙을 횡단하기로 했다. 현지에서 오토바이를 구입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고 한다. 이미 여러 대륙을 횡단한 바 있는 페친은 마치 생중계하듯이 소식을 전할 것이다.
걸어서 세상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옛날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통과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글로벌화 되었다. 누구든지 지구 끝까지 갈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는 어떨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있다. 공간의 세상이다. 저 별빛 너머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누군가 우주의 끝에 이르고자 거의 빛의 속도로 달리는 우주선을 탔다고 하자. 그는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있을까? 그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도달하기 전에 죽고 말 것이다.
걸어서 세상 끝까지 갈 수 없다. 탈 것으로 우주 끝까지 갈 수 없다. 그러나 정신으로 이 세상 끝까지 갈 수 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탐구하는 것이다. 걸어서 여행하면 끝에 이를 수 없지만 내면을 여행을 하면 궁극에 도달할 수 있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새벽 빠다나경(정진의 경, Sn.3.2)을 암송했다. 모두 25게송 중에서 23게송을 외웠다. 이제 두 개의 게송만 남겨놓고 있다.
빠다나경 25게송 중에 말미에 있는 네 개의 게송은 마라(악마) 나무찌의 독백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것에 대한 일종의 푸념이다.
"삿따 밧사니 바가봔땅
아누반딩 빠다빠당
오따랑 나다갓치상
삼붓다사 사띠마또"
"Satta vassāni bhagavantaṃ, anubandhiṃ padāpadaṃ;
Otāraṃ nādhigacchissaṃ, sambuddhassa satīmato."
[악마]
"우리들은 7년 동안이나
세존을 발자국마다 따라다녔다.
그러나 새김을 확립한 올바로 깨달은 님께
다가갈 기회가 없었다."(Stn.448)
빠다나경 22번 게송이다. 악마는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했으나 실패했다. 무려 칠년 동안 쫓아다녔으나 이제 포기한 것이다. 보살이 성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마는 보살에게 '올바로 깨달은 자'라는 뜻으로 삼붓다(sambuddha)라는 칭호를 붙여 준다.
부처님은 세계의 끝에 이른 분이다. 이 세계의 끝장을 본 분이다. 내면을 탐구하여 존재의 궁극을 본 것이다. 마음 속의 모든 오염원을 소멸시켰을 때 세계의 끝에 이른 것이다.
"결코 참으로 세계의 끝에
걸어서는 도달할 수 없지만,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남은 없다.
참으로 세계를 아는 슬기로운 님은
세계의 궁극에 도달해
청정한 삶을 성취하니,
적멸에 든 님으로 세계의 끝을 잘 알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Vism.7.36)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이 게송은 부처님의 열 가지 덕성 중에서 로까위두(lokavidū)에 대한 것이다. 로까위두는 '세상을 잘 아는 님'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세간해(世間解)라고 한다.
세간해로서의 부처님은 세계의 끝에 이른 분이다. 결코 걸어가거나 달려가거나 탈 것으로 이르지 않았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여 궁극에 이르렀다. 그 궁극은 무었일까? 적멸이다. 부처님은 내면을 여행하여 열반이라는 궁극적 경지에 이른 것이다.
세상은 공간의 세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삼라만상 산천초목의 물질세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어떤 것일까? 이는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S35.23)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세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세계란 일체로서 여섯 가지 감역[六入: 시각영역, 청각영역, 후각영역, 미각영역, 촉각영역, 정신영역]을 의미하며,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그러한 인식의 세계에서의 개념에 불과하므로 시간과 공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끝은 단지 관념에 불과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세계는 소멸하고 그것을 세계의 끝이라고 할 수 있다.”(KPTS 앙굿따라니까야 4권 260번 각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니까야 각주에 실려 있는 글이다. 시공간의 세계는 인식의 세계에 있어서 개념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개념은 아무리 달려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지각할 수 있는 여섯 가지 감역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인 것이다.
불교는 내면 탐구의 종교이다. 외부에서 답을 구할 수 없다. 아무리 달려도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면을 달리면 궁극에 이를 수 있다. 게송을 외우고 경을 암송하는 것도 내면여행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빠다나경 23번 게송까지 외웠다. 이제 두 개 게송만 남았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게송 외우기가 점차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새벽에 정신이 맑을 때 1번 게송부터 암송하기 시작하면 기억이 떠오른다. 하나의 게송을 외우기 위해 수십, 수백번 반복했다.
반복해서 새기지 않으면 외워지지 않는다. 잊을 만하면 되새기는 식으로 하면 외워진다. 하루나 이틀 걸려 외운 게송을 먼저 외웠던 것과 붙여 외우면 전체적으로 외우게 된다. 나중에 다 외우게 되었을 때 세계의 끝에 이른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이제 두 게송 남았다. 나는 오늘도 달린다.
2022-04-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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