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경을 암송할 때는 원문으로 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3. 08:03

경을 암송할 때는 원문으로 해야


새벽에 잠에서 깨었을 때 정신이 맑다. 마치 흰 도화지 같은 상태가 된다.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암송보다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자리에 앉았다. 암송하는데 예의는 갖추고자 한다. 좌선 자세로 앉은 것이다. 빠다나숫따(Sn.3.2)를 암송했다. 25게송 중에서 20개 게송을 외운 상태이다. 새로운 게송을 외우기 전에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20
개 게송은 글자 수가 천자가량 될 것이다. 놀랍게도 암송하다 보면 떠오른다. 한구절 암송하고 나면 다음 구절이 올라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매일 암송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주 다니는 길에 질 나는 것과 같다. 또 하나는 스토리텔링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내용이 어떤 내용이 될지 알 수 있다.

빠알리 경을 암송하다 보면 막힐 때가 있다. 그때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실마리가 있어야 한다. 게송 단위로 끊어서 암송하기 때문에 첫 단어가 중요하다. 첫 단어만 기억하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달려 나온다.

내가 게송 외우기를 하는 것은 효과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즉각적인 결과가 따른다. 사구게로 되어 있는 짤막한 게송을 외우는데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 지나면 잊어버린다. 일과 시간 중에 틈틈히 떠 올려야 한다. 운전할 때도 떠 올리고, 잠시 휴식을 취할 때도 떠 올리고, 기다릴 때도 떠 올린다. 하루에 서너차례 하면 익숙해진다. 다음으로 이전에 외운 게송들과 붙여서 암송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새로운 게송이 추가될 때마다 암송시간은 늘어난다. 오늘 새벽에 20개 게송을 암송하는데 20분 이상 걸렸다.

"
훌륭하신 깨달은 님께서 찬양하는 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입니다.
그 삼매와 견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르침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stn226)

 


숫따니빠따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담마에 대한 예경과 찬탄에 대한 것이다.

게송에서는 삼매에 대하여 '즉각적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Sam
ādhinā tena samo na vijjati)'라고 했다. 이는 법수념에서 아깔리꼬(akaliko)에 해당된다. 가르침의 무시간성에 대한 것이다.

가르침의 효과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설령 시간이 지연된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효과로 나타난다. 게송을 암송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을 암송하는 것은 일종의 삼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정은 아니다. 선정은 호흡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집중하면 삼매상태가 된다. 그래서 독서삼매이니 뜨게질삼매이니 하는 말들이 나왔을 것이다.

암송하는 것은 수념에 속한다.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을 아누사띠(anusati)라고 한다. 부처님의 아홉 가지 덕성을 계속해서 생각한다면 붓다눗사띠(Buddhanussati: 불수념)이 될 것이다. 법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한다면 담마눗사띠(Dhammanussati: 법수념)가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념은 사마타 40가지 명상주제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매일 게송을 외우고 매일 경을 암송하는 것은 수념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식으로 말하면 염불하는 것이다. 경을 암송하는 것은 염불삼매에 들어 가는 것과 같다.

삼매와 선정은 다른 것이다. 똑같이 마음이 집중된 상태를 말하지만 선정이 더 깊은 상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멈추어야 할 것이다.

삼매와 선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멈추어야 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 멈춘다고 해서 사마타라고 한다. 그래서 집중의 깊이는 사마타(멈춤), 사마디(삼매), 자나(선정)의 순서가 된다.

암송하는 것은 언어작용에 따른 것이다. 호흡을 통해서 들어가는 선정과 깊이가 다르다. 언어를 기억하고 새김으로서 마음이 집중된다. 이를 염불삼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뜻도 모른채 되뇌이는 것은 아니다. 빠알리 원문을 떠올리면서 그 원문에 대하여 우리말로 뜻도 새기는 것이다. 이중작업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경을 외우기가 쉽지 않다. 끊어서 외워야 한다. 게송단위로 끊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긴 길이의 경을 외울 수 있는 것은 스토리텔링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뜻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는 긴 길이의 다라니를 외우기는 더욱 더 쉽지 않다.

2004
년 불교에 처음 입문했을 때 신묘장구대라니를 외웠다. 그때 당시 매주 토요일 저녁에 철야정진이 있었다. 지금도 있는 것 같다. 참석을 요청하는 문자가 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신묘장구대라니를 외울 때 들었던 말이 있다. 다라니를 외울 때는 뜻을 알면 안된다는 것이다.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도 있다고 했다. 진리의 말씀은 해석해서 안된다고도 했다. 다라니 그 자체에 영험함이 있기 때문에 해석없이 원문 그대로 암송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다라니 철야정진을 여러차례 했었다. 뜻도 모르고 "나모라 다나다라.."라며 108독 철야정진을 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진다는 것이다. 선창하는데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108번 하는 것이 목적이 된 것이다.

