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윤회에 대한 임승택 선생의 법문을 듣고
나는 무아에 대하여 얼마나 알까? 2006년 이후 지금까지 거의 매일 글을 쓰다 시피하고 있다. 주로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를 말한다. 그것도 초기경전이다. 수 많은 무아에 대한 글쓰기를 했다. 그런 나는 무아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정평법회 4월 초대법사는 임승택 선생이다. 법문 주제는 ‘무아란 무엇인가’이다. 마치 “불교는 무엇인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렵고 무거운 주제이다. 그래서일까 법문 제목만 보고서 줌법회에 들어온 사람도 있다.
무아란 무엇일까? 무아는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이다. 무아는 불교를 불교이게끔 만드는 가르침이다. 오로지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이론이다. 유사이래 어느 누구도 “내가 없다.”라는 가르침을 펼치지 않았다. 연기법을 깨달은 연각승은 가능할지 모른다.
정말 나는 없는 것일까? 부처님이 “나는 없다.”라고 했는데 정말 나는 없는 것일까? 더구나 없는 나가 윤회한다고 말한다. 이를 무아윤회라고 한다.
임승택 선생은 법문에서 무아윤회를 비판했다. 그것도 테이블을 만들어 조목조목 비판했다. 때로 불편한 마음이 들정도로, 때로 가혹하게 여길 정도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 같았다.
무아테이블을 보면 세 가지 유형에 열 두가지 형태로 된 것이다. 모두 니까야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이다. 약 50분가량 이어진 법문에서 열 두가지 유형의 무아에 대해서 근거가 되는 경을 예로 들어가면서 자세히 설명했다.
법문을 열심히 메모했다. 가능하면 말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했다. 논문을 읽는 것보다 말로 듣는 것이 더 효율적인 것임을 알고 있다. 말로 하다 보면 글로 쓰지 못한 것을 알아 낼 수도 있다. 특히 질의응답을 통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드러난다. 이번 법문도 그랬다.
마우스 엔지니어(Mouth Engineer)
논문을 한번도 써 본적이 없다. 학자들의 논문을 보면 근거를 드는 것은 상식이다. 각주에 근거가 되는 경이나 자료를 밝히고 있다. 임승택 선생의 무아에 대한 테이블 역시 근거가 되는 경이나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만일 근거 없이 글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더 나아가 자신의 종교가 되어 버린다.
무아테이블을 보고서 개발자 시절의 일이 떠 올랐다. 보고서를 작성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표이다. 이는 다름 아닌 실험 데이터 값을 말한다. 테이블을 만들어 측정치를 기록한 것이다. 이런 자료 없이 보고서를 만들면 그냥 머리로 만드는 것이 된다.
신입사원 시절 선배사원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납땜 오래 하다 보면 느는 것은 고집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고집인가? 자신의 방식을 우기는 것이다. 그리고 입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입으로 어떻게 개발하는 것일까? 말로서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안되고 라며 말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개발을 다 하는 사람이다. 말로만 개발 하는 사람에 대하여 ‘마우스 엔지니어(Mouth Engineer)’라고 말한다.
마우스 엔지니어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근거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 실험 데이터를 표로 만들어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데이터를 근거로 이야기했을 때 대체로 인정해 준다.
글보다 말이 솔직하다
임승택 선생이 무아테이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임승택 선생이 말한 것을 빠짐없이 노트했다. 노트한 것을 보니 11페이지에 달한다. 후기를 쓰기 위해서 노트한 것을 읽어 보았다. 새겨야 할 곳은 노랑 형광메모리칠을 했다. 더 중요한 것은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도 치고 별 표시도 해 놓았다.
임승택 선생은 현재 경북대 철학과 교수이다. 인도철학을 전공했고 주전공은 초기불교라고 했다. 법문에 앞서 먼저 자신이 작성한 무아와 관련된 논문을 읽어 볼 것을 주문했다. 인터넷 검색창에 키워드 검색하면 찾을 것이라고 했다.
