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파리코뮌과 광주코뮌의 공통점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20. 23:19

파리코뮌과 광주코뮌의 공통점은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로 시작되는 노래가 있다. 오월의 노래이다. 계절의 여왕 오월의 노래가 아니다. 가수 사월과 오월장미노래도 아니다. 피로 물든 오월 광주에 대한 노래이다.

 

정찬주 작가의 소설 광주 아리랑이 있다. 표지를 보면 꽃잎이 있다. 꽃잎에서 마치 아주 작은 알갱이들이 떨어지는 모습이다. 아마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본다. 소설에서는 그날 장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런데 관광 호텔 앞에서 청년이 갑자기 장갑차 뚜껑을 열고 나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시민들이 박수치고 환호했다. 나상옥이 걱정했던 대로였다. 청년은 러닝셔츠를 찢어 머리에 두르고 티를 벗어 흔들었다. 누군가가 태극기를 던졌지만 장갑차 너머로 떨어졌다. 그 순간 관광호텔쪽에서 총성이 한 방 울렸다. 청년의 목에서 붉은 피가 솟아 나왔다.”(광주 아리랑 1332)

 

그날은 521일이다. 공수부대가 최초로 발포한 날이다. 그날 한 청년이 호기롭게 장갑차를 타고 도청 분수대 광장을 돌다가 멀리서 저격된 것이다. 그때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뛰쳐나와 시위를 하다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후에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뛰쳐나오려는 사람들을 말리고서야 멈추었다고 한다.

 

79학번이다. 80년에 서울의 봄을 맞이했다. 그러나 희망과는 다르게 보기 싫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요즘처럼 뉴스를 보기 싫었다. 그래서 도피처로 군대에 자원에 입대했다. 군대 28개월을 마치고 19839월에 복학했다.

 

복학해 보니 세상이 많이 달라 있었다. 군대 가기 전 80년의 낭만적 분위기와는 달랐다. 긴장된 분위기가 역력했다. 아무도 시국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다음 해 1984년이 되자 시위는 일상화되었다. 그때 불리워진 노래가 있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로 시작되는 오월의 노래였다.

 

대학가에서 오월의 노래가 불리워졌을 때 붉은 피의 의미를 잘 몰랐다. 그저 금남로에서 총에 맞아 피를 흘리다 죽은 것쯤으로 알았다. 그러나 최근 이삼년 광주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 노래 가사가 나온 배경을 알게 되었다. 저격 받아서 피를 뿌리면 또 다른 사람들이 뛰쳐나가 피를 흘린 장면에 대한 것이 노래 가사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금남로에 뿌려진 붉은 피는 항쟁으로 희생당한 모든 사람들의 피일 것이다.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잘 모른다. 그러나 대자보가 붙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또한 리포트 형식으로 된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잊고 살았다.

 

광주에 대하여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9년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석하고 나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추모제에 대불련 전세버스를 타고 참가한 것이다. 처음으로 망월동 묘역에 가보았다. 그동안 노래로만 듣던 곳이다. 너무 늦게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이후 매년 찾고 있다.

 

올해도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가한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날이다. 대불련 전세버스를 타고 출발한다. 망월동 묘역에 들른 다음에 조선대 행사장에 갈지는 알 수 없다. 2021년 추모제 때는 망월동 5.18묘역에서 추모제를 진행한 바 있다.

 

광주항쟁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여러 책을 접하면서 내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광주항쟁 관련 서적으로는 녹두서점의 오월윤상원 평전을 읽었다. 소설로서는 광주 아리랑’ 1권과 2권을 읽었다. 영화로서는 다큐 영화 김군을 보았다. 이런 자료를 접했을 때 막연히 알고 있었던 광주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1980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알만한 사람들은 광주민중항쟁이라고 부른다.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은 의미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주체를 누구로 보는가에 달렸다.

 

민주화운동이라는 말은 포괄적 개념이다. 광주에서 있었던 사건도 민주화운동의 한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운동권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식인들도 포함될 것이다. 물론 시위에 참여했던 시민들 모두도 포함된다. 그러나 항쟁 개념은 다르다. 그것은 무장투쟁의 의미가 강하다. 총을 든 시민군이 떠오른다. 낮은 지위의 하층 사람들이 주도한 혁명적 성격의 항쟁이다.

 

작년 6월 김상윤 선생 자택을 방문했다. 광주항쟁 유공자 집안의 어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때 서재에서 받은 책이 있다. 그것은 아시아의 민중봉기라는 제목의 책이다. 조지 카치아피카스가 지은 책이다. 거의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인데 다 읽지 못했다.

 

 

책을 보면 제12장에 자유로운 코뮌 만들기가 있다. 이 장에서는 광주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다루었는데 광주코뮌이라고 했다. 이 말은 1871년 파리코뮌을 염두에 두고 쓴 말로 본다.

