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29. 07:21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늘 문수스님 추모제가 열린다. 성북동 약사암에서 정의평화불교연대(정평불), 신대승불교네트워크, 불교환경연대가 공동으로 주관한다. 오늘 5 29일 오후 5시에 추모법회가 있다.

 


문수스님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재가불교활동 하기 이전 교계 신문사이트에서 소식을 보았다. 그때 당시 불교계에서는 충격에 빠졌던 것 같다. 특히 기성종단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단체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정평불이 생겨난 것도 문수스님 분신의 영향이 크다.

문수스님의 분신은 사대강사업과 관련 있다. 그때 당시 이명박정부는 국민 대다수가 사대강사업에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밀어부쳤다. 특히 환경단체의 반발이 컸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업을 추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문수스님 소신과 관련하여 검색해 보았다. 불교닷컴에서 소신 1주년 특집기사가 발견되었다. 서현욱 기자가 2011년에 작성한 것이다. 문수스님이 소신한 이유에 대해서 세 가지를 들었다. 유서에는 "1)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포기하라. 2)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3)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라고 쓰여 있다.

 


문수스님이 소신한 것은 2010 5 31일이다. 검색해 보니 "경북 군위 지보사 문수 스님(세납 47) 31일 오후 3시경 군위읍 사직리 하천 제방에서 '4대강 사업 중단' 등의 유서를 남기고 숨져있는 것을 행인이 발견해 신고했다고 밝혔다."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문수스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소신했던 것이다.

문수스님의 소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2017년 정평불 눈부처학교에서 박경준 선생에게 들은 것이 있다. 이에 대하여 '정원스님과 문수스님을 추모하며, 정의로운 삶을 위한 대자대비의 소신공양(
燒身供養)'(2017-12-29)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긴 바 있다. 글의 말미에 이렇게 소감을 써 놓았다.

"
자살을 미화하지도 않고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누군가 자살하려 한다면 적극적으로 말릴 것입니다. 그러나 청정한 자가 공동선(
共同善)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자비로운 보살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자살도 아니고 자기희생도 아닙니다. 자기검증 된 자의 대자대비에 따른 중생들을 위한 소신공양입니다. 정원스님과 문수스님의 소신이 그렇습니다."(이병욱, 2017-12-29)

문수스님 소신과 관련하여 가장 걸렸던 것은 자살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자살은 합리화될 수 없다.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하다 죽었다면 열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민주화운동시기에 수많은 분신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한 사람들에 대하여 열사라 하여 추모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문수스님과 장원스님 소신도 열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올해 5 21일 광주에 다녀왔다. 김동수열사 42주년 추모제에 참석한 것이다. 2019년 이후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참여하고 있다. 작년 코로나가 심했을 때는 개인적으로 참배했다. 김동수열사뿐만 아니라 윤상원, 박병규, 김동철열사의 묘역도 참배했다.

나는 왜 김동수열사 추모제에 참여하는가? 그것은 열사의 저항정신 때문이다. 그것도 죽음을 각오한 결사항전 정신에 따른 것이다. 결론은 보살정신이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청에 듵어간 것은 보살정신으로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최근 자타카를 읽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자타카가 완역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출간을 앞두고 있다. 아마 올해 7-8월경에는 세상에 나올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빠알리원문을 직역한 것이다.

자타카는 영웅적 보살행에 대한 것이다. 또한 자타카는 웅대한 신화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1권에서 수메다 존자의 서원을 보면 신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자타카가 출간되면, 어쩌면 한국불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경전이 될지 모른다.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 있어서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자타카 교정본을 읽어 보았다. 자타카는 모두 7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경전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단권으로 해 놓았다. 2단 칼럼에 3천페이지 분량이다. 이 교정본을 한달에 걸쳐서 각주까지 상세히 읽어 보았다.

자타카는 부처님이 보살로 삶을 살았을 때 457가지 이야기를 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보살은 인간뿐만아니라 천신이나 축생으로도 태어났다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한결같이 보살행을 했다. 이는 다름아닌 십바라밀에 대한 것이다.

바라밀도 바라밀 나름이다. 가장 수승한 바라밀이 있다. 보시바라밀을 예로 든다면 다음과 같다.

"
보시바라밀(d
āna-pāramī) :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기부하는 것은 일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손이나 발 등의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우월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목숨을 보시하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다.”(Jat.I.73)

바라밀 중에서 최상의 바라밀은 승의적 바라밀(paramatthap
āramī)이다. 이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승의적 초월의 길이라고 번역했다.

자타카는 빠라맛타빠라미에 대한 것이 많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 수 있다. 자타카 537(Jat.537)을 보면 식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왕이 사람고기 맛을 들여 사람을 닥치는대로 잡아먹는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보살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지상에서 어떠한 맛난 것이라도
그들 가운데 진실보다 맛난 것은 없다.
수행자나 성직자는 진실에 입각하여
삶과 죽음의 저편으로 뛰어넘는다.”(자타카 게송 429)

나는 갖가지 선업을 행했다.
내가 지낸 제사는 칭찬받았다.
후회를 여의고
나는 저 세상으로 가리.
그러니 희생제를 치루고
그대 식인귀여, 나를 잡아먹어라.”(자타카 게송 432)

보살은 죽음 앞에서 당당했다. 이는 갖가지 선업을 행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저 세상에의 길은 정화되었으니 진리에 서서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리.”(자타카 게송 431)라고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이런 선언은진실바라밀(sacca-p
āramī)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자타카를 읽어보면 진실선언 장면이 있다. 언젠가 자신이 지은 선업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진실의 힘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진실선언은 숫따니빠따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서도 발견된다. 각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Etena saccena)"라는 후렴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진실선언인 것이다.

"
싸끼야 족의 성자가 삼매에 들어 성취한 지멸과 소멸과 불사와 승묘, 이 사실과 견줄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르침 안에야 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라따나경 4번째 게송)

바라밀에서 최종적인 것은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이다. 진실바라밀이라면 "그들의 생명과 관련하여 진실을 떠나지 않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진실이다."라고 설명된다.

자타카를 읽어보면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부처가 되기로 서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아승지하고도 십만겁동안 보살행을 했다. 한량없는 세월동안 보살도를 닦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나고 죽는 일을 반복했을 것이다. 죽으면 다시 태어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로든지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자타카를 보면 설령 축생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언제나 리더의 위치에 있다. 선업공덕의 힘 때문일 것이다. 또한 보살은 언제 어디서든지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 서원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1980 5월 광주에서 최후의 날 도청에 남고자 했던 사람들은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이었다. 살고자 한 사람들은 도청을 떠났다. 그러나 결사항전한다고 총은 들었지만 일방적으로 진압당했다. 김동수 열사도 저항하다 최후를 맞이했다.

사람들은 살고자 한 사람은 그다지 기억하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서 죽고자 했던 사람은 기억한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최상의 승의적 초월의 길을 간 사람이다.

눈부처학교에서 박경준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그때 당시 문수스님은 안거기간이었다고 한다. 가장 청정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종의 진실바라밀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타카에서처럼저 세상에의 길은 정화되었으니 진리에 서서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리.”(자타카 게송 431)라고 당당히 선언했을지 모른다.

문수스님은 수행을 하는 수행승이었다. 마음이 가장 청정한 상태에서 소신했다. 그것은 무아의 상태일지 모른다. 선업공덕의 힘으로 진실선언을 해서 이 세상을 바꾸어 보고자한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다름아닌 보살행이다.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서원한 것이 있기 때문에 어떤 존재로 태어나는 것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선업공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수스님의 소신에서 보살행을 보았다. 나만 그럴까?


2022-05-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