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마법의 주문으로 오미크론 퇴치를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20. 12:05

마법의 주문으로 오미크론 퇴치를

코로나 확진 이틀째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 목은 퉁퉁부어 따갑고 온살과 뼈마디가 쑤시는 것 같다. 이것이 절정일까? 또 다른 피크치가 있을까?

약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빈인후과에서 처방해 준 5일치 분량의 약에 크게 의존 한다. 이제 두 번 먹어 보았을 뿐이다. 오늘 새벽 같은 상태라면 절대 일터에 가지 못할 것이다.

아내도 걸렸다. 일주일 집에서 쉬지만 유급휴가라고 한다. 일인사업자는 홀로 일한다. 유급무급 개념이 없다. 놀면 손해 나는 것이다. 성질 급한 고객의 경우 즉각 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응을 못해주면 끊어진다.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까? 낙관한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절정이 있으면 그 다음은 하강곡선을 그리게 되어 있다. 바이러스가 인간의 몸을 숙주로 급격하게 세력을 불렸을 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백만대군이 아니라 천만, 억만, 그 이상의 셀 수 없는 대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

오미크론은 감기 증상과 유사하다. 나의 경우 목젖이 부어 인후통이 있고 추운 기가 있어서 근육통을 동반하고 있다. 이럴 때는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최고이다.

몸을 안팍으로 덥혀야 한다. 꿀생강차가 있다. 마트에서 8천원대에 산 것이다. 뜨거운 물에 생강차를 만들어 마신다. 목젖을 타고 내려 가는 뜨꺼움이 바이러스를 씻어 내려 가게 하는 것처럼 시원하다. 생강이 코로나에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미크론은 근육통을 동반한다. 뼈골이 쑤시는 것 같다.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 샤워하는 것도 좋다.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좋다. 지금은 시기적으로 아파트 난방이 되지 않는다. 전기장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황토방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괴로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낫는 것과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는 것이 있다. 전자는 몸에 상처가 났거나 감기 같이 가벼운 것이다. 우리 몸은 복원력과 항상력이 있어서 본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특성이 있다. 오미크론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문턱치를 넘었을 때 회복 불가능하다. 난치병이 좋은 예일 것이다. 중병에 걸렸을 때도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말 해결 안되는 문제가 있다. 생, 노, 병, 사를 말한다.

태어난 순간을 알 수 없다. 아이가 인지 기능이 생겨났을 때 자신을 알 수 있다. 또한 죽는 순간을 알 수 없다. 죽어서 돌아 온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오로지 '지금 여기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태어남과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나 병과 노는 알 수 있다. 그런데 생, 노, 병, 사는 괴로움이라고 했다. 태어나자마자 괴로움의 바다로 던져 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인생은 즐겁다'든가,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살면서 사랑하지 않은 것들과 만난다. 어떤 것은 짧게 끝난다.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해결 되는 것들이다. 감기도 그런 것중의 하나이다. 악우도 그렇다. 군대 3년도 그렇다. 그러나 평생 가는 것도 있다. 족쇄가 단단히 채워진 것이다. 그것은 사물일수도 있고 사람일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생노병사를 말한다.

오미크론이 들어 욌다. 어떻게 잠입 했는지 알 수 없다. 인간의 몸을 숙주 삼아 안착했을 때 그 다음 단계는 급속히 팽창한다. 인간의 단백질을 먹이로 하여 그야말로 지수함수적으로 대폭발하는 것이다. 그 헤아릴 수 없는 대군에게 속수무책이다. 반전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오미크론의 억만대군과 싸워 어떻게 이길 것인가? 공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힘들다. 갖가지 물리치는 방법을 동원해 본다. 푹 쉬며 처방 약을 먹는 것이다. 병원에서 해 준 것은 약 밖에 없다. 나머지 기간은 혼자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이 육체적 고통의 괴로움에서 하루빨리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육체적 괴로움보다 정신적 괴로움이 더 크다. 어리석은 사람은 육체적 괴로움을 정신적 괴로움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아플 때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며 비명 지르듯이 말한다. 두 방의 화살을 맞은 것이다. 육체적 화살과 정신적 화살을 동시에 맞은 것이다.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그런데 그때 세존께서 돌조각 때문에 발에 상처를 입으셨다. 세존께서는 몸이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S1. 38)

육체적 고통이 발생 했을 때 첫번째 화살을 맞은 것이다. 누구나 맞을 수 있다. 부처님도 돌조각을 맞아 다리에 피를 흘렸을 때 괴로워 했다. 악인의 대명사 데바닷따가 부처님을 살해 하기 위해서 깃자꾸따 산에서 바위를 굴렸는데 그 파편에 맞은 것이다.

부처님이 돌조각을 맞았을 때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다."라고 했다. 육체적 고통에 있어서는 중생과 차별이 없다. 그러나 그 다음이 다르다. 부처님은 육체적 고통에 대하여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S1. 38)라고 했다. 정신적 화살을 맞지 않은 것이다.

두 방의 화살이 있다. 하나는 육체적 화살이고 또 하나는 정신적 화살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제1의 화살이라고 하고, 후자를 제2의 화살이라고 말한다. 대개 범부는 화살 두 방을 맞기 쉽다. 육체적 고통이 닥쳤을 때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며 육체적 화살에 이어 정신적 화살까지 맞는다.

육체적 화살이 더 아플까 정신적 화살이 더 아플까? 현자들에 따르면 정신적 화살이 훨씬 더 괴롭다고 했다. 누군가 미워 했을 때 자기자신이 더 괴로운 것은 정신적 화살을 맞았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 나꿀리삐따 장자가 중병에 걸렸다. 나이가 들어 병이 들었기 때문에 자신은 거의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고 보았다. 부처님은 이 소식을 듣고 병문안 갔다. 병문안 가서 중병에 걸린 나꿀리삐따 장자에게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S22.1)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부처님은 딱 한구절만 말했다. 핵심을 가로지르는 말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괴로움까지 확장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후 사리뿟따존자가 다음과 같이 의미를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장자여,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고,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속박됩니다.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S22.1)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면 괴로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중병에 걸려서 육체적으로 고통받을 때 그 고통을 내것이라고 여기면 정신적 고통이 될 것이다. 화살을 두 방 맞은 것이다.

화살은 한방으로 그쳐야 한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띠해야 한다. 부처님이 돌조각에 맞았을 때처럼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통찰 했을 때 고통을 나의 것이라고 보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육체적 고통에 대하여 "아파 죽곘네!"라고 하면 안된다. 일단 '죽겠다'는 말이 들어가면 집착하는 것이된다.

몸이 아파도 잘 배운 부처님 제자라면 단지 "아프네."라며 그쳐야 한다. 슬픔도 마찬가지이고 분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항상 사띠(정념)와 삼빠자나(정지)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내 몸에 불청객이 들어 왔다. 순식간에 세력을 엄청나게 확장하여 집어 삼키려고 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자라면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괴로움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육체적 고통에서 끝내야 한다.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마법의 주문도 좋다.

니까야 도처에 마법의 주문 정형구가 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암송하는 것이다. 오온이 갈애와 자만과 견해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오미크론은 시간 지나면 해결 되는 문제이다. 설령 억만대군이 집어 삼키고자 해도 마법의 주문을 외면 퇴치 될 것이다. 그리고 맛지마니까야를 읽으며 보낼 것이다. 진정한 승리자는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는 자이다.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3)

2022-04-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