구글 검색창에 임승택과 무아윤회를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다. 어느 사이트에 ‘무아·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초기불교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이 하나 걸렸다. 빠른 속도로 읽어 보았다. 그러나 다 읽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 읽어 보니 법문에서 말한 것이 더 이해가 쉬웠다. 노트한 것을 읽으니 논문 읽는 것 보다 더 나은 것 같다.
글은 아무리 잘 표현한다고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백번 글을 보는 것 보다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이 훨씬 더 이해가 빠름을 말한다. 그것은 진심 또는 본심을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무아테이블에 대한 설명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임승택 선생의 무아테이블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유형1과 유형2는 니까야에 따른 무아의 주류적 해석방식이라고 했다. 반면 유형3에 대해서는 주의와 주장에 대한 것으로 후대논리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유형3에 대한 비판이다. 후대논리라고 한 것은 대승불교와 공사상에 대한 것이라고 본다. 결국 무아테이블은 무아를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 후대 성립된 공의 논리를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대체로 신중한 것 같다. 같은 말이라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돌려 말하는 것 같다. 아마 상대방에 대한 배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잘 들어 보면 드러난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알아 챌 수 있는 것이다. 무아에 대한 공(空)의 해석 방식이 그렇다.
세 가지 유형 열 두가지 형태의 무아테이블을 보면
임승택 선생은 무아유형3에 대하여 초기불교와 이질적이라는 말을 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아유형3은 어떤 것일까? 모두 6가지 유형이 있다. 이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유형3-1
주재자로서 자아의 부정: 지배력의 부재 지적
2) 유형3-2
초월적 자아의 부정: 초월자의 무의미 지적
3) 유형3-3
마차와 부품의 비유: 언표로서 자아는 인정
4) 유형3-4
연기에 입각한 가설적 자아: 연기와 무아는 별개
5) 유형3-5
20가지 유신견 비판: 자아 주장의 종합비판
6) 유형3-5
일체법의 무아: 무아에 대한 절대화
이와 같은 6가지 유형은 니까야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로지 구사론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형3-4를 말한다. 독존적 존재로서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라는 구절을 들었다.
유업보이무작자라는 말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은 것은 유튜브에서 이중표 선생의 강연을 듣고 나서이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었다. 마치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로그에 ‘제일공의경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론은 허무주의적 견해’(2017-01-26, https://blog.daum.net/bolee591/16157565 )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비판했다.
나는 불교학자는 아니다.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수행자도 아니다. 인터넷에 잡문을 쓰는 블로거일 뿐이다. 그럼에도 강연을 듣고 비판적인 글을 쓴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로 니까야에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임승택 선생의 법문을 들어 보면 대승의 공사상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없다. 그러나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무아윤회에 대하여 연기법과 상호의존으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대체 이 말은 무슨 말일까?
공(空)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불교에 늦게 입문했다. 2004년 정식으로 불교교양대학에서 부처님 일생부터 배웠느니 늦은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에는 대승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잡히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초기불교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공이라고 본다. 일단 공이라는 말이 나오면 머리가 혼란스럽다. 그리고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것 같다. 나의 머리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대체 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름대로 공부했다. 불교TV사이트에서 김종욱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인터넷으로 본 것이다. 녹취해 가며 후기를 남겼다. 그때 김종욱 선생이 공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이 있다. 공은 무자성이고 연기이고 무아라는 것이다. 이 말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김종욱 선생이 설명한 공은 속된 말로 ‘3박자 공’이라고 볼 수 있다. 공은 무자성, 연기, 무아라고 했는데 모두 등식이 성립됨을 말한다. 그래서 공은 무자성을 말하는 것이고, 공은 연기를 말하는 것이고, 공은 무아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에 대해서 알려면 이 세 가지를 놓쳐서는 안된다.
