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그는 왜 도청에 남았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22. 08:49

그는 왜 도청에 남았을까?


장미의 계절이다. 아파트 담벼락에는 울긋불긋 장미가 절정이다. 조선대에서도 장미가 한창이다. 오월에 피는 붉은 장미는 붉은 피가 연상된다. 광주에서 피는 장미가 그렇다.

광주에 다녀왔다.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석한 것이다. 대불련에서 마련한 전세버스를 타고 갔다. 5 21일 아침 양재역 탑승했다. 조선대학교 서석홀에서 열리는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서 몸을 실었다.

이번으로 세 번째 전세버스에 탑승했다. 낯익은 얼굴들이 많다. 불과 세 번 밖에 만나지 않았음에도 오랜 지기같다. 다음에도 참석하면 명예 대불련이라도 되는 것일까?

매년 전세버스에 탑승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아마도 김동수라는 캐릭터에 있다고 본다. 그는 왜 도청에 들어 갔을까?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살았어도 죽은 자처럼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죽었어도 산 자처럼 사는 자가 있다. 김동수 열사는 후자에 속할 것이다. 이에 김동수 열사 추모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이남 선생은 "김동수 열사는 복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양재역에서 7시 반에 출발한 버스는 익산 미륵사지에 10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다. 행사는 오후 2시 반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미륵사지 순례를 하고 인근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모두 열명 탑습했다. 평소보다 적은 숫자이다. 커다란 전세버스가 널널했다. 전반적으로 추모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런 것일까? 코로나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선 영향도 있을 것 같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진보측에서는 정권을 내주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더욱 놀라운 일은 새정권 사람들이 대거 5.18 기념행사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착잡 했을 것이다.

한겨레신문에 인상적인 칼럼이 실렸다고 한다. 냉전으로 먹고 사는 세력들은 냉전이 종식되자 할 일이 없어 졌다고 한다. 민주세력은 어떨까? 5.18 광주정신은 민주세력의 전유물과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집단으로 몰려와서 주먹질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을 때 허탈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다. 이런 것도 그들의 고도의 전략에 따른 것일까?

점심식사 후에 망월동 5.18 묘역 참배하기로 했다. 그러나 취소되었다. 잘못하면 버스가 빠져나오는데 한시간 걸릴지 모른다고 했다. 항쟁주간을 맞이하여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곧바로 조선대로가기로 했다.

 


조선대에서는 장미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드넓은 캠퍼스는 아름답다. 신록의 향연으로 가득하다. 여기에 갖가지 종류의 장미가 만발하여 캠퍼스는 그야말로 꽃대궐이 되었다.

 


장미 중에도 빨간장미가 있다. 장미를 장미답게 하는 색깔이다. 한때 광주사람들은 붉은 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피 때문이다. 광주항쟁을 대표하는 오월의 노래 가사에서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가 연상되었을지 모른다. 더구나 노래 말미에는 "!!!"로 끝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스팔트에 피를 뿌렸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해마다 피는 오월의 붉은 꽃을 보면 피가 연상되었을 지 모른다. 그래서 오월의 노래가 나왔을 것이다. 꽃잎을 보면서 피를 생각한 것이다. 그날의 피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인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땅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김동수 열사 추모비에 헌화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커다란 추모비이다. 캠퍼스 한켠에 이런 추모비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연을 들어 보니 이 추모비를 세우기 위해 지난한 노력이 있었다. 열사의 친구들과 선배들과 후배들의 노력으로 설립된 것이다.

 


조선대 캠퍼스에는 김동수 열사 추모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추모공원 이곳 저곳에는 여려 개의 추모비가 있다. 민주화 운동에서 죽은 자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다른 캠퍼스에서는 보기 힘들다. 아마 광주라는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여 진다. 현대사에 있어서 광주가 민주성지라고 불릴 만하다.

 


김동수 열사를 잊지 않고 찾는 사람들이 있다. 안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조강철 선생은 부부가 함께 참석했다. 이순규 선생은 자료를 가지고 왔다. 김동수 열사에 대한 자료를 한보따리 가져온 것이다. 그 중에는 열사의 학생증도 있다.

 


사진속의 열사는 젊다. 스무살 청년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 42년이나 흐른 것이다.

