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그들이 결사항전(決死抗戰)했기 때문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18. 08:26

그들이 결사항전(決死抗戰)했기 때문에

 

 

해마다 오월 그날이 오면 가는 곳이 있다. 김동수 열사 추모제이다. 서울에서 5월 21일(토) 전세버스가 출발한다. 대불련(전국 대학생 불교 연합회)에서 진행하는 것이다. 올해로 세 번째 참가한다.

 

작년에는 추모제가 없었다. 코로나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5.18국립묘지를 참배했다. 그곳에서 김동수열사를 비롯하여 그날 도청에서 죽은 윤상원, 김영철, 박병규 열사의 묘를 참배했다.

 

올해 김동수 열사 추모제는 조선대학교에서 열린다. 대불련 총무역할을 하는 최희숙 님이 보내 준 자료를 보니 조선대 서석홀에서 열린다. 조선대 총장도 참석하여 축사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 볼 수 없는 것이다.

 

 

2부를 보니 김동수 열사와 함께한 사람들이라 하여 '순수한 청년 김동수'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송현순, 오원재, 이정국, 이남 선생을 말한다. 이 중에서 이남 선생은 현재 김동수 열사 추모회장이다. 2019년 처음 대불련 버스를 탔었는데 그때 당시 알게 되었다.

 

추모제에는 동영상도 있다. 동영상 제목은 ‘5.18항쟁. 그는 왜 총을 들었나?’이다. 김동수 열사가 총을 든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아마 김동수 열사를 잘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식순에서 소개된 사람들을 보았다. 위성삼, 마상훈, 이순규, 김희송 선생의 이름이 보인다. 이 중에서 이순규 선생은 안면이 있다. 2019년 추모제에 참가했는데 그때 뵈었다. 연세가 많은 대불련 선배이다. 김동수 열사 시신을 수습하여 망월동에 묻었다고 한다.

 

식순에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 하여 명단이 소개 되어 있다. 명단에는 오정우, 조강철, 김정효, 배훤희, 김용대, 어머니, 김동채, 김동룡, 변미자 선생이 보인다. 여기서 어머니는 김동수 열사 어머니를 말한다. 김동채 선생은 김동수 열사 동생일 것이다. 조강철 선생 이름도 눈에 띈다.

 

조강철 선생은 재가불교활동 하면서 알게 되었다. 작년 김상윤 선생 자택을 방문했을 때 함께 갔었다. 조강철 선생은 5.18당시 계엄군에게 죽도록 맞았다고 한다. 간신히 황금동으로 탈출했는데 그곳 아가씨들이 숨겨 주어서 살았다고 한다. 전설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김동수 열사는 마지막날 도청에서 죽었다. 도청에서 죽은 15명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때 당시 조선대 전자공학과 3학년 학생으로서 대불련 광주전남지부장을 했었다.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준비하던 중 5.18을 맞은 것이다.

 

대불련에서는 해마다 김동수 열사를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김동수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다. 2019 서울에서 전세버스가 출발했는데 그때 탑승한 바 있다. 대불련 출신은 아니지만 열사의 희생정신에 공감한 것이다.

 

2020년 추모제에서도 전세버스에 탑승했다. 2021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전세버스가 출발하지 못했다. 코로나가 끝나가자 올해 전세버스가 출발한다. 

 

김동수 열사에 대하여 안 것은 우연이었다. 일 때문에 사람을 만났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김동수 열사 친구였다. 그때가 2006년도의 일이다.

 

K는 김동수 열사와 같은 학교 같은 학번 같은 과였다. 조선대 78학번 전자공학과 동기였던 것이다.

 

K는 일 때문에 만난 사회친구이다. 나보다 한학번이 빠르고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친구처럼 지낸다. 이후 종종 저녁에 식사자리를 마련했는데 광주항쟁과 김동수 열사에 대하여 들었다.

