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부서지고 사라지는 상실의 시대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30. 07:19

부서지고 사라지는 상실의 시대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각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시각이 왜 나를 속이는가? 이유는 자명하다. 청각을 예로 들면 알 수 있다.

여기 소리가 있다. 두 손바닥을 부딪쳤을 때 ""하고 소리가 난다. 조건발생해서 그냥 사라진다. 찰라생찰라멸이다. 소리만 그럴까? 냄새도 맛도 감촉도 찰라생찰라멸이다. 그럼에도 유독 형상만은 그대로 있는 것 같다.

눈을 감았다 떠 본다. 종전에 보던 형상은 그대로 있다. 형상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자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어제도 있었다. 내일도 있을 것이다. 마치 눈을 감으나 뜨나 형상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자아도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런 견해가 생겨난다.

"
자아와 세계는 영원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어, 뭇삶들은 유전하고 윤회하며 죽어서 다시 태어 나지만, 영원히 존재한다."(D1)

영원론에 대한 것이다. 디가니까야 1번경 브라흐마잘라경에서 영원론에 대하여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다고 했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고 보는 것이다. 영원주의자가 되는 이유에 해당된다.

저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세월이 흘러 주택단지가 아파트단지로 변해도 저 산만큼은 변화가 없다. 눈을 감아도 저 산은 있고 눈을 떠도 저 산은 그대로 있다. 저 산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것은 조건발생해서 소멸한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그런데 시각만큼은 연기법에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눈을 감아도 그대로 있고 눈을 떠도 그대로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다. 변화가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형상은 영원히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세한 변화가 있다. 단지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일년후가 되면 달라질 수 있다. 십년후면 확실히 달라질 수 있다. 하물며 사오십년 후라면 어떨까?

어제 약사암에서 모임이 있었다. 문수스님 추모제를 성북동에 있는 약사암에서 하기로 한 것이다. 차를 몰고 가기로 했다. 가는 김에 예전에 살았던 동네를 둘러보고자 했다. 삼양동 산동네를 말한다.

 


서울에 온 것은 1969년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이다. 부모님이 농사 짓다가 이농한 것이다. 이농민들은 가진 것이 없다. 대게 산동네에 정착한다. 왜 삼양동에서 살게 되었을까? 먼저 정착한 마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예전 농촌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된다.

무엇이든지 처음 접한 것은 강렬하다. 산동네에서 기억도 그렇다. 산동네는 마치 피난민촌 같았다. 난개발 되어 있어서 환경은 지극히 열악했다.

세든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공동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화장실이 멀어서 요강을 사용했다. 수도도 없었다. 공동우물이 있었지만 급수차가 왔을 때 길게 줄을 서야 했다.

겨울에는 몹시 추웠고 여름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더웠다. 공원도 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집만 있어서 녹색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부모님이 생활력이 있어서 집도 샀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산동네를 벗어날 수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산동네는 어떻게 변했을까? 한번 찾아 가보고 싶었다. 어제 마침 그쪽 방향에서 법회가 있어서 삼양로를 향해 차를 몰았다.

산동네는 미아초교와 송천초교 사이에 있었다. 삼양로를 중심으로 하여 위쪽 경사진 지역에 살았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산동네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대신 대규모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산동네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공중화장실과 우물이 있던 곳에는 삼각산동주민센터가 들어서 있다.

 


왜 사람들은 산동네라고 했을까? 산에 동네가 있어서 산동네라고 한 것이다. 60년대 이농민들이 도시빈민이 되어서 집단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집이 있어도 주소가 없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산75번지이다.

삼양동 산75번지에 살았다. 그런데 주소를 말할 때 누구 댁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75번지에 수십, 수백개의 집이 있는데 집주인 이름을 알려 주어야 주소가 된다.

 


반세기만의 방문이다. 꿈속에서도 나오는 그때 그 시절을 염두에 두고 찾아보았으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 대신 비탈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래도 흔적은 있을 것 같았다. 딱 하나 있었다. 공동화장실로 가는 길이다. 삼양로에서 삼각산동주민센터 가는 길이 약간 굽어졌는데 굽어진 길의 흔적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기억을 되살려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 보았다. 십대시절을 보냈던 집의 위치를 찾아보았다. 비슷한 위치에 섰다. 그러나 옛집은 기억에나 남아 있을 뿐이었다.