 

파리코뮌과 광주코뮌의 유사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저자는 “1)민주적 의사 결정을 위한 민중적 기반의 자연발생적 등장, 2)아래에서 시작된 무장 저항, 3)도시에서 범죄행위 감소, 4)시민사이에 진정한 연대와 협력이 존재, 5)계급, 권력, 지위에 따른 위계제 중지, 5)참여자 내부의 분열”(578)을 들었다.

 

광주에서 민중봉기는 자연발생적으로 발생되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파리코뮌처럼, 광주 민중은 이길 수 없는 세력에 맞서 자생적으로 들고 일어났다.”(579)라고 했다. 이와 같은 1980년 광주에서의 저항은 1894년 농민전쟁과 1929년 학생저항과 맥을 같이 한다고 했다. 불의에 대한 불만이 쌓이면서 자발적으로 발생된 것이다.

 

파리코뮌은 70일간 버텼다. 이에 반하여 광주코뮌은 6일간 지켰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수천 명의 민중이 용감하게 싸워서 군대를 도시에서 몰아냈다. 그들은 해방된 공간을 6일간 지켰고, 파리코뮌보다는 훨씬 짧은 기간이었다.”(580)라고 했다.

 

광주항쟁을 코뮌으로 설명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놀라울 것도 없다. 기간만 짧았을 뿐이지 놀라운 자치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광주봉기는 군부독재나 소수 기득권층보다 수백만 민중이 훨씬 더 현명하게 스스로 통치할 역량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585)라고 했다.

 

2020년 김동수 열사 추모제 때 상무대 영창을 투어한 바 있다. 그때 해설사가 한 말이 있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하여 두 단어로 요약했다. 그것은 민주대동세상이라는 말이다. 민주라는 말은 많이 들어 보아서 알고 있지만 대동세상(大同世上)이라는 말은 생소했다.

 

19805월 광주는 대동세상이었다. 대동세상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는 항쟁의 주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선 운동권이나 대학생도 있었지만 기층민중이 대부분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구두닦이 소면, 여성, 보통 사회의 바닥이라고 간주되는 사람들이 해방된 도시에서 평등하게 참여했다.”(586)라고 설명했다.

 

광주봉기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이는 어떤 운동권 세력이 있어서, 어떤 혁명세력이 있어서 계획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오히려 운동권 세력이나 혁명세력은 숨어 버렸다. 일선은 도피해 버리고 이선이 나섰다. 그리고 사회의 밑바닥인 사람들이나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적극 참여했다. 이는 시민군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805월 광주항쟁은 무장투쟁이었다. 이는 대학가에서 낭만적인 데모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시민들이 총을 든 것이다. 물론 자위권 차원에 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선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의롭지 않은 세력이 힘으로 제압하고자 했을 때 자위권 차원에서 총을 들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민주화운동은 1980년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갈린다.

 

광주봉기는 아시아 국가들에게 하나의 선례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투쟁의 상징으로서 광주는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계속 영감을 준다. 광주봉기는 보통 사람들이 권력을 자신의 손으로 쟁취한 사례로서 이후 동아시아 사건들의 선구였다.”라고 써 놓았다. 그래서일까 광주항쟁은 홍콩과 미얀마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19876월항쟁과 2016년 촛불항쟁에도 영향을 주었다.

 

광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미 끝났다. 대통령 선거 때 각후보들은 헌법의 전문에 광주항쟁 정신을 삽입하겠다고 했다. 어느 대통령이든지 5.18광주묘역을 참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침묵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항쟁의 의미를 인정하지만 일부 소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광주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광주항쟁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새로운 것이 드러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광주에서 있었던 사건은 민주화운동이라기 보다는 항쟁이라고 보아야 한다. 운동권 일선에 있었던 사람들이나 지식인들은 숨어버린 상황에서 운동권 이선에 있었던 사람들이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쟁취해 낸 하나의 코뮌이었던 것이다.

 

2019년 처음으로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석했을 때 지선 스님이 말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었다. 어느 시대에서나 지식인은 용기가 없다고 했다. 광주에서도 그랬다는 것이다. 항상 희생당하는 자들인 하층민중이었다고 말했다. 광주에서 상황도 그랬다. 그래서일까 5.18묘역에는 시민군이 트럭을 타고 무장투쟁하는 장면이 상징적은 조형물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주는 봉사자들의 모습이 또한 조형물로 만들어져 있다.

 

5.18묘역에는 갖가지 사연으로 죽은 자들의 무덤이 있다. 무덤의 주인공들을 보면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운동권이나 혁명가들이나 지식인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가장 힘없고 천대받고 차별받던 기층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한 봉기이자 항쟁이자 코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광주민중항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2022-05-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