임승택 선생은 무아윤회를 설명하면서 공의 세 가지 성질과 유사하게 말했다. 연기와 무아가 등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아=연기’임을 말한다. 이 말은 “연기가 무아이고, 무아가 연기이다.”라는 말과 같다. 공을 설명하는 방식과 똑 같다. 공을 말할 때 공은 “공=무자성=연기=무아”라는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무아윤회의 시발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론
임승택 선생의 법문을 듣고 숙고해 보았다. 마침내 “무아윤회는 공을 말하는 것이다.”라며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이는 임승택 선생이 법문에서 무아윤회에 대하여 “무아인 동시에 윤회한다.”라는 말을 숙고한 결과 이는 다름 아닌 공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무아윤회 유형3-4에 대한 것은 무아와 윤회를 상호의존적으로 본것이다. 이는 공의 공식에서 “공=무자성=연기=무아”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식이 니까야에는 보이지 않고 유일한 근거가 제일공경과 구사론에 실려 있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임승택 선생은 논문에서도 확인된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불교학연구 논문 ‘무아·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초기불교를 중심으로 (https://journal.kabs.re.kr/articles/pdf/WY1Z/ksbs-2015-045-00-1.pdf )’가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를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업과 과보는 있지만 짓는 이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 第一義空經)”의 경구가 지목되곤 한다.”라고 써 놓았다. 이와 같은 유업보이무작자론이 공의 이론에 따른 무아윤회의 시발이라고 본다.
블로그에서 제일공경의 유업보이무작자론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다음과 같이 글로 써 놓았다.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라는 말은 무책임한 말입니다. 니까야에서는 단견으로서 허무주의적 견해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잡아함경 제일의공경에서는 이 말이 제법실상을 잘 나타난 것이라 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공사상을 잘 표현 하는 말이라 합니다. 그런데‘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 론이 단견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일까 속수법이라 하여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음으로..” 라 하여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붙여 놓았습니다.”(有業報而無作者)’론은 허무주의적 견해’,2017-01-26, https://blog.daum.net/bolee591/16157565)
제일공경은 진제와 속제로 설명하고 있다. 공의 원리로 설명한 것은 진제이고 십이연기로 설명한 것은 속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러나 니까야 그 어디에도 부처님이 진제와 속제로 구분하여 설명한 대목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제일의공경은 후대에 편집된 경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봅니다.”라고 써 놓았다.
블로그에서 유업보이작자론을 단멸론이라고 본 것은 상호의존적 연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연기송에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든가, 또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하나를 말한다.
연기송은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유전문의 경우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의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상호의존적 연기’가 된다. 후자는 ‘조건발생적 연기’가 된다. 그래서 십이연기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가 만족 되어어서 십이연기의 고리가 형성된다. 그런데 공에서는 상호의존적 연기 하나만 적용되는 것 같다. 색즉시공이나 공즉시색 같은 것이 그렇다. 제일공경의 유업보이무작자론도 상호의존적 연기 하나만 적용한 결과 단멸론적 견해로 본 것이다.
무아가 윤회가 결합되면
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난해한 것은 공이었다. 지금도 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다만 공의 공식, 즉 공은 “공=무자성=연기=무아”라는 등식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런 공의 논리가 무아와 윤회가 결합되었을 때 무아윤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임승택 선생은 법문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무아윤회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연기와 무아가 등식으로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한다.
무아는 부처님의 핵심사상이다. 그런데 무아가 윤회가 결합되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이에 대한 설명이 무아테이블에 있는 무아의 세 가지 유형과 열 두가지 형태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형3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적 해석의 맹아”라고 했고, 또한 “무아에 대한 절대화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무아윤회유형3에 대하여 글로 표현한 것과 말로 표현한 것은 다르다. 말로 표현할 때는 “앞뒤가 안맞는다.”고 했고, 초기불교와는 이질적이라고 했다. 심지에 ‘견해’라고도 했다. 불교에서 견해는 어떤 것일까? 이는 정견과 반대되는 말로 ‘사견’이기 쉽다.
임승택 선생이 말하는 무아는?