허탈했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밀어 버렸을까? 그때 당시에도 재개발 이야기가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현실화된 것이다. 산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추억도 사라진 것 같았다.

 

괴로웠던 시절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되는 것 같다. 산동네를 벗어 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흔적이라도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허탈했다. 그러나 삼양로 아래에는 흔적이 남아 있다.

삼양로 아래에는 비교적 잘 사는 동네였다. 산동네 아이들은 시기심과 질투심이 있었던 것 같다. 집 답게 생긴 집의 대문을 걷어차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시점에서 역전되었다. 삼양로 위쪽에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삼양로 아래쪽은 슬럼화 되었기 때문이다.

송천초등학교 다녔다. 송천초등학교 5회 졸업생이다. 서울이 급격하게 팽창할 때 인구도 급격하게 늘었는데 그때 초등학교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 학교가 이제 50년이 넘었다.

 


초등학교로 가는 길은 변함이 없다. 옛날 그대로이다. 삼양로 바로 아래 급경사 길이 있는데 3층짜리 건물도 그대로 있다. 예전에 의원이 있던 곳이다. 의사는 만능이었던 것 같다. 내과는 물론 전과목 다 진료한 것이다.

 


송천초등학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추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초등학교 가까이 있는 목욕탕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신애탕을 말한다.

신애탕, 얼마만에 보는 이름인가? 50년 전에도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영업도 하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재개발로 인하여 모두 부수고 밀어버리는 마당에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고향마을에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소나무를 보는 것 같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미소 짓는 장면이 있다. 이를 아라한의 미소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유없이 웃지 않는다.

아난다는 부처님이 미소 지은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예전에 이 장소에 번영하고 융성하고 사람이 많고 사람이 붐비는 베바링가라는 이름의 상업도시가 있었다."(M81)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숙명통으로 말했다. 깟싸빠 부처님 시절 당시에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준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땅은 변함없다. 농지가 택지가 되고, 주택단지가 아파트단지로 변해도 땅은 그대로이다. 땅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삼양로를 지날 때 마다 십대시절 산동네에 살았던 기억이 떠올려진다.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마음 속에는 남아 있다. 종종 꿈속에서도 본다. 이렇게 본다면 세월은 무상한 것이다.

세월만 무상한 것이 아니다. 세상도 무상하다. 지금 눈 앞에 있다고 해서 영원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착각이다. 눈을 감아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눈을 떠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서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시각이 나를 속이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지 조건발생하여 그냥 사라진다. 소리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형상은 늘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형상은 소리와 마찬가지로 조건발생하여 그냥 사라진다. 지각과 느낌과 의도와 의식은 어떨까? 소리와 마찬가지로 조건발생하여 그냥 사라진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눈을 감아도 그 자리에 있고 눈을 떠도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나는 왜 여기에 있고, 세상은 왜 여기에 있을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질문같지 않은 질문이 된다. 이에 대하여 시각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본다.

시각이 왜 나를 속이는가? 소리가 조건발생하여 그냥 사라지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형상 역시 조건발생하여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눈을 감아도 형상이 있고 눈을 떠도 형상이 있기 때문에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저 산도 그럴 것이다.

 


저 바위산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삼양로 윗쪽 산동네가 아파트단지로 변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저 북한산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하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있다. 신애탕도 그 자리에 있다.

 

산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목욕 다녔던 목욕탕은 그대로 있다. 삼양로 아래 송천초등학교 부근에 있는 신애탕은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사라지는 상실의 시대에 북한산만큼이나 마음의 위로가 된다.


2022-05-30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언제나 잠을 잘 자게 될까?  (0) 2022.06.01
오월의 끝자락에서  (0) 2022.05.31
다산(茶山)을 생각하면서  (0) 2022.05.26
선과 각의 도시에서  (0) 2022.05.23
그는 왜 도청에 남았을까?  (0) 2022.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