 

K가 기억하는 김동수 열사는 어떤 것일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김동수 열사가 광주에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죽었는지 잘 알지는 못하는 것 같다. K에 따르면 저격되었다고 하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자신도 기억이 희미하다고 한다. 김동수 열사는 도청에서 결사항전하다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K는 구호대로 활동했다. 부상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는 등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 중에는 총에 맞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총에 맞으면 어떻게 될까? K에 따르면 힘이 빠진다고 한다. 힘이 빠져서 나른한 상태가 됨을 말한다. 총맞은 자가 총상을 무릎 쓰고 싸우는 모습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K로부터 광주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날 도청에 들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 친구들과 의논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생각나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K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해마다 오월 그날이 오면 학과 동기들이 모인다고 한다. 그날은 인사불성이 되도록 소주를 마시는 날이라고 했다. 소주를 마시기 전에 먼저 의식을 치룬다고 했다. 어떤 의식인가? 첫 잔을 들고서 동수야, 미안하다.”라며 바닥에 턴다고 했다.

 

광주항쟁에서 죽은 자도 있고 살아남은 자도 있다. 죽은 자는 살아남은 자들이 기억하고자 한다. 추모제 형식을 빌어 기억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평생 부채 의식을 가지고 살아 간다. 2019년 추모제 때도 그랬다.

 

2019년 김동수 열사 추모제가 조선대에서 열렸다. 그때 대불련 버스가 서울에서 출발했는데 각자 소개 시간이 있었다. 가장 높은 학번부터 발언이 있었다.

 

김동수 열사 학번과 비슷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채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로서 미안함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너무 오랜만에 찾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무관심 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 사건이 일어난지 이제 42년이 되었다. 산 자들은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묘지 동판에 있는 열사의 사진은 21세의 얼굴이다. 그날 이후 시간이 딱 멈추어 버린 것 같다.

 

어느 날 K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 그때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물어본 것이다. K죽은 놈만 불쌍하지.”라며 말했다. 가벼운 물음에 가볍게 대답한 것이다. 진심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생각하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때 죽은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살아 남아서 이렇게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평생 괴롭게 살아 간다면, 한평생 의미 없이 살아 간다면 짧고 굵게 사는 것만 못할 것이다.

 

오래 산다고 해서 축복은 아니다. 탐욕으로 사는 자가 오래 살면 살수록 악업만 늘어난다. 분노로 사는 자도 어리석음으로 사는 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길고 가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이익 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더 좋은 것은 타인도 이익 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타가 이익 되는 삶을 산다면 짧고 굵게 살아도 후회 없을 것이다. 김동수 열사도 그런 케이스라고 본다.

 

불교계에서는 김동수 열사를 보살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김동수열사'라기 보다는 김동수보살로 부르기도 한다. 김동수 열사가 왜 김동수 보살인가? 이는 자타의 이익을 위해 짧고 굵게 살았기 때문이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도청에 들어 간 것이다.

 

김동수 열사는 도청에서 결사항전(決死抗戰)하다가 죽었다. 그렇다고 총을 쏜 것은 아니다. 자위적 차원에서 총만 들었을 뿐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항전한 것은 도청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지키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순순히 도청을 내주었다고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 광주를 기리는 행사는 없었을 것이다. 광주는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폄하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도청에서 뻔히 죽을 줄 알고 결사항전 했기 때문에 훗날 광주정신을 되찾아 온 것이다.

 

도청을 순순히 내 주었다면 되찾아 올 것도 없었을 것이다. 끝까지 저항했기 때문에 되찾아 온 것이다. 그것은 도청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되찾아 온 것이다. 이런 점을 훗날 역사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5.18묘역에서는 그날 마지막날 도청에서 결사항전하다 죽은 15명을 동판으로 제작하여 특별하게 기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윤상원(31, 서점종업원), 민병대(20,종업원), 김동수(21, 조선대 3), 박병규(20, 둥국대), 유동운(19, 한신대 2), 서호빈(19, 전남대), 김종연(19, 재수생), 박성용(18, 조대부고 3), 안종필(16, 광주상고 1), 문재학(16, 광주상고 1), 이강수(19, 재수생), 홍순권(19, 페인트공), 이정연(20, 전남대), 문용동(26, 호남신학대), 박진홍(21, 표구사 점원)

 

 

올해도 광주행 전세버스를 탈 것이다. 이번에 타면 세 번째이다. 대불련 출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낯익은 사람들이 있다. 세 번째 만나면 더욱 더 반가울 것이다. 조선대 현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도 있다. 광주에 사는 법우님들도 보게 될 것 같다.

 

살아남은 자들은 열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 또한 광주민중항쟁에서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추모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을 살아남은 자들은 지켜내야 한다. 그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이 결사항전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오늘날이 있다.

 

 

2022-05-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