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는 이제 열여섯살 먹은 학인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20. 08:01
나는 이제 열여섯살 먹은 학인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어떤 이에게는 희망의 아침일 수 있고 어딴 이에게는 절망의 아침일 수 있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아침이 찾아 온다.

매일 새롭게 맞는 아침이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모른다. 나이가 말해 줄 것이다. 나이에다 일년 삼백육십오일을 곱하면 이만번 가까이 되지 않을까? 그 오랜 세월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과거를 잘 되돌아보지 않는다. 영광된 날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하루를 헛되이 보낸 날이 대부분인 것 같다. 세상의 흐름대로 산 것이다. 탐, 진, 치로 산 것이다.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 가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가르침을 모른다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요즘 나의 일상은 가르침과 함께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글을 쓰는 것이 그렇다.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말한다. 글에 경전 문구 하나라도 들어가야 한다.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은 새겨야 한다. 그래서 게송 외우기를 하고 있다. 외운 것은 암송해야 한다. 여러 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을 암송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하나 더 추가된 것이 있다. 그것은 경전읽기를 말한다. 책읽기를 일상에 추가한 것이다. 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만 읽었던 것이다.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은 그것은 경전읽기가 아닌 것을 알았다.

경전은 매일 읽어야 한다. 하나의 경전을 선정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는 것이다. 읽되 천천히 읽어야 한다. 진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뜻을 새기면서 읽어야 한다.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횡재한 것 같다.

요즘 나의 일상은 쓰기, 암송하기, 읽기가 되었다. 이것을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지난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마음은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는 것 같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보면 부끄럽고 창피하다. 하루하루 헛되이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귀중한 시간을 탐욕으로 분노로 어리석음으로 보냈던 것이다. 누가 인도해 줄 사람이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나의 무명에 기인한다.

요즘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다. 육십갑자 한사이클이 지나갔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다. 아니 애기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겉모습만 나이 들었을 뿐 정신적으로는 미숙한 것이다. 자식보기에도 부끄럽고 창피할 때가 있다.

나는 어른일까? 가르침을 알기 전에는 어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어른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르침을 알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본다. 사십 중반때 알았으니 늦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보니 늦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불교와의 인연은 2004년에 시작되었다. 도심포교당의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스스로 혼자 공부 했다. 삶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닥치는대로 읽어 보았다. 현실이 고단한 이유도 있었다. 나의 힘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부처님 가르침에 분명히 해법이 있을 것 같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해법이 있었던 것이다. 평소 궁금하게 생각하던 것이 다 있었다. 아니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초기불교를 알게 되면서 의문이 풀렸다.

불교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다. 초기불교를 알게 된 것은 축복이다.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축복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모두 쏙쏙 받아 들일 수 있는 가르침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버릴 것이 없다. 이런 가르침이 있었는데 헤맸던 것이다.

늘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다. 오늘도 경전을 근거로 해서 글을 쓸 것이다. 글을 쓸 때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의미와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한다. 그래서 반드시 제목을 달고 마칠 때는 날자와 함께 서명을 한다. 이런 세월이 2006년 이후 16년 되었다.

나의 나이는 몇살일까? 육십갑자가 한바퀴 지났기 때문에 오래 살았다. 그러나 나의 나이는 이제 열여섯살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한 해부터 카운트한 것이다. 이제 청소년기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나의 삶은 학습기이다. 바라문 인생사주기에서 학습기와 같은 것이다. 학습기를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고 하는데 이를 범행기라고도 한다. 청정범행이라고도 한다. 성적교섭이 없는 순결한 삶의 의미도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청정한 삶'으로 번역했다.

머리맡에 맛지마니까야가 있다. 맛지마니까야를 읽다가 브라흐마짜리야와 관련된 구절을 하나 발견했다. 마치 보석을 발견한 것 같다. 그것은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최상의 청정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성취하길 바라는 까닭에"(M70)라는 구문이다. 여기서 청정한 삶은 브라흐마짜리야를 번역한 것이다.

청정한 삶,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해탈과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이는 팔정도 수행으로 가능하다. 팔정도 수행을 하여 아홉가지 출세간법, 즉 사향사과와 열반을 이루는 것이다. 청정한 삶은 최상의 지혜를 얻었을 때 완성된다. 궁극적 앎이다.

부처님은 제자가 죽었을 때 "궁극적 앎을 성취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궁극적 앎이란 무엇일까? 이는 다름아닌 아라한이 된 상태를 말한다.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이다. 그래서 궁극적 앎에 도달한자, 최상의 지혜를 성취한 자는 이렇게 선언한다.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이것을 아라한 선언이라고 한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번뇌가 완전히 소멸 되었을 때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다. 더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번뇌가 완전히 소멸되었을 때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래서 "나빠랑 잇타따야"라고 선언하는데, 본래 이 말은 "다시는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전재성 선생은 일상적 용어를 사용하여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했다. 청정도론의 저자인 5세기 붓다고사는 "이빠랑 칸다산따낭 낫티"이라고 해석했다. 이말은 "다시는 존재의 다발(오온)의 상속은 없다."라는 뜻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삶이 괴롭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소까빠리데바둑카도마낫수빠야사(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십이연기에서도 볼 수 있고 사성제의 고성제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말은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다섯 단어가 합쳐진 복합어이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삶은 절망으로 끝난다.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절망하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가만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그래서 출가하게 된다. 출가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빠졌다. 나는 괴로움에 빠졌고 괴로움에 사로잡혔다. 나는 이러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을 종식시키는 것에 대해 알아야겠다."(M68)

수많은 출가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계형도 있고 도피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괴로움에 대해서 절절하게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를 설한 이유가 된다.

새벽에 엄지로 치다보니 날이 훤하게 밝았다. 오늘도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글을 쓰고, 경을 암송하고, 경전을 읽을 것이다. 하루라도 행하지 않으면 마음은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다.

나는 배우는 학인이다. 아직까지 한번도 교단에 서 본 적이 없다. 누군가 강연이나 법문을 하라고 한다면 절대 사양한다. 남 앞에 설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나는 이제 열여섯살 먹은 학인이다.

2022-05-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