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는 언제나 잠을 잘 자게 될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6. 1. 10:39

나는 언제나 잠을 잘 자게 될까?


내 뜻대로 안되는 것이 있다. 잠자는 것이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잠을 옅게 자면서 꿈에 시달린다. 무의식의 바다에서 헤매다 깨면 허망하다. 나는 언제나 깊은 잠을 잘 수 있을까?

오늘 새벽에 깊은 잠을 잤다. 꿈도 잘 꾸었다. 어제 잠을 자다가 여러 번 자다가 깼는데 막판에 잠을 제대로 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잠 못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체적 문제도 있고 환경적 문제일 수도 있다. 정신적 요인일 수도 있다.

잠을 못 자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추위를 타는 것도 이유가 될 것 같다. 몸이 가늘어서 추위를 잘 탄다. 요즘 같이 난방이 끊긴 계절에도 잠을 잘 못 이룬다.

새벽에 깼다. 전기장판을 켰다. 그리고 항공담요를 허리에 둘러 맸다.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이 효과가 있어서일까 잠을 잘 잤다.

잠을 잘 자면 꿈도 좋다. 잠을 잘 못 자면 꿈이 사납다. 잠을 잘 못 자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꿈을 꾸게 된다. 무의식의 심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가 있는 것 같다. 마치 심해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형태의 생명체가 있는 것과 같다. 나는 왜 잠을 잘 못 자는 것일까?

현실은 불만족스럽다. 늘 욕구불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 갈애의 상태인 것이다. 갈애는 집착의 조건이기도 하다.

갈애에는 감각적 쾌락의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다. 집착은 갈애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집착은 들러붙은 상태이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그것을 조건으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M82)라고 했다.

모든 것은 조건발생이다. 생겨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잠을 못 자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집착 때문인 것 같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꽉 움켜 쥐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꿈도 이와 다르지 않다.

꿈과 같은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나의 의지가 없다. 그래서 무의식의 바다에서 휩쓸려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잠자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모른다. 새벽에 잠에서 깨면 다시 잠자려 하지 않는다.

새벽에 잠에서 깨면 글을 쓴다. 엄지를 이용한 스마트폰 글쓰기를 말한다. 오로지 엄지를 이용하여 스마트폰 자판을 치다 보면 아침 여섯 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했을 때 잠은 고작 서너시간 자는 것이 된다. 다시 잠들면 꿈만 꾸게 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꿈 이야기는 거의 없다. 팔만사천이라는 방대한 초기경전에서 꿈에 대한 경은 한 두개에 불과하다. 그대신 부처님은 늘 깨어 있을 것을 강조했다.

부처님은 늘 깨어 있으라고 했다. 이는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S35.239)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깨어 있어야 할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자가 누운 형상을 취해야 한다.”(A7.61)

잠을 잘 때는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잠을 자야 함을 말한다. 잠 자기 전에도 사띠해야 하고 잠에서 깰 때도 사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종일 늘 사띠해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꿈을 꿀 수 없다.

잠을 잘 때 잠을 깰 것을 염두에 두고 잠을 자게 된다면 꿈을 꾸지 못할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방대한 초기경전에서 꿈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본다.

잠을 많이 자는 것은 좋지 않다. 이는 부처님이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원리는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잠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성적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A3.104)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잠을 많이 자지 않는다 새벽에 깨면 글쓰기나 암송하기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6시까지 그렇게 한다. 새벽 4시대에 깨면 적당한 것 같다. 5시대에 깨면 늦는 것 같다. 3시대에 깨면 이른 것 같다. 2시대에 깨면 너무 빠르다. 1시대에 깨면 잠을 한번 더 자야 한다. 새벽에 잠을 자면 꿈에 시달린다. 무의식의 바다에서 헤매일 때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다.

한때 꿈을 분석하려고 했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심취해서 잠에서 깨기 직전에 꾸는 꿈을 기억하여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고자 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꿈은 상징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무의식의 저편에 있는 것이 나를 알아 달라고 했을 때 이를 의식화해야 된다는 것이다. 꿈을 통해서 마음의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에 대하여 자기완성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나서 꿈을 분석해 보려는 시도를 버렸다.

분명히 무의식의 메세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난 과거의 일에 대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전생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집단무의식일 수도 있다. 그런 꿈의 분석이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꿈을 분석하고자 하면 할수록 꿈에 집착하게 된다. 그것은 아름다운 꿈에 대한 집착이다. 나는 왜 아름다운 꿈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융이 말한 것에 이유가 있다.