다라니를 암송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아마 자신을 지키는데도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수호주문으로 본다. 그런데 니까야에서도 수호주문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디가니까야 32번 경이 그것이다.

부처님은 수호주문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가니까야 32번 경에 따르면 사대왕천의 요청에 따라 암묵적으로 허락하는 장면이 나온다. 북방을 관장하는 벳싸바나 대왕이 비인간 즉, 야차, 건달바, 꿈반다, 나가() 등의 해꼬지함으로부터 재가의 남자신도와 여자신도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처님에게 자신이 만든 빠릿따(수호주)를 외우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이를 아따나띠야 빠릿따라고 한다. 대왕은 이렇게 말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수행승이든, 수행녀이든, 재가 남자신도이든, 재가의 여신도이든 이 수호주 아따나띠야를 잘 익혀서 완전히 외우고 있는데, 만일 비인간, 곧 야차나 야차녀,… 사악한 마음으로, 수행승이나 수행녀나 재가 남자신도나 재가의 여신도가 가면 따라서 가고, …”(D32)

여기서 중요한 말은 "잘 익혀서 완전히 외우고"라는 말이다. 왜 이 말이 중요한가? 뜻도 모르고 외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발간된 디가니까야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의취를 빠알리 문장에 틀리도록 완전히 충분히 알지 못하고 외우는 경우 보호주로서 효력이 없다. 완전히 충분히 알고 외우는 경우 보호주의 위력이 있다. 이득에 의해서 배우고 외우는 경우에도 의취는 성취되지 않는다. 욕망의 여윔(
出離)의 측면에서 자애를 선구로 하면, 외우는 자의 의취가 성취된다."(KPTS본 각주)

주문을 외울 때는 의미와 취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아무런 뜻도 모르고 다라니를 외우면 효과가 없음을 말한다. 또한 소원성취를 위해서 외우는 것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주문이나 다라니는 뜻을 알고 외워야 한다. 또한 어떤 이득을 위해서 외워서는 안된다. 게송을 외우고 경을 암송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04
년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한 이래 주문과 다라니와 경을 외웠다. 긴 길이의 다라니를 외울 때는 뜻도 모르고 외웠다. 지금은 빠알리 게송을 외울 때 뜻을 알고 외운다. 경을 암송할 때 역시 뜻을 새기며 외운다. 어떤 이득을 위해 외우거나 암송하지 않는다. 수행의 방편이다.

경을 암송하고 나면 상쾌하다. "오늘도 해냈다!"라고 생각하는데 승리자가 된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집중이다. 경을 암송하는 과정에서 집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를 삼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집중된 힘을 행선이나 좌선에 임할 때 가져 가면 효과적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에 임하기 전에 예비수행으로서 수념이 권장된다.

경을 암송하면 하면 여러 이점이 있다. 그 중에서도 신심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게송을 외우고 경을 암송하는 것 자체가 신심인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새기는 것 자체가 신심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라니까야를 보면 난다마따가 숫따니빠따 피안의 품을 암송했을 때 벳싸바나 대왕이 이를 알고 경의를 표했다는 장면이 나온다.

아산 마하위하라의 담마끼띠 스님에게 들은 것이 있다. 경을 암송할 때는 원문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왜 그런가? 그것은 힘을 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 감응일 것이다.

테라와다 불교에는 수호경이 있다. 대표적으로 테라와다 삼경을 들 수 있다. 라따나경(보배경), 멧따경(자애경), 망갈라경(축복경)을 말한다. 모두 숫따니빠따에 있다. 이와 같은 테라와다 삼경은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이다.

테라와다 삼경이 왜 수호경이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감응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암송되어 왔기 때문에 천상의 존재와 감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인간의 백년은 천상의 반나절 또는 하루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누구와 감응하는 것일까? 아마도 벳싸바나 대왕일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수호하는, 사대왕천의 북방을 관장하는 대왕이다.

테라와다 삼경을 포함하여 수많은 빠알리 경과 게송을 외웠다. 물론 반야심경과 금강경과 같은 대승경전도 외웠다. 모두 뜻을 새기며 스토리텔링식으로 전개하며 외웠다. 지금도 빠알리 게송과 경을 암송하고 있다.

"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하고
잘 닦여진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온다.
가르침이 잘 닦여지면, 공덕이 있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Thag.303)

경을 암송하고 나면 상쾌하다. 그리고 힘을 받는 것과 같다. 이 집중된 힘으로 어느 것이든지 한다면 잘 이루어질 것 같다. 이것이 아마 경을 암송하는 가장 큰 이점일 것이다.

경을 암송할 때는 원문으로 해야 한다. 우리말로 암송하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원문으로 암송하는 것이다. 그래야 힘을 받는다. 담마는 담마를 따르는 자를 보호한다.


2022-04-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