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지 말자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일 것이다. 법구경에서는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3)라고 했다.
나는 매일 나자신과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매번 패하고 만다. 그럼에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는다. 언젠가 싸워서 승리하리라고 믿는다.
마음을 조복받기가 힘들다. 이는 테라가타에서 딸라뿟따 장로가 “마음이여, 어찌해야 그대가 내게 항복하겠는가?” (Thag.1135)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마음을 조복받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길들여야 한다. 어떻게 길들이는가? 나에게 있어서는 경전을 읽고, 게송을 외우고, 경을 암송하는 것이 일차적인 마음 길들이기다.
요즘 매일 쓰기, 읽기, 암송하기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모두 마음을 조복받기 위한 것이다. 어느 것이 가장 어려울까? 나에게는 암송하기가 가장 어렵다. 왜 그런가? 힘이 들기 때문이다.
암송하면 에너지가 소모된다. 암송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각오를 하게 된다. 그것은 힘이 들기 때문이다. 기억해 놓은 것을 떠 올리려 할 때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동을 걸어 놓으면 자동적으로 가는 자동차와 같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 대부분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본다. 잠을 자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경을 외운 것이 있기 때문에 머리속으로 암송한다. 어제도 그랬다.
오늘 아침 일찍 일터로 나왔다. 날씨가 좋아서 걸어서 왔다. 집에서 일터까지 20여분 걸린다. 운동 삼아서 걸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없이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걸으면서 암송하는 것이다.
틈만 나면 글을 쓰고, 틈만 나면 경전을 읽고, 틈만 암송하는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아마 이렇게 하는 것도 사띠(sati)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띠는 본래 기억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내가 파악하는 사띠는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늘 떠 올려야 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시간은 늘 사띠해야 할 것이다. 사띠하지 않으면 마음은 늘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다.
오늘 새벽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 있을 수 없다.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를 열어 보았다. ‘마두라 설법의 경’(M84)을 읽었다. 네 가지 계급에 대한 평등의 가르침이다. 사제, 왕족, 평민, 노예가 모두 평등함에 대하여 오계의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반복이 많다. 지루하다고 하여 대충대충 넘어간다면 읽으나마나 한 것이 된다. 반복구문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야 한다. 반복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경에서는 부처님의 제자 깟짜나 존자와 아반띠 국의 아반띠뿟따 왕과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성계급은 행위에 있어서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태생으로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하고 있는 행위에 따라 신분이 결정됨을 말한다. 바라문이라도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되는 것이다.
경은 지루한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막판에 반전이 일어난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다. 아반띠뿟따 왕은 깟짜나존자로부터 가르침을 얻게 되자 “존자 깟짜나께서는 재가신자로서 저를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M84)라고 말한다. 대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매일 장문의 글을 쓰고 있다. 경전과 주석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십년 넘게 오랜 세월 글을 쓰다 보니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어떤 이는 존경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상당히 부담스럽다.
요즘 인터넷시대이다. 인터넷에서는 얼굴과 이름을 숨기고 필명으로 소통하기도한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가 남겨진 흔적을 보고 대강 파악할 수 있다. 이에 글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인터넷에서는 글이 그 사람의 얼굴이고 글이 그 사람의 인격이다. 그렇다 보니 글과 그 사람을 동일시하 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글을 그 사람의 인격으로 보는 것이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매일 장문의 글을 올리고 있다. 주로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나의 글쓰기에 대하여 글의 내용과 나의 인격을 동일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나에게 자주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어서 자신의 견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이런 전화를 받을 때 참으로 난감하다. 아마 그 사람은 글의 내용과 나의 인격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글과 저를 동일시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누군가 나에게 “선생님, 선생님”또는 “스승님, 스승님”하며 떠 받치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왜 그런가? 나는 배우는 학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글만 보고서 인격이 완성된 자로 파악하는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난감하다.
아반띠뿟따 왕은 깟짜나 존자로부터 설법을 듣고 감명받았다. 그래서 “존자 깟짜나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깟짜나여, 훌륭하십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 있는 자가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어 올리듯이, 존자 깟짜나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존자 깟짜나께 귀의합니다.”(M84)라고 말했다. 귀의문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설법한 자에게 귀의한다고 했을 때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반띠뿟따 왕은 깟짜나 존자에게 설법을 듣고 감동했다. 그래서 왕은 존자에게 귀의하겠다고 말했다. 존자는 어떻게 답했을까? 놀랍게도 “대왕이여, 그대는 나에게 귀의하지 마십시오. 내가 귀의한 세존께 귀의하십시오.”(M84)라고 말했다.
아반띠뿟따 왕은 깟짜나 존자의 말을 존중했다. 그래서 깟짜나 존자가 아닌 부처님에게 귀의하고자 했다. 왕은 부처님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찾아 가겠다는 것이다. 이에 깟짜나 존자는 “대왕이여, 그 거룩한 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세존께서는 지금 이미 완전한 열반에 들었습니다.” (M84)라고 말했다. 이럴 때 왕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맛지마니까야 84번 마두라 설법의 경은 부처님 사후에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재가자가 수행승에게 설법을 듣고 감동해서 그 수행승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겠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승중에는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수행승도 있을 것이다. 이런 수행승에게 귀의하겠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받아 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 깟짜나 존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비록 열반에 들었지만 부처님에게 귀의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담마에 귀의하고 상가에 귀의하라고 했다. 이것이 부처님 제자의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오늘 아침 일터로 걸어가면서 빠다나경 25게송을 암송하면서 걸어 갔다. 암송 중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한국불교에서 승보의 개념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 새벽 맛지마니까야 84번 경을 읽고 연계해서 생각해 보았기 때문이다.
한글 삼귀의문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승보개념에 대한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승보에 대하여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법회를 하면 노래의 형태로 부른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승보는 거룩한 스님들이 아니라 승가공동체이다. 그것도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동공체를 말한다. 그럼에도 어느 나홀로 사는 스님이 있어서 자신에게 귀의하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으라고 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의 제자가 아닌 자로 보아야 한다.
스님을 승보로 보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재가불자가 스님에게 귀의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이다. 또한 스님이 스님에게 귀의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수많은 파벌이 생겨나고 수많은 종단이 생겨나는 이유가 된다.
불교인들은 오로지 부처님 한분에게 귀의해야 한다.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어 지금 계시지 않아도 귀의의 대상은 부처님(Buddha)이다.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Dhamma)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공동체(Sangha)에 귀의해야 한다.
맛지마니까야 84번 마두라설법의 경을 보면 한국불교에 대하여 일갈하는 듯하다. 마치 한국불교에서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듯하다. 그것은 “대왕이여, 그대는 나에게 귀의하지 마십시오. 내가 귀의한 세존께 귀의하십시오.”(M84)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모두 초기경전, 니까야에 있는 가르침이다.
우리나라 스님들은 초기경전을 잘 읽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대승불교 전통이고 선불교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차박람회장에서 어느 스님은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웠다.
한국 스님들이 니까야를 읽으면 한국불교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한국불교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마도 가장 먼저 한글 삼귀의문부터 뜯어 고칠 것이다. 승보에 스님 대신 승가를 넣을 것이다.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삼보에 귀의해야 한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공동체에 귀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승가공동체 대신에 스님들을 집어넣었을 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어기게 된다.
초기경전에서는 분명이 부처님에게 귀의하라고 했지 스님에게 귀의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스님에게 귀의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나에게 귀의하지 마십시오. 내가 귀의한 세존께 귀의하십시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불자들은 스님에게 귀의하지 말고 부처님에게 귀의해야 한다. 스님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지말자.
2022-06-0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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