김동수 열사 유품에서 메모를 하나 보았다. 귀중한 자료가 될 것 같아서 사진을 찍어 두었다. 법정스님의 법문을 듣고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메모에는 법정스님이 평소 하던 말씀이 들어 있다. 메모에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라는 문구가 보인다. 스님이 어느 때 어느 법회에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메모에는 법정스님이 말씀했던 것이 세 가지로 요약되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나누어 가질줄 알아야 한다.
2.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3.
고난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평소 법정스님이 말씀했던 것이라고 본다. 특히 스님은 무소유에 대해서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기 보다는 나누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스님을 잘 알고 있는 정찬주 작가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42년 전에 작성되었던 메모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김동수 열사의 메모를 발견한 것은 행운이다. 역사적 사료가 될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촬영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순규 선생에 따르면 김동수 열사에 대한 자료가 무척 많다고 했다. 한박스가량 된다고 했다. 이 자료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순규 선생은 자료를 어딘가에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나이가 팔순가량 되기 때문일까 언제 죽을지 모른 것을 염려한 것이다. 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죽으면 자료가 사라질 것을 염려하는 것 같았다. 김동수 열사 박물관이 세워진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 같다.

오후 3시부터 서석홀에서 추모행사가 시작되었다. 서석홀은 예전에 신광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행사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
부에서 이병채 선생의 노래 공연이 있었다. 이병채 선생은 북을 치며 "꽃아 꽃아 아들꽃아 오월의 꽃아 다시피어나라"로 시작되는 창을 했다. 애절한 내용이다. 이를 들은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김동수 열사의 어머니는 살아 있다. 추모제가 열릴 때 늘 볼 수 있다. 2부 영상기록물을 보니 어머니는 버스가 지나갈 때 마다 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무려 십년 동안 기다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술에 의지해서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2
부에서는 하나의 기록영
상을 보았다. 김동수 열사에 대한 역사찾기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진모영 감독이 제작한 것이다. 제목은 '5.18항쟁. 그는 왜 총을 들었나?’이다.

김동수 열사가 총을 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김동수 열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영상은 훗날 역사적 사료로 남기두기 위한 목적도 있을 것이다. 20분 분량의 기록영상이다.

 


영상에는 열사의 어머니도 나오고 열사의 친동생도 나온다. 열사와 함께 대불련 활동을 했던 동기나 선배의 증언도 있다. 열사와 인연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왜 도청으로 들어 갔을까?"에 대한 것이다.

열사는 마지막날 총을 들었다. 열사는 스스로 도청에 들어 갔다. 도청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들어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영상 제목에서는 "그는 왜 총을 들었나?"라고 했지만 이에 대하여 "그는 왜 도청에 들어갔나?"라고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5.18
과 관련하여 한홍구 선생의 강의를 유튜브로 들어본 바 있다. 한홍구 선생에 따르면 그들이 마지막날 도청에 들어 간 것을 알게 된다면 광주항쟁을 모두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들어간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그들이 결사항전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그들은 시민군이 되어서 왜 최후까지 도청을 사수하려고 했을까?

증언자 중에 열사의 사촌 여동생이 있다. 그녀는 "동수오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도청에 남은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한때 원망 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언제 올지 몰라 기다리는 세월을 살았고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동수 열사는 왜 총을 들었을까? 김동수 열사는 왜 도청에 남았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하고 이런 질문을 한다. 이런 의문과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광주정신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왜 도청에 최후까지 남아 있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김동수 열사에 대한 글을 몇 편 썼다. 이런 의문이 매년 추모제에 참석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 추모제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우연히도 이순규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유품에서 본 것이다. 하나의 메모에서 실마리가 풀린 것이다.

메모는 한장에 불과하다. 수많은 메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것이 단서가 될지 모른다. 법정스님의 법문을 듣고 메모한 것이다.

메모에는 "나누어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고난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이 중에서 두 번째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크게 다가온다.

 


김동수 열사는 대불련 전남지부장을 했었다. 그리고 항쟁기간 중에는 수습위원회에서 활동했었다. 어쩌면 책임질 위치에 있었는지 모른다. 이런 것이 그로 하여금 최후까지 남아 있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까?

열사는 왜 총을 들어야 했을까? 열사는 왜 최후까지 저항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도청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죽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듵어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말에 순응하여 순순히 도청을 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5.18이 역사적 가치를 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항쟁에서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고 본다. 한홍구 선생 말대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저항했기 때문에 나중에 되찾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도청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광주정신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도청에 최후까지 남은 사람들은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고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보살이 된 것이다.

 

21살 청년 김동수는 죽어서 열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행위를 보면 보살행이다. 그래서일까 김동수 열사를 기리는 추모제 포스터를 보면 보살의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다. 보살정신이 아니면 죽고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광주에서 오월은 화창했다.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이다. 온갖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캠퍼스에는 생명의 향연을 보는 것 같았다. 계절의 여왕 오월이 오면 늘 그날도 함께 온다. 그것은 피의 오월이다.

해마다 오월이 오면 그날 흘린 피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은 왜 총을 들었나?"라며 의문해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왜 죽고자 결사항전을 택했나?"라며 의문해 보아야 한다. 이런 의문없이 마치 점령군처럼 묘역에서 주먹질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면 광주정신에 대한 모독이다.

 

2022-05-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