융에 따르면, 아름다운 꿈은 자기(Self)와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자아(ego)와는 다른 것이다. 꿈속에서 장쾌한 자연을 보게 되었을 때 감동하게 되는데 장쾌한 자연은 자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꿈속에서 자기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꿈속에서의 장쾌한 자연은 자기가 이미지 또는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을 믿고서 한때 꿈을 꾸고자 했다.

꿈에서 자기를 만나고자 했다. 아름다운 꿈을 꿀 때 자기가 상징적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이를 보고 느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꿈은 거의 꾸지 못한다. 그 대신에 대부분 사나운 꿈을 꾸게 된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꿈이 대부분이다.

아름다운 꿈을 꾸고자 했다. 상징적 이미지로 되어 있는 아름다운 꿈을 꾸어 자기와 만나고자 했으나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예전에 꾸었던 아름다운 꿈을 다시 꾸고자 잠자리에 들었으나 사나운 꿈만 꾸었다.

아름다운 꿈을 바란다는 것은 집착일지 모른다. 놀랍게도 부처님은 아름다운 꿈을 꾸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이라고 했다. 어떻게 아름다운 꿈을 꾸고자 하는 것이 감각적 욕망의 쾌락에 대한 집착이 될 수 있을까? 맛지마니까야 54번 경을 보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
장자여, 한 사람이 아름다운 정원, 아름다운 숲, 아름다운 초원, 아름다운 호수를 꿈을 꾸면서 보다가 꿈이 깨면,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장자여, 이처럼 고귀한 제자는 세존은 감각적 쾌락에 대하여 꿈에 비유하여 말했다. 거기에는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고 재난이 많다.’고 생각하며 그와 같이 올바른 지혜로 봅니다. 그리고 다양하고 다양성에 의존하는 평정을 버리고, 거기서 세속적인 물질에 대한 집착은 남김없이 사라지는, 유일하고 유일성에 의존하는 평정을 닦습니다.”(M54)

부처님은 아름다운 꿈을 꾸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꿈의 비유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해골의 비유 등 일곱 가지 비유 중에서 하나에 해당된다.

꿈은 허망한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아름다운 꿈일지라도 개뼈다귀 같은 것이다. 부처님은 해골의 비유에서 "장자여, 한 마리의 개가 굶주림과 허기에 지쳐서 푸줏간 앞에 나타났다고 합시다. 그 개에게 숙련된 도살자 내지 그 제자가 완전히 잘 도려내어져서 근육 한 점 없이 피만 묻은 해골을 던져주면,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개는 그 완전히 잘 도려내어져서 근육 한 점 없이 피만 묻은 해골을 씹으며, 그 굶주림과 허기에 지친 것을 채울 수 있습니까?”(M54)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꿈을 꾸지 않고자 노력한다. 설령 자기와 만나는 아름다운 꿈일지라도 꿈속의 일이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과도 같다고 했다. 뼈해장국에 뼈다귀가 있는데 발라 먹을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늘 깨어 있으라고 했다. 잠을 잘 때도 깨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사띠하며 잠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꿈을 꾸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했다. 지금 여기에서 그때 그때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해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원리를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S35.23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 몸과 마음은 도적의 소굴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을 지키지 않으면 도둑이 제집 드나드는 것처럼 활개칠 것이다. 그래서 눈과 귀, 코와 혀, 그리고 몸과 정신이라는 감각의 문을 수호해야 한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하물며 꿈은 어떠할까?

꿈은 무의식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다. 의식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알 수 없다. 자는 둥 마는 둥 하여 꿈속에서 헤매는 것은 무의식의 세계를 헤매는 것과 같다. 마치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지 못해서 성문이 열려 있는 것과 같다. 도둑이 제집 드나들 듯하여 이 몸과 마음은 도적의 소굴이 되기 쉽다.

오늘 새벽 오랜만에 좋은 꿈을 꾸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조건을 달리하여 다시 잠들었다. 그래서일까 주인공이 되는 꿈을 꾸었다. 끌려가는 꿈, 휩쓸려 가는 꿈이 아니라 꿈을 주도해 가는 주인공으로서 꿈을 꾼 것이다. 이런 꿈을 꿀만 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꿈을 꾸지 말아야 한다. 도적에게 나를 내줄 수 없다. 성문을 잘 지키고 있어야 한다.

부처님은 늘 깨어 있음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잠을 잘 때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이며"(A7.61)라며 잠자리에 들라고 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수행이다. 사띠수행하는 것이다.

잠을 잘 자는 것도 수행의 힘에 따른다. 나는 번뇌가 많고 집착도 많다. 나는 언제나 잠을 잘 자게 될까?


2022-06-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