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13. 07:01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블로거의 글은 길다. 긴 글은 에스엔에스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잘 써도 처다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이는 글이 길다고 불평한다.

"아뚤라여, 이것은 오래된 것이니
지금 단지 오늘의 일이 아니다.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고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하니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Dhp.227)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말을 많이 하면 말이 많다고 비난 한다. 가만 입 다물고 있으면 침묵한다고 비난하다. 중간으로 말해도 비난한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까?

부처님도 비난 받았다. 부처님이 진리를 설할 때 때로 길게 설했고 때로 침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사람들은 길면 길다고 비난하고, 침묵하면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중간으로 말하면 중간으로 말한다고 비난했다. 주석에 따르면, 부차님은 “어리석은 자들이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고려할 것이 못된다.”(DhpA.III.325-329)라고 했다.

인터넷에 매일 글을 올리는 블로거이다. 블로거라고 말하는 것은 딱히 불러달라고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나 소설을 쓰는 작가도 아니고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기자도 아니다. 하루하루 생업에 종사하는 자영업자가 매일매일 그날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글로 표현하기 때문에 블로거라고 하는 것이다.

블로거의 글은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게제 된다. 여기서 블로그는 홈페이지와 같다. 블로그가 집인 것이다. 그런데 블로그의 글쓰기는 대체로 길다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글로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블로그는 전문가 영역으로 본다.

블로그 독자들이 있다. 오래 되었다. 블로그는 2005년에 만들었다. 블로그 역사와 함께 하는 분들이 많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인터넷 블로그에서는 필명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블로그 독자들은 글이 아무리 길어도 글이 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은 실시간 소통을 특징으로 하는 페이스북과 매우 대조적이다.

페이스북은 에스엔에스 영역에 속한다. 실시간 소통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짤막한 글이 주류를 이룬다. 때로 사진 한장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에스엔에스에서 긴 글은 인기가 없는 것 같다. 특히 감각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이다. 초분을 다투는 시대에 한가하게 긴 글을 읽을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글이 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는 요약해서 올리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요약된 글도 있다. 결론 부위에 말하고자 하는 것이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글의 말미만 봐도 된다.

글을 길게 쓰는 것은 쓰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꼭 써야 할 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글이 길어진다. 경전 문구라도 인용되면 더욱더 늘어진다. 그러나 읽어서 남는 것이 없는 글은 쓰지 않는다. 무언가 하나라도 건질만한 글을 쓰고자 한다.

주로 페이스북에서 시간 보낸다. 페이스북에는 쟁쟁한 사람들이 많다. 이 사회에서 한가락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본다면 페이스북은 지식인들의 놀이터 같다.

페이스북은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공간이다. 그래서일까 오피니언 리더들은 짤막한 메세지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자 한다. 때로 시덥잖은 농담도 오간다. 정작 쓰고 싶은 것은 감추어 두고 나중에 논문이나 법문이나 책으로 내고자 하는 것 같다.

블로거는 글을 이용해서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얻고자 하지 않는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쓰고 싶은 것을 쓰기 때문에 글로서 이익보고자 하는 것이 없다. 블로거는 당연히 명예도 없다. 지위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이 자꾸 길어지는 것 같다. 블로거는 실시간 소통 공간에서 콘텐츠로 승부하고자 한다.

매일 올리는 긴 글은 나중에 시기별로 카테고리별로 묶으면 책이 된다. 매일 올리는 블로거의 잡문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작성한 것이다. 나의 모든 것과 같다. 이를 모두 세상에 공개한다. 모두 가져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당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대체로 진지한 글쓰기를 보기 힘들다. 페이스북 생태계가 이런 것이라면 나도 이런 분위기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마치 구호를 외치듯이 매우 짦은 단문을 올려 놓는다든가 사진으로 말하는 것이다.

블로거의 긴 글은 페이스북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어쩌면 민폐 끼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올리는 것은 그래도 누군가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위해서 글을 올린다. 글이 길다고 비난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간단히 무시하면 그만이다.

"깨어진 놋쇠그릇처럼
그대 자신이 동요하지 않으면,
그것이 열반에 이른 것이니
격정은 그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Dhp134)

금이 간 놋쇠 그릇이 있다. 때려도 소리가 잘 나지 않을 것이다. 종은 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깨진 종에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 소리가 잘 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땅 바닥에 있다면 어떤 소리가 날까? 아마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비난에 대하여 깨진 놋쇠그릇처럼 동요하지 말라고 했다.

"오로지 비난만 받는 사람이나
오로지 칭찬만 받는 사람은
과거에 없었고
미래에 없을 것이고 현재에도 없다."(Dhp228)

세상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바람부는 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덟 가지 바람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떤 바람인가? 이익과 불익,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라는 여덟 가지 바람을 말한다. 바람부는 대로 살아가는 세상사람들이 비난을 일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현자도 예외없이 비난 받는다.

"아주 단단한 바위덩이가
비람에 움직이지 않듯,
이와 같이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 (Dhp81)

현자들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바람부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난과 칭찬에 대해서는 바위산처럼 살라고 했다.

비난을 하면 깨진 종처럼 반응을 보이면 그뿐이다. 땅 바닥에 버려진 깨진 종은 아무리 쳐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칭찬하는 것에 고무되어서도 안된다. 바위산처럼 살아야 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들이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고려할 것이 못된다."(DhpA.III.325-329)라고 했다. 무시하면 그만이다.

부처님도 비난 받았다. 이 세상에 비난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또한 이 세상에 칭찬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군가 나를 칭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경우는 경계할 것이다. 왜 그런가? 칭찬이 언제 비난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본래 스토커는 광팬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서 관심 보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올린 글이 공감 받으면 글 쓴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쳐서 "존경합니다."라거나,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경계한다.

지나친 칭찬은 언제 비난으로 돌변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자의 경우는 다르다. 주석에서는 "현자나 지혜로운 자가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자는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아야 한다.”(DhpA.III.325-329)라고 했기 때문이다.

에스엔에스는 실시간 소통공간이다. 긴 글은 환영 받지 못한다. 글이 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고자 한다. 부처님도 비난 받는 마당에 누구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 노력할 필요 없다. 그들이 비난하고 모욕을 주면 무시하면 그뿐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비난은 고려할 것이 못된다.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인정투쟁이다. 그러나 현자들의 충고와 칭찬은 수용한다. 다음은 묘원선생의 비난이라는 시이다.

비난

세상을 바르게 사는 방법 중의 하나가
비난을 감수하는 것이다.

누구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말을 하지 않으면
말이 없다고 비난받는다.

말을 하면
말이 많다고 비난받는다.

필요한 말을 하면
필요한 말만 한다고 비난받는다.

바른 행동을 하면
잘난체한다고 비난을 받는다.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면
나쁘다고 비난을 받는다.

이름 없이 살아도 비난을 받고
이름이 나면 더 비난을 받는다.

살인을 한 범죄자도 비난을 받지만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는 더 많은 비난을 받는다.

비난을 받고 똑같이 상대를 비난하면
상대와 내가 같은 사람이다.

상대의 비난을 상대의 일로 두고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다.
(묘원 선생)

2022-05-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