초기경전을 근거로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공은 피한다. 공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면 오리무중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번에 임승택 선생의 무아윤회에 대한 법문을 듣고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다.
임승택 선생에 따르면 무아가 곧 연기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공을 부정하는 말과 같다. 그러나 말이나 글로 공을 부정한다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추론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무아가 연기라는 말은 구사론에만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공의 논리가 윤회와 결합되었을 때 무아윤회가 되는데, 이에 대하여 “앞뒤가 안맞는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임승택 선생이 말하는 무아는 어떤 것일까?
글에서 본마음을 알기 힘들다. 그러나 말하는 도중에 진심을 접할 수 있다. 특히 질의응답할 때 나타날 수 있다. 임승택 선생은 어느 질문에 대한 답에서 “자아가 있으니 윤회합니다. 자아를 넘어서면 윤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유아론자라고도 볼 수 있다.
임승택 선생은 철저하게 니까야 경전에 근거하여 논문을 쓰고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무아테이블에서 유형1과 2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3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적이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유업보이무작자론과 같은 무아윤회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
무아라기 보다는 비아(非我)
임승택 선생이 법문한 것을 노트했다. 그리고 후기를 쓰면서 여러 번 읽어 보았다. 검색해서 관련 기사와 논문도 일부 보았다. 임승택 선생이 생각하는 무아는 초기경전에 근거한 무아를 말한다. 이는 무아테이블에서 유형1과 2에 대한 것이다.
유형1에서는 경험적 내용과 탈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 것? 니까야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는 오온에 대한 부정이다. 이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정형구를 말한다. 이와 같이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을 부정하는데, 이에 대하여 임승택 선생은 비아(非我)라고 했다.
경전에서는 무아라는 말이 쓰인다. 아직까지 비아라는 말을 보지 못했다. 이는 무아를 뜻하는 아낫따(anatta)를 ‘내가 없다’는 무아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형1-1를 보면 아낫따는 무아라기 보다는 비아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고’라든가, ‘아니다’라고 번역되는 것이다.
질의응답시간에
질의응답시간에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실아, 가아, 진아로 설명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시아’라는 말도 했다. 임승택 선생은 자아가 있으니 윤회한다고 말했다. 다만 자아를 넘어서서 윤회를 끝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오온이라는 경험세계에 갇히지 말자는 것이다.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도 많다. 이에 대하여 임승택 선생은 분명히 “자아가 있으니 윤회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니까야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유형1-1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정형구에 대하여 “존재론적 긍정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말로서 “본래적인 무아의 의미에 대하여 천착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니까야에서 본래적인 무아의 의미는 유형1-1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아라기 보다는 비아에 가깝다고 했다. 그렇다고 임승택 선생의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미진한 점이 있다’고 했고 또한 ‘조심해야 할 것도 있다’고 했다. 이런 점을 미리 예상해서일까 임승택 선생은 법문을 마칠 때 “무아에 대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라고 했다.
힘 들 때마다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
나는 무아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나는 불교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니까야에 의존하여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가르침의 바다는 너무 넓고도 깊다. 전부 다 알 수 없다. 공과 관련된 것은 보지 않는다. 너무 확대되기 때문이다. 공의 세계로 들어가면 오리무중 되어서 길을 잃기 쉬울 것 같다. 그래서 빠알리 삼장으로 한정한다.
이번 4월 정평법회에서 임승택 선생의 무아윤회에 대한 법문은 하나의 방향을 잡아 주었다고 본다. 그것은 경전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지 가르침을 근거로 하면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초기 가르침이다. 무아에 대한 것도 그렇다. 특히 무아에 대하여 비아로 해석한 것은 신선하다.
임승택 선생에 따르면 존재는 부정되지 않았다. 이는 존재의 긍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오온의 경험에 대하여 ‘탈동일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니다. 이와 같은 정형구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금요니까야모임에서 ‘마법의 주문’이라고 했다. 힘이 들 때마다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2022-04-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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